4.
“형.”
“읏.”
찰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수환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눈앞은 수증기로 꽉 차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수환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아.”
몸이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지독한 근육통을 느낀 수환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파….”
“많이 아파요?”
“…응.”
“어디가?”
“배랑… 허리랑…….”
반쯤은 잠과 노곤한 기운에 취해 수환은 아픈 곳을 줄줄이 말했다. 그러자 다정한 손길이 아프다고 한 곳들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
근육이 풀리는 느낌에 수환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얼마간 꾸벅꾸벅 졸다가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에 떨어지자 확 정신이 들었다.
“……승현이?”
“네.”
깜짝 놀란 수환은 자신의 허리를 주무르고 있는 승현을 바라보았다. 푹 젖어서 어두운색을 띠는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다.
수환은 뜨거운 물을 채워 넣은 욕조 안에 승현과 함께 있었다. 수환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승현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너…… 이제 괜찮아?”
몇 번 눈을 깜박이던 수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에도 자신을 사납게 몰아붙이던 승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승현은 겁먹은 듯한 수환을 보며 픽 웃었다.
“덕분에요.”
“하아, 다행이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음.”
수환은 차마 빈말로라도 괜찮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몸 구석구석에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배 속은 조금만 움직여도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 수환은 이제는 평평해진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다행히도 씻으면서 승현이 뒤처리를 해 준 건지, 어젯밤처럼 기이할 정도로 배가 불러 있지 않았다. 그때의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떠올린 수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해요, 형. 내가 많이 힘들게 해서.”
“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승현을 본 수환이 당황했다. 승현은 곧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기억과 느낌이 머릿속과 몸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시선을 조금만 내려도 엉망이 된 몸이 보일 터였다. 하지만 수환의 눈은 처연하게 눈을 내리뜬 승현의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승현이도 히트가 와서 힘들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 도저히 승현을 원망할 수 없었다. 애초에 크게 탓할 마음도 없었지만……. 어쨌든 조금은 빈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아니야. 너도 그러고 싶은 게 아니었을 텐데.”
“…….”
“히트가 너무 세게 와서 그런 거잖아. 그치?”
“…….”
수환의 물음에 승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의아해질 찰나, 승현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자제할게요. 형한테 말해서 억제제 용량을 조절하면 될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 말을 듣고 수환은 안심이 되면서도 조금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승현과 보낸 히트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프고 힘들기만 했는데, 막상 이제 안 그런다고 하니 또…….
‘헉, 내가 무슨 생각을…….’
얼른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아쉽다니. 히트가 왔던 승현과 달리 정신이 멀쩡했던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무슨 밝힘증 환자도 아니고. 자신이 너무 파렴치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수환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아파서 그래요?”
“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승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수환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승현은 계속해서 수환의 몸 구석구석을 주무르며 마사지를 해 줬다.
따뜻한 물속에서 마사지를 받으니 노곤하게 몸이 풀리는 느낌에 수환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어쨌든 히트가 끝난 승현이 원래대로 다정한 모습을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됐어. 괜찮아.”
“욕조에 너무 오래 있었죠? 이제 나갈까요?”
“응.”
욕조에서 나간 다음 몸에 있는 물기를 말리고 다시 침실에 돌아갈 동안, 수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웬만해선 수환도 자기가 하겠다고 할 텐데,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승현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위잉.
그렇게 침대 위에 앉자 승현이 뒤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드라이어로 말려 주었다. 수환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손을 뻗으니 바스락거리는 마른 시트가 만져졌다. 그걸 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시트 빨았어?”
“네.”
“너도 힘들었을 텐데.”
“전 괜찮아요.”
보지 않아도 뒤에서 빙긋 웃고 있을 승현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승현은 남을 챙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수환은 납득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피곤하죠? 더 잘래요?”
“으음.”
“아니면 밥 먹고 잘래요?”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 승현이 물었다. 수환은 잠시 고민했다. 따뜻한 욕조 안에서 오래 있었더니 잠이 몰려왔다. 그리고 배 속은 아직도 민망한 이유로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수환이 졸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잘래.”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침실의 불을 껐다. 그리고 수환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 정확히 며칠일까. 히트 사이클이 온 승현에게 휩쓸린 바람에 덩달아 날짜 감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곧 승현은 중간고사 기간일 테고, 그럼 자신은 슬슬 회사에 가야 할 시기일 것이다.
“승현아, 나 핸드폰 좀.”
“지금요? 이따 보고 지금은 자요.”
“음.”
승현의 조곤조곤한 말에 수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아, 모르겠다. 너무 졸려서 더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
고개를 작게 끄덕인 수환은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승현의 품에 코끝을 비비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곧 수환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승현은 수환이 잠들 때까지 가만히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새근새근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승현이 곧 몸을 일으켰다.
탁.
“후.”
침실 밖으로 나오자, 아직 집 안 곳곳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페로몬이 코를 찔렀다. 거의 일주일을 장소 가리지 않고 해댔으니 이 정도로 페로몬이 남아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실에 서서 주변을 잠시 돌아본 승현이 슬슬 몸을 움직였다. 우선은 거실을 어질러 놓은 물건부터 하나둘씩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거실과 이어진 복도에 널브러진 옷을 치우면서 수환과 자신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핸드폰이 대체 어디에 가 있나 했더니, 옷가지 안에 파묻혀 있었던 모양이다. 무심하게 두 개의 핸드폰을 집어 든 승현이 수환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다가 흠칫하고 멈췄다.
검은 화면 위에 메시지를 알리는 배너가 반짝 떴다가 사라졌다. 그곳에 뜬 이름을 본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윤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이름이라고 한다면, 수환의 섹파 오메가일 확률이 높았다. 승현이 싸늘한 얼굴로 수환의 핸드폰을 노려봤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했다.
차윤현
수환 씨,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차윤현
바쁜가 봐~?
차윤현
수환 씨?
차윤현
다음 주부터 출근하는 거 맞지?
차윤현
왜 연락도 안 받지…^^; 확인하면 연락줘
최근에 온 메시지를 눈으로 훑은 승현은 화면을 올려 지난 메시지를 더 확인했다. 그걸 보고 차윤현이라는 사람이 수환의 회사 동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환이 방학 때 인턴 근무를 했던 화명 본사의 직원. 하지만 형질은 알 수 없었다. 이런 메시지만으로는 그가 오메가인지, 알파인지, 아니면 베타인지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승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차윤현’의 연락처를 찾아내 자신의 번호로 전송했다. 전송한 다음엔 티가 나지 않도록 전송했다고 알리는 메시지를 지웠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승현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실을 마저 치우고 수환이 자고 있는 침실로 돌아갔다.
***
수환이 다시 자고 일어났을 땐, 모든 게 일주일 전과 똑같아져 있었다. 달라진 건 자신의 몸뿐이었다. 눈을 뜬 수환은 반나절 정도를 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죽 먹어요.”
“응.”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난 수환이 죽 그릇을 들고 온 승현을 쳐다봤다. 승현은 수환이 먹기 편하도록 접이식 테이블까지 가져와 무릎에 두고는 그 위에 죽 그릇을 올려놓았다.
“고마워.”
“뭘요.”
“너는 먹었어?”
“네.”
눈이 마주치자 승현이 싱긋 웃었다. 그러나 수환은 어쩐지 그 미소를 보며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히트 사이클 때 밥이 아닌 것을 먹으며 만족해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 잘 먹을게.”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숟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고소한 죽을 먹으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예기치 못하게 승현과 히트 사이클을 보내느라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다. 수환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죽을 다 먹고 난 후, 그릇과 테이블을 치우는 승현에게 물었다.
“내 핸드폰은?”
순간 승현의 얼굴이 설핏 굳었지만 수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곧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으며 승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거실에 떨어져 있었더라구요.”
“아, 그랬구나.”
거실……. 첫날, 거기서 승현과 키스를 하다가 정신을 잃었었지. 아마 그때 떨어트리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핸드폰을 전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승현에게 건네받은 핸드폰의 감촉이 낯설 정도로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했던 것이다.
“흠,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하고 화면을 눌렀다. 그러자 방전되기 직전의 배터리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일주일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켜 놨으면 계속 배터리가 닳았을 텐데, 그래도 용케 살아 있는 게 신기했다.
얼른 충전을 하며 메시지 온 것들을 확인했다. 걱정하는 화련의 메시지, 사과하는 도운의 메시지를 확인하던 수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차윤현]
의외의 이름을 발견한 수환이 손가락을 멈칫했다. 눈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훑었다. 그러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요?”
“아.”
다가와서 묻는 승현의 얼굴은 묘하게 눈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 메시지를 확인하던 수환은 알아채지 못하며 대답했다.
“그냥, 다음 주부터 회사 가야 해서.”
수환은 빙의하고 이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인턴십을 하던 화명 본사에 출근해야 했다. 처음에는 회사에 가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호텔에서 빈둥거리다가, 도운의 연락을 받고 나서야 겨우 회사 위치를 검색해서 찾아갈 수 있었다.
도대체 진수환이 그곳에서 어떻게 굴었던 건지, 아파서 출근하지 못했다는 인턴의 말에도 회사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아무도 무단결근한 수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참으로 뻘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아무도 수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바리한 자신이 뭔가를 한다면 다 망쳐버려서 큰일 났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도 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 회사에서 안면을 트게 된 사람이 바로 차윤현 대리였다.
차윤현은 로열패밀리는 아니지만 집안이 꽤 빵빵한 편이었다. 부모님이 각각 판사, 변호사 출신에 차윤현의 형은 검사였다. 그런 집안에서 고작 대기업에 입사한 건 잘된 축에 들지도 못한다며 너스레를 떨며 웃기도 했다.
수환은 처음엔 그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진수환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사수이자 담당인 윤현이 시종일관 수환을 싸늘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제대로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윤현과 조금 가까워질 수 있었다. 비록 인턴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짧은 시간 동안 대화를 트고 지냈던 거지만, 다행히도 메시지를 보니 자신에게 꽤 호감이 남았던 모양이었다.
“회사 대리님이 다음 주에 출근하는 거 맞냐고 물어보네.”
“대리… 요?”
“응, 인턴 때 내 담당이셨거든.”
커피 한 잔 끓여서 줘도 기겁하며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보던 윤현을 떠올리던 수환이 픽, 하고 웃었다. 물론 친해진 다음에는 온도 차이가 심했었지만. 윤현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피식피식 웃는 수환에게 승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사람, 오메가예요?”
“응? 아니, 우리 회사에 오메가는 별로 없어.”
“그래요?”
“응, 대리님은 알파야.”
“그렇구나.”
대답을 들은 승현의 얼굴엔 어딘가 안도하는 빛이 스쳤지만 수환은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빠졌다.
화명이 오메가를 차별하는 보수적인 회사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아무래도 회장인 진길영이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회사의 방침도 그와 비슷했다. 오메가의 입사율은 정부가 지정하는 딱 그만큼만 칼같이 지키는 회사였다. 심지어 그것도 계약직의 비율이 더 높았다. 승현이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봐 걱정됐다. 수환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다른 부서에는 오메가 직원들도 꽤 있거든. 우리 부서가 특히 그런 거야.”
“……?”
“아, 네가 좀 안 좋게 생각할까 싶어서 그냥. 할아버지가 좀 답답한 사람이라서 그래.”
아마도 화련이 회장이 되면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녀가 대표로 있는 계열사는 오메가의 비율도 높고 직원 복지도 후하다고 들었다. 화명 전체가 점차 그렇게 바뀌지 않을까. 수환은 그런 말을 하며 승현의 눈치를 봤다.
“괜찮아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래?”
“네, 오히려…….”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승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수환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전화가 오자 깜짝 놀라며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화련누님]
화련의 전화였다. 수환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환아.
“네, 누님.”
―드디어…… 끝난 모양이구나.
“아, 네…….”
―…….
알파들 특유의 어색한 느낌이 한동안 감돌았다. 그러다가 화련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몸은 좀 어떠니?
“저랑 승현이 둘 다 괜찮아요.”
―그렇구나.
“네.”
―…….
어쩐지 화련이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수환은 눈치가 없는 편이지만, 이 순간에는 어쩐지 그녀가 묻고자 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수환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그……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네, 잘…… 처리했거든요.”
그걸 과연 잘 처리한 거라고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화련이 묻고 싶은 건 승현의 히트 사이클 기간 동안 피임을 잘했는지 아닌지였고, 둘은 애초에 피임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으로 히트를 보냈다. 그러니 다소 어긋나 있어도 추구하는 방향성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승현이 잘못될 일은 없을 테니까.
―후,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네.”
―만나서 할 얘기가 있는데, 언제쯤 시간이 되니?
“전 언제든 괜찮아요.”
―그럼 스케줄 보고 메시지 보내도 되겠니?
“네, 그렇게 하세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승현이 핸드폰을 내려놓은 수환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대표님이 형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어? 좀 그렇지.”
“사촌이면 남이나 다름없는데.”
“그런가?”
“네, 저는 사촌들 이름도 잘 모르거든요.”
“그 정도야?”
“네.”
“음…….”
확실히 화련과의 사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진수환의 가족이라곤 진 회장과 화련 둘뿐인데, 그나마 사이가 좋은 화련이 자신을 챙겨 주는 건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누님이랑 거의 남매처럼 자라서 그래.”
남매라기보다는 화련이 키워 주다시피 했던 거지만.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던 수환은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어떤 기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진수환의 과거라고 하기에는 수수한 옷을 입은 화련과 진수환의 어린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뭐지?”
“뭐가요?”
“응?”
고개를 돌려 승현을 보자, 언뜻 떠올랐던 기억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색한 얼굴로 승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옛날 생각이요?”
“응.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누님이 거의 나를 돌봐 주셨으니까.”
무심코 한 말에 승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환에게는 진짜 부모도 아니었기에 상처받을 일도 아니었지만, 승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안 좋은 기억 떠올리게 만들어서.”
“어? 아니야.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이 슬퍼하는 티를 낸다면 그건 기만이었다. 그리고 승현에게 죄책감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수환이 거듭 말했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그래도 승현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수환이 가볍게 농담도 할 겸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럼, 네가 뽀뽀해 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
“알았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 승현이 수환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뺨을 툭툭 건드리며 시작한 입맞춤이 점점 입술 쪽으로 옮겨갔다. 도톰한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며 입을 맞췄다.
“으음.”
혀를 집어넣지 않고 입술만 부딪치는 건데도 어쩐지 야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배가 꽉 조이는 느낌에 수환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승현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더 진한 키스를 원하는데, 입만 맞추는 승현에게 안달이 났다. 한숨을 내쉬며 승현의 입술에 입을 댄 채로 수환이 말했다.
“승현아, 왜…….”
그러자 눈을 휜 승현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뽀뽀만 해 달라면서요.”
“읏.”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자신을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뽀뽀만 할 거야?”
뜨거운 열기를 띠기 시작하는 눈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나 발산했다고 생각했는데, 수환의 벌게진 눈가를 보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대로 찍어 눌러 옷을 찢듯이 벗기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승현이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흥분으로 인해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고 빙긋 웃었다.
“나 못 참을 것 같은데, 그래도 돼요?”
“…….”
노골적으로 묻는 말에 수환이 입을 다물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히트 사이클로 제정신이 아닌 승현에게 시달린 참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느낌이 제법 생생했다. 울고불고 사정해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승현이 어찌나 끈질겼던지, 지금도 배 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남아 있었다.
승현은 손을 들어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수환의 뺨을 쓸었다. 그간 잘 먹여서 탱탱했던 볼이 안쓰러울 정도로 쏙 들어가 있었다. 자신에게 왔던 일주일의 히트 사이클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에 죄책감을 느끼는 승현의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형이 싫으면 절대 안 할게요.”
“어…….”
싫은 게 아닌데. 싫은 게 아니라…….
달싹거리는 입술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승현은 그런 수환을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이제 다시는 그를 페로몬으로 짓누르고 억지로 관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영원히 자신의 옆에 둘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
승현에게서 자신을 감싸는 상냥한 페로몬이 느껴지자 수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직된 몸이 조금씩 풀어져 갔다. 아프기만 했던 몸의 통증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싫은 게 아니야.”
“그럼요?”
“싫은 게 아니라, 아직 좀 무서워서.”
무서웠다. 숨기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드러내던 욕망이 무섭고 버겁기만 했다. 정말로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실감했었다. 희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던 승현이 죄책감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신 아프지 않게 할게요.”
“응.”
“미안해요, 형.”
“……사과 안 해도 돼.”
고개를 저은 수환이 승현의 목에 두른 팔을 끌어당겼다. 눈앞으로 다가온 얼굴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이번엔 키스해 줘. ……뽀뽀 말고.”
“훗.”
연인의 귀여운 투정에 승현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요.”
그리고 수환의 입술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
“어서 오세요, 누님.”
“수환아.”
수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련을 보며 싱긋 웃었다. 처음 그녀와 만났던 곳에서 수환은 화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 안에 따로 마련된 룸 안에 들어온 화련이 일어나 있는 수환의 앞에 섰다.
“많이 야위었구나.”
“그런가요?”
화련이 손을 들어 수환의 볼을 쓸었다. 분명 전에는 더 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오메가와 히트를 보내고 온 수환의 양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같은 알파로서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으니까, 화련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을 내리고 딱딱한 얼굴로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적당히 하렴.”
“아, 네, 네.”
화르륵 불타는 얼굴을 보며 화련이 속으로 혀를 찼다. 우성 오메가의 히트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각인한 화련에게까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수환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우성의 페로몬이 그에게 잔뜩 묻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먼저 느긋하게 식사를 했다.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가를 닦은 화련이 고개를 들어 수환을 바라보았다.
“수환아.”
“네, 누님.”
순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수환을 마주 보며 화련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일주일 전, 히트가 온 승현을 병원에 보내지 않고 수환의 집에 들여보낸 화련은 분노한 진 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수환이 히트가 온 오메가와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말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화련은 수환에게 딱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놀라지 말고 들으렴. 곧 내가 화명의 회장이 될 거란다.”
“……네?”
“만약 너도 동의한다면, 날 도와줬으면 좋겠구나.”
“……!”
담담한 화련의 말에 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
놀라긴 했지만, 사실 이건 원작에서는 맞는 흐름이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다.
진수환이 죽은 다음,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손자를 잃은 상심이 컸기 때문인지 진 회장은 화련에게 회사를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 때문에 화련 역시 승계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느라 진수환의 죽음을 파헤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 진 회장은 아직 회장직에서 물러날 일이 없고, 화련 역시 회장 자리에 큰 욕심이 없었을 텐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환이 눈을 깜박이다가 물었다.
“어째서 그런 결심을…… 하시게 된 건가요?”
“…….”
“혹시 저와 승현이 때문인가요?”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수환 역시 진 회장이 한 짓은 충격적이었다. 약까지 써서 선을 본 상대와 밤을 보내게 하려던 것과 히트가 온 승현을 자신에게서 억지로 떼어 내려고 했던 것. 만약 진 회장이 진짜 가족이었으면 수환은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진 회장을 남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충격은 받았지만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진 회장에게 승현과의 사이를 인정받지 못하는 게 상당히 곤란할 뿐이었다.
설마 그래서 화련이 진 회장을 몰아내고 회장 자리에 오를 생각을 한 건가 싶었다. 화련은 조심스럽게 마주 보는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큰 이유긴 하지.”
“아…….”
“그리고 어차피 곧 내 것이 될 텐데, 조금 앞당겨도 문제없지 않겠니.”
담담하게 말하는 화련을 보며 수환은 숨을 삼켰다. 놀라긴 했지만 화련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그녀와 퍽 잘 어울렸다.
“누님은…… 저와 승현이 사이를 인정해 주시는 거죠?”
수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승현과의 미래였다. 만약 화련이 진 회장과 달리 승현과 자신의 사이를 인정해 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 점을 눈치챈 듯 화련이 가만히 수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래. 단, 그 아이와 결혼하면 반드시 우성 알파를 낳아야 한다.”
“……!”
“너도 알다시피 나와 혜진이 사이에서는 아이가 생기는 것이 불확실해. 화명의 다음 후계는 너희가 낳아야 할 거야. 알겠니?”
수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화련의 배우자는 열성 오메가였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자궁이 약한 체질이라 착상이 잘되지 않았다. 불임에 가까운 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련에게 중요한 건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혜진과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럼에도 화명의 후계를 생각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수환 역시 이런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라니. 아직 결혼도 하지 못했는데 아이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처럼 우성 오메가와 짝이 되는 거잖니.”
“…….”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단다.”
그게 화련이 자신과 승현의 결혼을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우성 형질을 가진 알파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진 회장은 형질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더 생각했지만, 화련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화련에게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승현의 사이가 다른 알파와 오메가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승현과의 아이. 과연 낳을 수 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를 직면하니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수환을 화련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아.”
정신을 차린 수환이 의아한 기색을 비치는 화련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아이에 관한 건, 아직은 먼 미래의 문제다. 결혼 허락을 받는다고 해도, 적어도 승현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식을 치르게 될 테니 아이 문제로 압박받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니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누님.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만족스럽게 웃는 화련을 보며 수환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과연 승현이 받아들여 줄까. 어쩌면 지금 승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원작의 진수환과 달리 자신은 그에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이를 가져야 한다며 압박하고, 진수환과 같은 짓을 하면 승현이 자신에게 정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눈앞에 놓인 레모네이드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며 수환이 다시 한숨을 삼켰다.
***
그 시각, 승현은 재현을 만나고 있었다. 또 밤새 실험하느라 잠을 못 잔 건지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재현을 무심히 보며 승현이 약통을 내밀었다.
“약,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뭐?”
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약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다지 줄지 않은 약을 확인하고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냐?”
“응, 억제제가 전혀 안 들었어.”
“그럴 리가. 지금까지 만든 성분이랑 똑같은…….”
말을 하다가 재현이 멈칫했다. 그동안 만든 억제제는 승현이 알파와 접촉하기 전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승현은 아니다. 그 알파와 러트도 같이 보냈다고 했지. 재현이 굳은 얼굴로 승현을 응시했다.
“너 마지막으로 페로몬 수치 쟀을 때가 언제였지?”
“그건…….”
승현은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페로몬 수치를 쟀던 건, 그가 막 우성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였다.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열셋의 여름이었다.
하필 가족들과 떨어진 어려운 상황에서 발현했던 거라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으레 그랬듯이 승현은 혼자서 발현열을 버티며 견뎌냈다. 그리고 그때 쟀던 페로몬 수치로, 승현은 자신이 우성 오메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 발현할 때 재고 안 재 봤어. 왜?”
“음, 약이 안 들을 정도면 페로몬 수치를 다시 재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승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병원에 간다고 하면 수환이 걱정할 텐데. 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승현을 보며 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 계속 알파와 접촉하면 몸에 어떤 이상이 올지 몰라. 그동안 먹었던 약으로는 페로몬을 억제하기 힘들겠지.”
“…….”
“그… 흠, 수환…… 씨가 열성이라고 했었나?”
“응.”
“으음.”
열성 알파의 페로몬으로는 그렇게 큰 변화를 주지 못했을 텐데. 턱을 쓰다듬던 재현이 순간 든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각인했냐?”
“각인?”
승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인. 각인이라. 사실 생각도 하지 못한 문제였다. 자신과 수환이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 러트와 히트가 겹쳤을 때 각인을 할 수 있었다. 발정기가 오지 않더라도 관계를 하다가 서로 감정이 커져 각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긴 하지만, 승현은 자신과 수환이 각인을 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
“흠.”
재현은 안색이 어두워진 승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손안에서 잘그락거리는 약통을 흔들었다.
하긴, 아직 동거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하는 행동은 완전히 막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눈꼴시었지만 말이다. 무심코 한정식집에서의 일들을 떠올리며 재현이 인상을 구겼다.
어쨌든 아직 어린 두 사람이 각인까지 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능숙한 사람들도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하물며 승현은 수환이 첫 상대였을 것이다. 처음인데 각인이고 뭐고, 다른 것들을 잔뜩 감당하느라 벅찬 상태겠지.
“그, 흠, 있잖아.”
“왜?”
재현은 이걸 물어야 할까 고민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성생활에 대해서는 묻기가 꺼려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승현은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그러니 자신이라도 꼭 물어봐야 했다.
“피임은…… 제대로 하고 있지?”
“…….”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승현은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평범한 알파 오메가 커플처럼 보일 것이다. 그 반대일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테지. 승현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이지.”
“흠, 뭐,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민망해하던 재현이 약통을 챙기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대학 병원에 아는 사람 있으니까 검사받아 봐. 요즘은 그렇게 오래 안 걸린다더라.”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야 했다. 화련을 만난 수환도 지금쯤에는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실을 나가려는 승현을 재현이 급하게 불렀다.
“야, 잠깐만.”
“왜?”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 승현은 미미하게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집에 뭐 꿀이라도 숨기고 왔나. 왜 저렇게 빨리 못 가서 안달이야. 속으로 혀를 찬 재현이 책상 위에 있는 무언가를 집어서 내밀었다.
“이거, 흠, 가져가라.”
“이게 뭔데?”
반사적으로 건네받은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게 물어봤지만,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얇은 상자의 겉에는 앙증맞은 모양의 초콜릿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유명 브랜드의 것이었다.
“초콜릿?”
“흠, 그때 보니까. 우리는 먹지도 않던 디저트 잘 먹던데. 어차피 여기 놔둬 봤자 아무도 안 먹고……. 너나 가져가라.”
형제인 승현과 재현은 입맛이 비슷했다. 둘 다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현의 연구실에 모인 사람들도 똑같아서 초콜릿 같은 건 입에 대지도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포션처럼 쭉쭉 빨아댔다.
우연히 얻은 초콜릿인데, 이걸 어쩔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수환이 생각났다. 한정식집에서 그는 제 몫의 떡을 한입에 다 먹더니 슬슬 눈치를 봤다. 형제는 똑같이 자신의 앞에 있는 떡 같은 거에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먹고 싶어 하는 기색이기에 재현은 얼떨결에 그에게 떡을 양보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긴 한데……. 형이 이런 걸 왜 챙겨?”
“아니, 챙기는 건 아니고, 흠. 버리면 아까우니까 가져가라는 거지, 뭐.”
자꾸만 헛기침이 나와서 재현은 괜히 말을 빨리했다. 그런 재현을 보며 승현이 두 눈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재현과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취향이 비슷했다. 먹는 것부터 옷 스타일까지.
혹시 이상형도 겹치는 건 아니겠지?
순간 떠오른 의문에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설마, 기분 탓이겠지. 고작 한 번 만났는데 그 정도로 호감을 느낄 리는 없었다. 자신의 억측일 뿐이라고 마음을 달래며 초콜릿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잘 전해 줄게.”
“그래.”
승현의 눈빛에 찝찝함을 느끼면서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보이는 승현의 매서운 눈에 괜히 흠칫 놀랄 때가 있었다.
얘도 다 컸다고 이러는 건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재현이 연구실을 나가는 승현을 성의 없이 배웅했다.
***
“병원?”
초콜릿을 먹던 수환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 주던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각한 건 아니고. 억제제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요. 페로몬 수치만 다시 확인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안도하는 수환의 입속으로 작은 초콜릿 하나가 쏙 들어갔다. 수환은 그걸 무의식적으로 씹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나도 같이 갈까?”
“괜찮아요. 혼자 가도 돼요.”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안심하라는 듯이 씩 웃은 승현이 상자에서 초콜릿을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수환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형은 이제 회사 다녀야 하잖아요. 힘들 텐데 괜히 왔다 갔다 하지 마세요.”
“음… 알았어.”
“맛있어요?”
“응.”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맛을 느끼며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준 초콜릿은 수환의 입맛에 딱 맞았다. 무엇보다 승현의 형인 재현이 자신을 생각해서 보내 줬다는 게 기분 좋았다. 수환이 행복한 얼굴로 입안의 초콜릿을 혀로 굴렸다.
“너도 먹을래?”
“아니, 저는…….”
단 걸 싫어하는 승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싫어하는 초콜릿이 수환의 입안에 있는 것이라면 말이 다르다. 승현은 말끝을 흐리며 초콜릿이 조금 묻어 있는 수환의 입술에 시선을 보냈다.
“그럼 한 입 먹을까요?”
“응, 그럴래?”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수환의 턱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리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이었다.
“어어.”
수환이 손을 뻗어 승현의 옷깃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멱살을 잡혀 입술이 부딪힌 승현은 눈을 크게 떴다.
“음, 으응.”
“하, 음.”
초콜릿을 머금은 혀가 승현의 입안을 휩쓸었다. 진득한 초콜릿은 별로 취향이 아니지만, 그 속에서 단내를 풍기는 혀는 정확히 승현의 취향이었다.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혀에 제 혀를 맞대며 신음을 흘렸다.
“응… 맛있어?”
“하…… 이러는 거 어디서 배웠어요? 응?”
“으음. 너한테.”
승현은 요망한 짓을 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과일의 과즙이 터지는 것처럼 단맛이 확 퍼졌다. 흥분한 승현이 체중을 실으며 조급하게 몸을 붙였다.
어느새 수환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분명 승현과 히트를 보낸 직후에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행위에 질렸을 정도였는데, 왜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더 뜨거워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이후로 몸 어딘가가 망가진 건 아닐까.
“아읏.”
수환은 저릿하게 혀를 빠는 승현을 느끼며 뜨거운 신음을 흘렸다. 히트가 끝나고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열기가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