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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48화 (148/150)

148화

“…이게 다 뭐야?”

방황하던 시선이 한우주에게 닿는다. 한우주 역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 듯싶게 보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이리저리 만져 보았지만, 신호가 터지기는커녕 아예 작동하질 않았다.

“태원아, 저기에.”

연신 주변을 둘러보던 한우주가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하얀 공간에 까만 글씨가 점점이 늘어져 있어 척 봐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혹여 걷다가 땅이 꺼지기라도 할까, 한우주와 손을 잡은 채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공중에 떠오른 글씨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System Error: 엔딩을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뭐?”

엔딩을 불러오는 데 실패했다고? 그게 뭐야. 이 공간은 또 뭐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 속에서 헤매던 때에, 글씨가 지직거리며 형태를 바꾸었다.

「System: 한우주의 곁에 머무르세요.」

나는 바로 곁에 있는 한우주를 쳐다봤다. 한우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때, 공중에 새로운 글이 쓰이기 시작했다.

「태원아.」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지 마.」

이곳에서 나를 태원이라 부르는 사람은, 내게 가지 말라고 할 만한 이는 한 사람뿐이다.

「System: 주인공, 한우주는 당신이 떠나길 바라지 않습니다.」

이내 ‘가지 마.’라고 적힌 창이 수십, 수백 개가 동시에 떠올라 시야를 가렸다. 새하얗던 공간이 글씨에 가려져 점차 검게 물들어 갔다. 그 광경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공포심이 솟구쳤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끝없이 떠오르는 글자들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나는 가만히 잡고 있던 한우주의 손을 뿌리치고, 아직 물들지 않은 하얀 공간을 향해 내달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드디어 엔딩일이 다가왔는데. 지금쯤 나는 게임 속 세상을 나갔어야 했는데….

아마도 나를 이곳에 가두었을 존재가 한우주의 마음을 대변하며 끝없이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공간은, 시스템은 주인공인 한우주를 중심에 두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면 뭐지? 결국에는 한우주가 나를 이곳에 붙들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태원아!”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저 부름에 응하는 것이 옳은지, 한우주를 믿어도 될 것인지…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나. 한우주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는 게 이 세상의 정체였던가. 잇따르는 생각과 초조함을 떨쳐 내고 싶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나를 쫓는 발걸음이 등 뒤로 바짝 다가온 게 느껴졌다. 이내 나는 한우주에게 팔을 붙들려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태원아, 제발 진정해 봐.”

진정하라니…. 이런 상황에서 진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우주와 시선이 마주친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뒤에야, 나는 한우주 역시 겁에 질려 있음을 알았다. 그런 주제에 나를 달래는 목소리는 침착했다.

와중에도 검은 글씨는 계속해서 수를 불려 갔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공간은 검게 물들어 갈 뿐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도, 도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저 글들은 도대체 왜….”

차분히 등을 도닥이는 한우주의 손길에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럼에도 나는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왜… 한우주 네가 나한테 말을 건네는 것처럼 구는 거야….”

사방에 즐비한 글들이 말하는 듯했다. 그냥, 포기하라고. 내가 한우주의 곁에 남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게 진정한 해피 엔딩이라고.

“…태원아, 일단 침착하자. 뭐든 방법이 있을 거야.”

한우주는 다시금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결연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꼭 내보내 줄게.”

“…….”

“일단…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자. 여기선 좀처럼 길을 알아보기 힘드니까.”

한우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태원아」,「가지 마.」라고 적힌 글들이 가득한 창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띄는 것부터 천천히 살펴보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아무리 봐도 똑같기만 한 글들을 진지한 얼굴로 죽 읽어 내렸다. 나 역시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에는, 한우주를 따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이토록 징그럽게 많이 쓰인 건 처음 보는데…. 역시 기분 나빠.

“태원아, 여기.”

그때 한우주가 어느 부근을 가리키며 주의를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지금껏 본 것과는 조금 다른 글이 적혀 있었다.

「더는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없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게 더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이 근처를 좀 더 살펴볼게.”

그리고 머지않아 한우주는 또 다른 글을 찾아냈다.

「네가 곤란할 테니까.」

이전 문장과 묘하게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퍼즐을 푼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시야 가득히 차오른 글자들을 헤집어 간다.

「솔직히, 이제 너 없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찾아낸 문장을 읽곤 정신이 멍해졌다. ‘태원아’, ‘가지 마.’부터 죽 이어진 문장들. 이곳이 어떻게 이루어진 공간인지 떠올려 보면… 이건 전부 한우주의 속마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나 다를까, 한우주는 이번 문장을 찾아내 읽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 문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네가 내 옆에서 불행하길 바라지는 않아.」

기분이 이상했다. 한우주가 차마 입으로 꺼낸 적 없는 말들이 하나씩 이어져 길을 만들었다. 한우주의 진심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절절해서, 다음 문장을 마주하기 두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외면해서는 안 될 터이다.

“태원아, 잠깐 주변 좀 봐.”

“응?”

한우주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전보다 트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문장을 따라올수록 공간을 새까맣게 메웠던 글자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옳은 길을 따르고 있다는 뜻일까?

다음 문장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

“…….”

이제 주변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온통 하얬다. 공백의 가운데 적혀 있는 문장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한우주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문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할 말이 이렇게 많으면서.”

나는 한우주와 잡은 손에 힘을 조금 주며 말했다. 처음 이곳을 마주했을 때의 공포심은 어느새 잔잔히 가라앉은 뒤였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냥 헤어질 생각이었어?”

“……말해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

“네 속은 좀 편해질 수도 있잖아.”

하고 싶은 말이라곤 평생 전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썩일 생각이었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여길 떠나기 전에 날 만나 준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나는 한우주를 만나지 않을 생각도 했으니. 한우주는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미소 지으며 ‘가자.’라고 작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우주와 함께 걸어 나갔다.

멀리 보이는 문장이 가까워질수록, 이 부자연스러운 공간 속에서도 더욱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틈새에서, 하얀 공간보다도 눈 부신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한우주와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저게 여길 나가는 출구구나.

그리고 그 틈새 앞에, 마지막 문장이 쓰여 있었다.

「부디 네가 날 선택했으면 좋겠어.」

…그래, 이게 한우주의 진심이구나.

한우주를 쳐다보자, 한우주가 고개를 저었다. 제 진심을 부정해도 좋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듯이.

아,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나는 손을 뻗어 한우주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내 쪽으로 끌어, 살며시 입술을 포개었다. 그저 그렇게, 잠시 입을 맞댄 채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서로를 보고 서 있었다.

“잘 가.”

한우주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잘 있어.”

마주 웃고는 몸을 돌린다. 틈새 가까이 다가가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세상의 끝에 도달하였습니다.」

「System: 틈새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하얀 공간에 우뚝 선 한우주. 이 뒤에, 한우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새하얀 공간은 원래 세상의 형태로 돌아가는 걸까? 그 안에서, 한우주는 다시 제 삶을 살아가는 걸까.

그때, 한우주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왼쪽 팔을 뻗더니, 내 등을 떠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금방 균형을 잃고, 균열 속으로 떠밀렸다. 등 뒤에서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태원아.”

가슴 속에 절절히 울리는 목소리였다.

“난…!”

나도, 미처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시야가 점멸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System: 축하합니다. 진 엔딩을 달성하였습니다!」

새카만 공간 속에, 이번엔 나 홀로 서 있었다.

「System: 진 엔딩 달성 기념! 보상이 한 가지 주어집니다.」

「System: 보상을 입력해 주십시오.」

…보상이라니. 그런 게 있었던가.

시야는 흐릿하고, 정신은 멍했다. 시스템은 이 게임 속에서 분명 전지전능한 존재겠지. 그런 존재에게 빌 수 있는 거라면….

“한우주가….”

이 순간 내가 바라는 것,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한우주가 행복할 수 있게 도와줘.”

「System: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System: 보상 지급이 완료되었습니다.」

「System: …….」

「System: 게임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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