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11. 변곡점
요즈음 나는 퀘스트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결국 그럴듯한 방법은 찾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그사이 한우주는 어떤 일을 겪었기에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한 걸까? 왜 내게는 말 한마디 없었을까? 지난 일주일간 나는 전과 같이 한우주의 오피스텔에서 지냈다. 그렇지 않으면 한우주가 원룸까지 따라올 기세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언제든지 본가에 가는 것에 대해 귀띔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한우주는 평소와 한 치 다름없이 굴었다. 어쩌면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여러 가지로 충격이었다. 내게 제 사정을 털어놓지 않은 한우주, 그런 한우주가 겪고 있는 곤란을 알아보지 못한 나, 그리고 이 모든 걸 한우주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까지.
“도대체 그 새끼한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데?”
“……그 새끼라고 하지 마.”
“중요하지 않은 건 그냥 좀 넘어가지?”
“중요하니까 말하는 거야.”
“하, 이게 진짜.”
벌써 삐걱대는 대화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임도윤의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밤중에 밖에서 둘이 대면하게 된 상황도 유쾌하지 않다. 그런데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약 몇십 분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느낌이 싸해 받아 보니 다름 아닌 임도윤이었다. 이놈이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생각하며 끊으려 들자, 임도윤이 다급히 말했다.
[누군 너한테 전화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네가 할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어디서 개가 짖냐, 하고 끊으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자, 임도윤이 말했다.
[한우주 그놈이 기어코 집에 들어오겠다잖아. 저번에 너, 나랑 분명….]
불안함이 확 끼쳤다. 집은 무슨 집이야. 퉁명스레 말하자 임도윤이 헛웃음을 지으며 되받아쳤다.
[내 집. 우리 아버지, 어머니 집. 이게 어디서 모른 척을……. 잠깐, 너 진짜 몰랐어?]
전혀. 전혀 몰랐던 일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먼저 요구한 건 내 쪽이다. 임도윤도 할 말이 있던 건지, 흔쾌히 승낙했다. 한우주는 거실에서 내가 사 준 책을 읽고 있었다. 1권을 하루 만에 다 읽어서, 2권에서 5권까지 한꺼번에 사다가 선물했더니 요즘은 책 읽는다고 정신이 없다.
내가 외출하려 들자 한우주가 따라오려 해서 겨우 도로 자리에 앉혔다. 한우주를 다루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냥… 몇 번 입 맞추면 된다. 어쨌든 금방 다녀올 거니까 책이나 마저 읽으라고 했더니 얌전히 내 말을 따랐다. 이럴 때 보면 참 착하고 예뻐 죽겠는데 왜 내겐 입 꾹 다물고 있던 건지, 어떻게든 알고 싶었다.
일단 임도윤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낼 생각이었다. 임도윤과는 오피스텔 근처의 공원에서 만났다. 밤공기가 찼다.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물려 내며 물었다.
“어쨌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네 말대로 나 한우주한테 들은 거 없어.”
“뭐야, 진짜. 너 역시 생각보다….”
임도윤의 도발도 슬슬 패턴이 보였다. 여기에 걸려들었다간 진전도 없이 말다툼만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어?”
“내가 의지가 안 되나 봐.”
“어… 어?”
“이해는 가. 나한테 말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네 아버지 고집을 막겠어. 한우주도 그걸 안 거겠지.”
한우주 문제에서 기 세우고 달려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마음먹고 왔다. 가만 보면 임도윤도 성정이 독하지는 못해서, 차라리 유순하게 구는 것이 상황에 나을 성싶었다. 그리고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래도 너 정도 되는 사이면 좀 말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진짜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응. 못 들었어. 지금 너한테 처음 듣는 거야.”
“와… 한우주 그 새….”
임도윤은 거기까지 말하고 내 눈치를 봤다.
“그… 그새 더 독해졌나 봐?”
웃음이 나왔다. 임도윤 눈에도 내가 썩 안타까워 보였나 보다. 내가 웃자, 임도윤은 잠시 안절부절못하더니 다짜고짜 이야기를 꺼냈다.
“…걔가 먼저 들어오겠다고 말했다던데.”
“……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임도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아버지도 몇 번 더 얘기했겠지. 근데 한우주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만큼 한가로운 분은 아니시거든.”
저번에 네가 본 건 좀 특별한 경우였지. 짧게 덧붙인 말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우주가 먼저 연락해서 들어오겠다고 했다고. 난 그렇게 알고 있어.”
“…….”
“…야?”
머릿속이 멍했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장은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미안.”
“…어, 어어?”
“나한테 물을 거 있어서 온 거 아니야? 한우주가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어… 그래. 맞아.”
“난 진짜 지금 너한테 들은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거든.”
말로 내뱉으니 더욱 참담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임도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마음을 애써 감추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마 알게 돼도 말 못할 거야. 너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할게. 난 한우주에 대해서 막 떠들어 대고 싶지 않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존중해 주고 싶어.”
“아니, 야. 걔는 그럴 만한….”
“임도윤.”
임도윤이 나와 한우주의 관계를 착각해 온 게 지금처럼 다행스럽게 여겨진 적이 없다. 모순적이게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임도윤이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솔직할 수 있다.
“나 한우주 좋아해.”
임도윤이 눈가를 찌푸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했다.
“너한테는 한우주가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집에 대해서 나한테 말 안 한 것도, 뭐든 간에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말하면서 복잡했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어 갔다. 그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우주니까. 혹은 말하려 했는데 적절한 시기를 찾지 못한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앞으로 한우주 일 때문에 날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더는 헛걸음하지 마.”
할 말을 마친 뒤, 심호흡했다. 더 일찍 해야 했을 말이다. 이 정도면 임도윤도 알아들었겠지. 밤이 늦었다. 얼른 들어가지 않으면 한우주의 걱정을 살 것 같아, 인사만 하고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야.”
임도윤은 여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한우주에게 실망하게 될 거야. 걘 그런 놈이니까.”
“…….”
임도윤과 한우주 사이를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이 없다. 그러니, 적어도 예전의 임도윤은 한우주에게 기대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마냥 미워하는 게 아니라.
“만약 정말 그렇게 되더라도… 내가 감당해야지.”
나는 임도윤과 한우주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이 게임은 이상했다. 늘 플레이어에게 부족한 정보만을 던져 줬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알고 싶다면 어떻게든 스스로 파헤쳐 보라는 시스템의 고약한 심보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한우주를 좋아하는 것도 믿는 것도 전부 내가 한 선택이잖아.”
이제야 머리가 완전히 맑아진 기분이다. 아무리 놀랐어도 그렇지. 임도윤의 전화 한 통에 여기까지 나온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우주의 일은 한우주가 가장 잘 알 텐데. 왜 엉뚱한 곳에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나 가 볼게. 너도 얼른 들어가.”
임도윤은 조금 전부터 말이 없었다. 전보다 개운해진 건 나뿐인가 보다. 아랫입술을 꾹 문 모습이 어딘가 분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공원을 빠져나왔다. 조금 전보다 훨씬 캄캄해진 거리에 의지할 것이라곤 가로등 불빛뿐이었다.
***
공원은 평소보다 유독 사람이 적어 적적하기 짝이 없었다. 유령 나오기 딱 좋은 환경이라고, 장난스레 생각했다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추워서 그런 거다. 나는 유령이니 뭐니 하는 생각을 쫓아내고 집에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을 한우주를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마냥 행복해 웃음만 나왔을 텐데. 집에 가서 이야기해야 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영 편치만은 않았다.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집에 가서 한우주한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생각에 잠겨 길을 걷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놀란 나머지 ‘으악’ 하고 꼴사나운 소리를 내 버렸다.
“태원아?”
“응? 어라?”
얼굴을 확인하니 어쩐지 지나치게 잘 생겼다. 누구 남친 닮았는데… 그렇게 생긴 사람이 세상에 둘일 리가 없는데….
“한우주…? 네가 왜 여기 있어?”
역시나. 눈에 힘주고 봐도 한우주다. 한우주는 들고 있던 카디건을 내 몸에 걸쳐 주며 말했다.
“너무 안 오길래, 걱정돼서.”
“어…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
“한우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한우주가 이실직고했다.
“미안. 처음부터 따라 나왔어.”
“뭐?”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네가 너무 얇게 입고 나간 데다가, 늦기도 했고. 그래서….”
“아니, 왜 인제야 아는 척한 거야?”
한우주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얘가 진짜? 황당함에 숨을 푹 내쉬자면, 어떤 생각이 떠올라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잠깐만. 너 그럼 내가 뭐 하러 나온 지도… 나 뭐 했는지 다 봤어?”
“아니.”
즉답하는 게 수상하다.
“한우주.”
“응.”
“거짓말하면 이틀 동안 너랑 뽀뽀 안 할 거야.”
한우주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봤어. 무슨 얘기 하는지도 다 들었어.”
“…….”
이건 정말… 그걸 몰래 따라와서 지켜본 것에 뭐라 해야 할지, 뽀뽀 금지라는 말에 바로 털어놓는 한우주를 귀여워해야 할지 종잡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