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머릿속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사실 다른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허지훈이 말한 게 사실인지, 한우주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대해 온 것인지, 오직 그것만이 궁금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한우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허지훈.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겠어.”
“…야, 조현우.”
“지금이라도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허지훈에게 다가가 그 손에 들린 가방을 가져왔다. 허지훈은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되레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몸에 힘을 빼고 있었다.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어.”
허지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떨구었다. 조현우의 몸에서 지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허지훈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만큼 많은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했다.
“네 말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니야. 그런데 난 그냥… 직접 알아보고 싶어. 그 뒤에 내가 어떻게 되든, 상처를 받든 말든 그건 내 책임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금의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허지훈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았다. 그나마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허지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미안.”
끝내 허지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대답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었다.
***
서연준의 아버지가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원작의 ‘서연준 루트 진입’ 이벤트에 등장하는 소갈빗집이었다. 뭐지? 이런 때에 갑자기 서연준 루트로 진입해 버리는 걸까? 하는 생각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아마도 그냥… 좋아하는 식당이 이곳이라 데려오신 것 같다. 고기는 질이 좋았고, 깔끔한 인테리어에, 직원들은 친절했다. 게다가 일행 중 한 명이 고기를 굽는 노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테이블 전담 직원분이 알아서 소갈비를 노릇노릇 구운 뒤 적당한 크기로 잘라 두셨으니까.
아무튼, 서연준 루트에 관한 생각을 접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우주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거기까진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나는 마음이 복잡해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솔직히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코로 들어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접받는 처지에서 예의 없이 깨작깨작 식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밥맛이 없었다. 내가 먹는 게 영 시원찮았는지 한우주는 제 고기를 나의 앞접시에 덜어 주기까지 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 야… 뭐 해. 하지 마.”
“왜?”
“알아서 먹겠다고….”
“알아서 안 먹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아, 제발.”
한우주는 맞은편에 앉은 서연준 부자는 눈에 뵈지도 않나 보다. 말 그대로 한우주는… 서연준을 신경도 안 썼다. 그저 나만 지켜봤고, 나만 챙겼다. 자꾸 제 몫까지 먹이려 드는 탓에 이거 설마 신종 괴롭힘인가? 먹고 체하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별수 없이 느릿느릿 고기를 씹어 삼키는 와중에도 마음은 좋지 않았다. 허지훈이 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우주 너 존나 싫어했어. 지금 저 새끼 하는 짓 너 엿 먹이려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우주는 온 정성을 쏟아 엉뚱한 사람 엿 먹이려다가 연애고 뭐고 전부 내팽개친 미연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아무렴 어때. 한우주가 내게, 그러니까 조현우에게 잘해 준 뒤 버려서 비참하게 만들 생각으로 이러는 거라면 정말 유감이다. 나는 조현우가 아니니까. 한우주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 버려져도 상처받을 리 없지 않은가?
‘…….’
오늘 진짜 입맛이 없네. 나는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먹었다간 정말로 체하겠다.
“현우 학생, 벌써 다 먹었어? 아, 혹시 고기 별로 안 좋아하나? 내가 그걸 물어볼 생각을 못 했네.”
서연준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입이 좀 짧아서….”
그에 서연준의 아버지는 탄식하며 내 연령대에 잘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평소라면 웃어넘기겠는데 지금은 컨디션이 진짜, 영 아니다. 그러다 돌연, 내내 한마디도 안 하던 한우주가 말했다.
“아저씨. 연서는 요즘 좀 어때요? 연재랑 연아도. 다들 잘 지내요?”
적당히 제 아버지의 말에 대꾸하고 있던 서연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네가 그걸 묻는다고? 왜…?’라고 시선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서연준의 아버지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가, 제 자식들의 안부를 늘어놓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나는 대화에 끼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쿡쿡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할 것이 없어 식당 구석에 자리한 식물의 잎이 몇 개인지 세어 보는데, 자꾸만 한우주의 목소리가 귀에 꽂혀 수를 까먹었다. 쓸데없는 짓은 관두고 이따가 한우주한테 뭐라고 이야기할지나 미리 생각해 두려 하니… 속이 너무 울렁거렸다.
후식 냉면에는 입도 못 댔다. 직접 우린 동치미 육수를 썼다던데, 관심도 안 갔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이런 적은 또 처음이다. 나 몸 어디가 심각하게 아픈 건가? 적어도 몸 컨디션이 안 좋은 건 분명했다. 설마 한우주 때문에 내내 이런 건 아닐 거 아니야.
……전부 관두고 집에나 가고 싶다.
***
“여기서 내려 주세요.”
“응? 집 앞까지 안 가도 돼?”
“좀 걸으려고요.”
차가 큰 길목에서 멈춰 섰다. 한우주는 차 문을 열어 내리고 내게 말했다.
“뭐 해? 안 나와?”
서연준과 그 아버지가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상의도 안 하고, 수습할 구석도 안 만들어 두고, 그저 저지르기만 하는 한우주를 조금 원망하며 급히 변명했다.
“아, 아, 그, 아까 같이 좀 걷기로 했거든요!”
“둘이 진짜 친하긴 한가 보네. 이거, 연준이 너보다 현우랑 더 친한 거 아니냐?”
연준의 아버지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간 잘만 웃으며 대꾸하던 연준의 표정과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글쎄요.”
아, 뭐야. 분위기 또 왜 이래. 얼른 나가기나 해야겠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서둘러 차 안을 빠져나왔다. 서연준은 차창을 열어 몸을 빼꼼 내밀곤 말했다.
“현우야. 몸 안 좋아 보이더라. 들어가서 푹 쉬어.”
“어? 응. 고마워.”
그리곤 창을 도로 닫아 버렸다. …잠깐, 서연준 쟤 왜 한우주한테는 인사 안 하지? 까먹었나? 나 정신없는 사이 둘이 뭐 다투기라도 했나? 생각하는 사이 차는 저 멀리 떠나 버렸다. 그 뒤엔 서연준에 대해 고민할 새가 없었다. 한우주가 멋대로 내 손을 잡은 것이다.
“…한우주 너 뭐 해?”
“정신 놓고 걷지 말라고.”
알았으니 좀 놓으라는 나의 말은 간단히 무시당했다. 한우주는 그대로 집을 향하는가 싶더니, 중간에 약국에 들렀다.
“한우주 너 어디 아파?”
“아니.”
“너 약국 차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사는데?”
어떤 인간이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를 약국에 와서 하냐고. 한우주가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그 수준으로 온갖 약을 다 사들이는 것이 아닌가?
“집에 상비약 있으면 좋잖아.”
“너 상비가 뭔지는 아는 거지? 누가 상비약을 이렇게 많이 사 놔?”
“몰라. 나 안전에 예민해.”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네 집이니 네 마음대로 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했다. 약국을 나서고, 우리는 조용히 걷기만 했다. 비닐봉지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만 가끔 들려왔다.
“집 가면 소화제나 먹어.”
그래서 뜬금없이 건넨 말이 처음엔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말했어?”
“약 좀 먹으라고. 너 너무 자주 아픈 거 아니야?”
“잠깐만….”
오늘 온종일 너무 골몰해 있었나. 그나마 있던 눈치를 어디다 놓고 와 버린 걸까.
“너 나 때문에 약 산 거야?”
한우주는 대답은 안 하고 마저 걷기나 했다. 집 나간 눈치가 드디어 돌아온 덕에 굳이 긍정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한우주.”
“…왜.”
한 손에는 약 봉투를, 다른 한 손으론 나의 손을 붙들고 있는 한우주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허지훈이 한 말이 아니었다면, 그저 내 느낌을 믿어도 괜찮다면….
…아니,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이 많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혹시 말이야, 너 나 싫어해?”
한우주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대놓고 인상을 구기더니, 시선이 마주치자 금방 표정을 풀어 버린다.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가,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로등의 빛이 미치지 않아 사방이 캄캄했다. 바로 앞에 있는 한우주의 얼굴도 나무 그늘에 가려져 간신히 보일락 말락 했다.
“좋아한다고 말한 게 바로 어제인데.”
“…응. 그렇지.”
“그런데 왜 그래?”
“그냥. 나는….”
스토킹에 관해 이야기하려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애써 꺼낸 말이 이거다. 한우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표정이 보이질 않아 애가 탔다.
“네가 쓸데없는 생각 안 하고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이어 내뱉은 목소리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럼 어떻게 해. 억지로 줄여?”
“…그게 싫다는 건 아닌데, 적어도 머리 굴리다가 병 나는 일은 없어야지.”
아침엔 멀쩡했으면서. 한우주가 말하며 자세를 고쳐 서자, 약 봉투가 부스럭거렸다. 컨디션이 좀 안 좋을 뿐이지 병이 난 건 아닌데. 게다가 원래 내 몸이었으면 고작 이 정도로 몸 상태가 오락가락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다. 속으로만 구시렁댔다.
“조현우.”
“왜….”
뭐야,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한우주가 느릿하게 말했다.
“나랑 있을 때 네 기분이 어떤지, 좋은지 싫은지….”
시간이 멈춘 듯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것만 생각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인기척이 멀어졌다.
“……집에나 가자.”
그렇게 말한 한우주는 빠른 걸음으로 밝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방금 뭐였지?
두 눈만 끔뻑거리다가 한우주가 몇 번 재촉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길을 걸었다. 다른 생각은 모두 지워지고,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이러다 진짜 미쳐 버리겠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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