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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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통. 통.
도마 위의 당근이 썰리는 소리가 유쾌하게 들렸다. 딱 먹기 좋은 두께로 균등하게 썰려 나간 당근들을 보자 묘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예쁜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이 좋다. 마음 같아선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었으나….
“한우주. 너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뒤통수가 따갑다. 한우주는 주방 카운터 테이블에 기대어 삐뚜름하게 서 있었다. 저거 분명 심통 난 거다. 한숨을 푹 내쉬고 식칼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신경 쓰여 죽겠다. 몸을 돌려 시선을 맞추려 들자, 한우주는 눈을 깔고 시무룩한 티를 내었다.
따뜻한 노랑 빛깔의 조명이 곱게 뻗은 속눈썹에 닿아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우주의 느긋한 목소리가 깊게 상심하여 기운 한 방울 남지 않은 것처럼 처연하게 들렸다.
“이러고 있어야지, 그럼. 팔 나을 때까지는 옆에서 지켜보기로 약속했잖아. 기억 안 나?”
“…기억하지. 그런데 나 이제 괜찮아. 누가 잡아서 비틀지만 않으면 쭉 괜찮을걸.”
한우주는 대답하지 않고 꿋꿋이 제 자리를 지켰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모르겠다. 하던 거나 마저 해야지. 당근을 전부 썬 뒤에는 감자였다. 마찬가지로 예쁜 모양으로 하나씩 썰고, 또 썰었다.
‘아, 미치겠네.’
한우주가 시무룩한 티 한번 냈다고 이렇게 집중력이 흐트러질 일인가?
…이제는 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사실은 요즘 한우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 나쁜 건 아닌데 그냥… 좀 어색하다. 이번 주 평일 내내, 한우주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를 서연준과 함께 보냈다. 나야 눈치껏 빠져서 오재영, 강준희, 허지훈이랑 어울렸고.
생각해 보면 잘된 일이다. 허지훈도 퇴원했는데 한우주와 계속 붙어 다녔다간 또 ‘조현우 너 역시 아직도 한우주 좋아하는 거잖아!’ 같은 말을 들을 것이 뻔했다.
통! 통! 감자는 나의 신경질에 희생되어 격하게 썰려 나갔다. 그래도 모양은 보기 좋았다. 양념을 만들고 다른 재료를 손질하는 내내 나는 굳이 지난 일을 돌이키며 기분을 끌어 내리길 자진했다.
한우주가 서연준과 함께한다? 이런 일로 내 마음이 상할 리가 없다. 몇 번인가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연락도 받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드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이러려고 나한테 출입 카드 준 건가, 싶기도 한데… 그런 거면 또 뭐 어때서?
아무튼 나는 정말 괜찮다.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진짜다. 오히려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한우주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한 날 저녁의 일이었다. 한우주가 보기에 내 표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한우주는 윤태현이 나를 불러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그럴듯한 말로 대꾸하였으나 한우주 이놈,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무엇이든 막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의 대결 같은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한우주는 결국,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조현우. 뭘 자꾸 그렇게 숨겨?
-내가?
-…자꾸 나한테 거짓말하잖아. 아니야?
억울했다. 대단한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말해서 한우주에게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그래서 입 다물고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캐묻지? 내가 못 미더워서 이러는 거야? 예민한 신경을 주체하지 못했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말이 날카롭게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돼? 진짜 별일 없었다고.
-별일이 아닌데 왜 거짓말을 해.
-말하기 싫어서. 싫어서 말 안 할 수도 있지. 내가 꼭 너한테 뭐든 털어놓아야 해?
솔직히 바로 후회했다. 한우주는 날 생각해서 그런 걸 텐데. 이런 식으로 말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무거운 말이 떨어졌다.
-……알았어.
아, 울적해졌다. 아무튼 그 뒤로 사과할 타이밍을 못 잡아서….
“얼마나 남았어?”
“어?! 어, 이제 끝나가.”
숨결이 귓가에 닿아 간지러웠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한우주는 내 뒤에 바짝 붙어 반찬 통에 음식을 담는 것을 구경하다가 말을 이어 갔다.
“지극정성이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워, 원래 이런 건 빈 반찬 통 돌려주는 거 아니야….”
“먹은 것도 없잖아.”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정성이랑은 별개야.”
“…이상하네.”
척척, 반찬 통에 음식을 가득 담아 뚜껑을 덮었다. 이건 오재영에게 ‘돌려줄’ 몫이다. 어디 계신 누군가가 반찬 통까지 버리는 바람에 통부터 새로 준비해야 했다. 남은 몫은… 따로 담아 두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젓가락으로 감자 조림 하나를 집어 한우주에게 내밀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잘만 받아먹는다.
“먹을 만해?”
“응. 맛있어. 이거 꼭 다른 사람 줘야 하나?”
안도와 동시에 힘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은 반찬을 정리하고 냉장고에 넣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디 안 가지?”
“음, 아마도.”
“응. 그러면 끼니 거르지 말고 있어.”
원작대로 서연준과의 연계 이벤트는 일요일에 발생할 예정인가 보다. 그러니까… 서연준 관련한 건 내일의 일. 오늘의 나는 집중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
마침내 찾아온 토요일, 오재영의 집에 가기로 한 날이다. 오재영은 컴퓨터를 빌려 달라는 나의 부탁을 기꺼이 승낙… 아니, 신나서 반기며 말했다.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집에 모여 다 같이 놀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강준희, 오재영, 허지훈, 그리고 나까지 넷이서 토요일을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한 반찬과, 조현우 노트북에서 분리해 낸 하드 디스크를 챙겨 집을 나섰다. 제발, 오늘은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기를. 하드 속에 뭐라도 쓸 만한 정보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엥, 이건 또 뭐야?”
오재영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반찬인데?”
“웬 반찬?”
“네가 저번에 나한테 준 거 있잖아. 그거 돌려주려고….”
“뭐… 아. 그거? 야, 그냥 곱게 받아서 먹으면 됐지 뭘… 어, 그런데 이거 우리 집 반찬 통 아닌데?”
오재영 이 예리한 친구 같으니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리 준비해 둔 선의의 거짓말을 건넨다.
“미안. 내가 실수로 깨트려서 새로 샀어.”
“아, 그러냐? 새로 살 필요까지는 없는데. 짜식.”
오재영은 히죽 웃으며 반찬 통을 식탁 위에 두었다. 긴장한 탓에 너무 일찍 출발해 버려서 오재영의 집에는 나와 재영뿐이었다. 가족들은 뭐… 어디 외출했다고 한 것 같다.
오재영은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에 살았다. 4인 가족이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의 보금자리는 깔끔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다. 베란다로 이어지는 거실 창을 통해 오전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와 포근했다. 마음껏 햇볕을 쬐며 노곤한 기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헐, 미친. 존나 맛있어. 야, 조현우 이거 뭐냐?”
오재영은 어느새 젓가락을 가져와선 반찬을 하나둘 집어 먹고 있었다.
“어? 감자 조림이랑 버섯 볶은 거랑… 계란말이랑….”
“그걸 몰라서 묻겠냐. 네가 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아.”
조현우 요리 잘 못하나?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 사왔지. 반찬 가게에서.”
“오, 반찬 가게 어디? 소개 좀 해 주라.”
“…….”
“조현우?”
“망했어. 문 닫았어. 어쨌든 이제 없어.”
“뭐?!”
오재영은 거실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를 내었다가, 아쉬운 티를 내며 꿍얼거렸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저거 밥 없이 먹기에는 좀… 짜지 않은가…? 아니, 됐다. 나는 혹여 오재영이 반찬의 출처에 대해 더 물을까 봐 황급히 본론을 꺼냈다.
“오재영. 나 컴퓨터 좀 써도 돼? 볼일 얼른 보고 마음 편하게 노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맞다. 어엉, 네 맘대로 해라.”
가슴이 뛰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이 망할 하드를 확인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온 긴장과 고양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재영의 컴퓨터를 마주했을 때엔….
‘와, 이 미친.’
군침이 돌았다. 부품의 선들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뚜껑을 열어 안을 살핀다. 정말로… 환상적인 조립 컴퓨터다. 부품 하나하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 정도면 최고 사양 게임을 24시간 돌려도 될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오재영의 컴퓨터와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조현우 뭐 하냐? 멍 때리냐?”
“응?! 아, 아니. 그냥….”
“뭐, 천천히 해. 나머지 놈들 왔어.”
오재영이 방문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강준희는 척척, 오재영의 방에 들어와 너무나 당연하게 침대에 풀썩 누워 버렸다. 오재영과 강준희가 투덕거리는 사이 허지훈이 내 쪽으로 다가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조현우의 하드 디스크를 사랑스러운 최고사양 데스크톱에 연결하며 말을 건넸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허지훈은 이번 주 내내 알바 면접을 다니느라 바빴다. 다행히도 주 5일 평일 알바로 한 군데에 합격해, 바로 어제 첫 출근을 마친 참이다.
“무리는 무슨. 전에 그 지랄 맞은 고깃집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던데.”
“피곤해 보여서.”
“별로….”
하품을 쩌억 해 대는 바람에 말에 설득력이 없다.
“너도 강준희 옆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침대와 한 몸이 된 강준희를 흘긋 보며 농담을 던졌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하드 디스크를 무사히 장착하고, 컴퓨터를 켰다. 다행히도 하드의 상태는 아주 멀쩡했다. 정상적으로 인식되는 모습을 보며 졸인 마음을 쓸어내렸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바삐 움직인다. 하드 속 폴더를 하나씩 전부 누르며 확인했다. 알바 이력서랑… 다 못 끝낸 학교 숙제랑… 평범한 사진 몇 장, 조현우 명의로 가입한 사이트들 아이디랑 비밀번호…. 별 특별한 게 없다.
여기서 써먹을 만한 거라곤 포털 사이트 아이디랑 비밀번호, 주민 등록 번호, 음…. 조현우 생일은 7월 13일이다. 적어도 자기 생일 모르는 얼빠진 인간처럼 보일 일은 없겠다. 맥 빠지네.
‘하긴, 뭐가 더 있겠어. 그냥 알바하고 학교 다니고, 한우주 좀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일 뿐인데.’
이어진 행동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 좀 하다 보면 숨겨진 데이터를 건드릴 일이 심심찮게 생기곤 하니, 그냥… 별 기대 없이 손을 움직였다. 습관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숨김 폴더가 표시되어 보이도록 설정한 뒤에 드라이브를 다시 한번 쭉 훑었다.
그런데 의외로 뭐가 있었다. 라는 이름의 숨김 폴더가. 뭐야, 이거. 수상한데? 안에 19금 유해물 어쩌고 하는 것들 들어 있는 거 아니야? 달칵, 마우스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바로 뒤에서 허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재영, 강준희.”
“왜?”
오재영이 대답했다. 강준희는 엎어진 채로 팔만 까딱거렸다. 허지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좀 나가라.”
“뭐?”
“잠깐 나가라고.”
“뭐래. 여기 내 방인데?”
…뭐야? 허지훈 갑자기 왜 저래? 허지훈이 짜증스레 제 뒷머리를 쓸었다.
“슬슬 점심시간이잖아. 거, 뭐냐. 치킨이든 피자든 뭐든 좋으니까 사 와 봐.”
“뭔…, 배달시키면 되잖아.”
“배달비 아까워. 오다가 식을 수도 있고.”
“아니, 이 새끼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존나 뜬금없네?”
내가 봐도 상황이 좀 이상하다. 굳이 나가서 사 올 거면 다 같이 가든가,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를 하든가…? 굳이 오재영이랑 강준희를 내보낼 필요가 있나? 따끈한 음식이 먹고 싶은 거면… 그걸 원하는 쪽이 사 오는 게 맞지.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재영은 황당해 죽겠다는 표정이고, 강준희는 엎드려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허지훈을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다 뭐냐고…. 분위기 존나 싸해졌잖아….
오재영이랑 강준희도 참, 가만 보면 여기저기 치이는 게 안쓰럽다. 나는 허지훈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허지훈 너 왜 그래? 그냥 배달시켜 먹어. 아니면 이따가 너랑 내가 나가서 사 오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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