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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68화 (68/150)

68화

허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벽에서 몸을 떼어 자리에 바로 설 뿐이었다. 신중히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 화가 나 이름조차 부르기 힘든 걸까.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은 감정을 읽기 어렵다. 윤태현과의 만남 탓에 내가 너무 지친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허지훈을 지나쳐 자취방이든 어디든 틀어박히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허지훈이 무엇을 위해 온 것인지 얼핏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뭐야….”

없는 힘을 쥐어짜 내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두어 걸음 다가서자 허지훈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왔으면 연락을 하지.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여기 얼마나 서 있었어?”

“……별로.”

답지 않게 어물쩍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짐작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마도 허지훈은 조현우와 자신의 사이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 터이다.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 제 친구가 내뱉은 모진 말들이 진심이었는지.

사람의 눈치라는 게 어쩔 때 보면 참 간사하다. 나는 이 관계의 우위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깨닫고 말았다. 칼자루는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허지훈 쪽에서 조현우와의 관계를 끊어 낼 일은 없을 것이다. …눈도 제대로 못 맞추는 허지훈이라니. 안타까움과 동시에 알량한 생각이 치밀었다.

차라리 화를 내러 온 거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허지훈은 뭐가 저렇게 애틋해서 조현우에게 절절매는 걸까? 친구라는 놈이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뀌어선 야멸차게 구는데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허지훈은 나의 목적과 큰 관련이 없다. 애초에 나와 쌓은 관계가 아니고, 나를 향한 감정도 아니니 굳이 응할 필요는 없다.’

…이런 생각으로 상황을 회피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인가 보다.

이 몸에서 지내는 이상 허지훈과의 관계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하고 억울함을 토로해 봤자 바뀌는 건 없다. 알바 첫날에 인수인계 못 받은 채로 일하다가 실수하고 된통 혼났을 때가 떠올랐다. 경우가 다르긴 한데 심정은 비슷하다. 뭘 어쩌겠냐. 내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체념에 가까운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조금 걸을래?”

괜히 자취방에 들어갔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대화하며 걷다 보면 잠기운이 조금은 가시겠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기자, 나의 뒤로 무거운 발소리가 뒤따랐다.

***

적막이 흐르는 주택가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대화는 무슨, 서로 한마디도 안 하는 통에 나는 점점 더 졸려 왔다. 그냥 걷기만 하다가 헤어질 생각인가…?

윤태현에 이어 허지훈. 붙여서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다른 유형의 사람이지만, 대하기 피곤한 것만은 같았다. 지친 정신이 한계에 내몰릴 즈음이었다. 작은 공원 하나가 보였다. 몇 개 없는 기구조차 낡고 노후되어 찾는 사람은 있을까 싶었다. 공기마저 음산한 게 해 지면 귀신들이 정모할 것 같은 곳이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따져 장소를 고를 여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힘들거든. 그냥 힘든 것도 아니야. 존나 미치게 힘들어….

“…허지훈. 좀 앉았다 가자.”

근처에 있는 그네에 대충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허지훈이 옆에 따라 앉는다. 한눈에 보기에도 허지훈에게는 작은 크기라 모양새가 제법 우스웠다. 웃을 분위기가 못 되어 가만히 입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야…. 조현우.”

“아씨, 깜짝이야.”

“…….”

평생 말 한마디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다.

“미안.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왜 불렀어?”

“…….”

“…나 안 불렀어? 내가 환청 들은 건가?”

“환청 아니고 부른 거 맞거든.”

허지훈이 허리를 숙여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댄다. 삐걱, 허지훈의 움직임에 따라 그넷줄이 마찰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허지훈은 나를 흘끗거리며 입만 벙긋거리다가 이내 범행을 실토하는 죄인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야. 나는 다른 건 다 됐고, 한우주 그 새….”

낮은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든다.

“…한우주가 널 가지고 노는 건가 싶었어.”

“뭐?”

“거기에 네가 호구같… 아니, 홀랑 넘어가서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건 줄 알고 좀 돌아 있었다고.”

“잠깐만, 야….”

“알아. 나 잘한 거 없어. 열 받는다고 주먹 휘두르면 양아치고, 깡패고 범죄자 새끼잖아. 내가…….”

“허, 허지훈?”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미친 새끼….”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방금 허지훈이 한 말 속에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허지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이마를 짚은 커다란 손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 표정을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혼란해 죽겠다. 덕분에 잠은 달아났다. 나는 허지훈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어깨 위에 손을 살포시 올리며 말했다.

“너 괜찮아?”

“…….”

“허지훈. 고개 좀 들어 봐. 응?”

자늑자늑 어깨를 두드리며 어르듯 말하자 허지훈이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붉었다. 가라앉은 눈동자의 깊은 곳에서 음울한 빛깔이 돌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그간 내가 허지훈을 등한시한 것에 대한 결과인가? 상처받았을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몰랐다는 말을 면죄부 삼기에는 마주한 것이 너무나 무거웠다.

미안.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내뱉으려던 때였다. 허지훈이 제 어깨 위에 얹힌 내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미안하다. 못 볼 꼴 보여서.”

“…네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해.”

허지훈은 멋쩍은 듯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네가 귀에 거슬리도록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푸념이나 하려고 찾아온 거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방금 건 신경 쓰지 마.”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신경을 어떻게 안 쓰냐…? 허지훈이 재빨리 말을 이어 간다. 내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하려던 말이… 아, 미친. 뭐였더라. 기다려 봐.”

“허지훈. 잠깐 내 말 좀….”

“아, 야. 조용히 해 봐. 기억났으니까. 어, 음.”

와, 허지훈 연기 더럽게 못한다.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움직임이 뭔, 목각 인형 같다. 멀쩡해 보이려는 노력이 되레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제는 애잔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색한 몸짓에 비해 목소리는 제법 진중했다.

“그 개자식 아니, 한우주랑 네가 어떻게든 합의…하, 씹…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이가 없네?”

허지훈의 진중함은 딱 3초 가고 말았다.

“…어쨌든 좋아서 만나는 거면 뭐, 망할. 더 이상 뭐라고 안 하겠다고. 당분간 기분은 더럽겠지만.”

좋아서… 뭐? 목각 인형 허지훈이 내 머릿속에 대형 폭탄을 투하했다. 모든 생각이 한 줌 재가 되어 버렸다.

“아니 근데 아오…. 됐다. 나 병원에 처박혀 있는 동안 뭐가 있었나 보지. 굳이 설명하지는 마라. 들을 자신 없으니까. 말하고 싶거든 적어도 10년 뒤에 말해.”

어, 음? 어… 뭐? 불타 버린 생각의 잿더미를 파헤쳐 가까스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해 냈다.

“……뭐, 뭐라고? 그러니까, 으음… 나랑 한우주가 만난다고?”

“어.”

“같은 학교, 같은 반이니까 자주 만나는 건 당연하지.”

“내가 지금 그딴 걸 말하는 것 같냐?”

아니. 그건 아닌데 납득이 안 간단 말이다. 저번부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나는 용기 내어 다시 물었다.

“나랑 한우주가 좋은 친구로 잘 지내는 걸 말하는… 건가?”

“새끼가 일부러 이러나. 사귀는 거 말하는 거잖아. 둘이 서로 존나 좋아서 붙어 먹는 거!”

“…….”

“아오…. 어쨌든 난 이제 너희 연애사에서 발 빼겠다고. 별다른 문제없는 거면.”

“야…. 허지훈아.”

“왜.”

“나 한우주랑 안 사…사귀….”

나… 아니. 조현우랑 한우주가 사귄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문장이냐.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저항감이 드는데. 허지훈의 표현을 빌려 순화해 말했다.

“한우주랑 안 만나. 그런 사이 아니야. 우리 그냥 친구야.”

“뭐?”

허지훈은 가만히 두 눈을 끔뻑였다. 얼빠진 얼굴이 점차 분노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야. 그럼 그 새끼가 너 가지고 노는 거 맞잖아.”

“아니야. 아니래도. 그… 허지훈. 내, 내가 한우주 좋아한다고 너한테 말을… 했었지?”

긴가민가한 투로 물었다. 이것만은 확실히 알아 둬야겠다. 조현우 이 놈 정말로 한우주를 짝사랑한 거야? 허지훈이 한쪽 눈썹을 까딱인다.

“어.”

“하… 망할….”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정말로, 진짜로, 질 나쁜 농담이나 장난도 아니고…, 조현우가 단순히 오지랖 넓어서 남의 연애 도와주는 친구이자 힌트 자판기가 아니었단 말이야? 한우주를 좋아하면서 옆에서 공략캐 정보나 읊는 조력자 캐릭터라고? 뭐 이딴 설정이 다 있어?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네에서 일어났다. 여러 의문이 솟구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 조현우는 한우주를 짝사랑했고 그 사실을 허지훈에게 알렸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허지훈이 한우주와 조현우의 사이를 오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다른 공략캐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아주아주 큰일 날 오해라는 게 문제다.

조현우 이건 안 될 놈이라고. 한우주가 연애할 사람은 따로 있단 말이야….

“나 마음 접었어.”

“허?”

“마음 고이 접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거라고….”

“그 난리를 피워 놓고 그새 접었다고??”

난리? 조현우 이 자식은 또 무슨 난리를 피운 거야…. 허지훈 붙잡고 대성통곡이라도 했나? 알수록 가관이네, 이거.

그나저나 짝사랑이라니. 참 얄궂은 설정이다. 이 게임 엔딩을 수십 번쯤 보는 동안 한우주가 조현우에게 연애적인 관심, 혹은 그 비슷한 걸 가지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어찌 됐든 지금 당장 허지훈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정정할 필요가 있다. 조현우의 속사정이야 안타깝게 되었지만…. 한동안 꼼짝없이 이 몸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은 ‘나’인 데다가 이런 오해는 난감하기만 하다. 한숨을 푹 내쉰 뒤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접어지더라고. 어차피 잘 안될 게 뻔하니까. 쓸데없는 소모전 길게 벌여 봤자 나만 피곤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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