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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64화 (64/150)

64화

정적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곧, 손목을 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지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에 숨결이 닿아 간지럽다. 나는 용기 내어 한쪽 눈을 뜨고 앞을… 아니, 아래를 확인했다. 한우주가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하고는 웃고 있었다.

“…한우주 너 뭐야?”

“응? 왜?”

“왜는 무슨… 저리 안 비켜?!”

한우주는 웃으며 상체를 일으켜 기꺼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못 일어나겠다. 일어날 힘이 없다. 뻗은 채로 천장만 올려다보자 불쑥, 시야에 한우주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만히 당하고 있지 말라는 뜻 아니었어?”

“…아니, 그게 맞긴 한데. 그… 하….”

할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된다. 게다가 한우주가 웃는 걸 보니… 마음이 허한 것이 현타가 진하게 온 모양이다. 한우주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뭐가. 무슨 말?”

“난 당하고만 산 적 없거든. 오히려 받은 만큼은 돌려주는 편인데? 방금처럼.”

“아니, 그. 바, 방금은 내가 바란 것 같아서 그런 거라며?!”

“맞아.”

“막, 그 전에는 밀쳐도 가만히 있고…. 패고 싶으면 패라고 하고… 그랬잖아.”

“아.”

한우주는 미소를 거두고 사뭇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거야… 너라서 그런 거고.”

“…….”

지금 날 놀리는 건가? 한우주 쟤는 사람 놀리는 걸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 걸까? 이거 열받네? 주섬주섬, 힘 빠진 몸을 겨우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개소리야. 허지훈한테도 그냥 맞아 놓고는.”

“음….”

“…거봐. 할 말 없지?”

“아니. 그냥 맞은 거 아니야.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는데….”

한우주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헤매다 다시 내게로 안착한다.

“말하면 네가 화낼 줄 알았지. 그런데 말 안 해도 화내더라.”

“…그래서 이유가 뭔데?”

“또 화낼 거잖아.”

“화 안 낼게.”

나의 말이 영 못 미더운 것인지, 한우주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래도 이번엔 거절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꼭 오늘 아침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허지훈이랑 부딪혔을걸. 어차피 한 번은 맞아야 해결될 상황이었어. 또….”

…맞아야 해결될 상황? 그런 게 어딨어? 도대체 이전에 허지훈이랑 뭘 했길래 이래?

“허지훈이 계속 시비 걸면 괜히 너만 피곤할 것 같아서, 얼른 해치우는 게 낫겠다 싶었지.”

“네가 맞아 놓고 해치우긴 뭘 해치워?”

“그러니까, 맞는 게 핵심이거든. …곧 보면 알 거야. 당분간은 얌전할 테니 허지훈 쪽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도대체 그게 무슨 말….”

한우주의 말을 하나씩 정리해 본다. 여전히 이해가 안 가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그럼 뭐야, 나 때문에 일부러 맞은 거라고??”

“…….”

한우주 저것이 딴청을 피운다. 어이가 없다. 설마 진짜냐? 그게 말이 돼?

“도대체 왜??”

“…뭐, 어쨌든.”

어쨌든? 어쨌든??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데도 한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억지로 뭘 참은 적도, 당하고만 산 적도 없어.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 없고. 적어도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아.”

한우주가 말을 할수록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배로 늘어나기만 했다.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찬 것만 같다. 내가 지금껏 본 게 얼마나 많은데. 저거 지금 나한테 뻥치는 거 아니야? 한우주는 항상 그랬다. 무슨 위험이 다가오든 그저 받아들이기만….

‘…잠깐만.’

분명 한우주는 미련할 정도로 자신을 보살피지 않았다. 공략캐 중 누구와 이어지든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미친 짓에 놀아나는 한우주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탓일까? 중요한 조건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이 망할 게임을 플레이하며 지켜본 것은, 공략캐를 대하는 한우주였다. 특정 공략캐의 루트를 정상적으로 밟고, 그 공략캐와 관계를 쌓아 가는 한우주 말이다. 그렇다면 방금 한우주가 한 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적어도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는다.’는 것….

뭐야? 그럼 자기가 정을 붙인 상대는 자신에게 뭔 짓을 해도 괜찮다. 감내할 수 있다. 이 말인가? 미친. 정에 휩쓸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러고 보면 한우주는 나, …그러니까 조현우한테도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방을 내어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

어쩌면 좋아. 진짜 정 때문인가 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범죄를 참아 주면 어떡하냐?! 안 그래도 바닥났던 정신이 급격히 피곤해졌다. 나는 한참 동안 눈가를 꾹꾹 누르며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정리하고, 또 정리해 보지만 온갖 정보와 추측들이 어지럽게 얽히기만 했다. 좀처럼 생각이 정돈되지 않는다.

“한우주.”

“응.”

한우주는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저 잘난 얼굴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분명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사고가 온통 흐릿했다. 그 가운데 우뚝 선 가로등이 희미한 빛을 뿜고 있었다. 정적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나는 불빛 아래 어렴풋이 떠오른 말을 느릿느릿 꺼내기 시작했다.

“너…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마?”

“그, 뭐냐. 당해 주지 말라고!”

“너한테도?”

“…야, 잘 들어.”

이 답답한 녀석. 나는 마른세수를 몇 번 하다가 한우주를 향해 몸을 틀었다. 마주 본 상태로 단호하게 말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애초에 이런 건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거니까. 설령 상대방이… 너랑 그, 엄청나게 특별한 사이일지라도….”

“특별한 사이…. 이를테면 어떤 거?”

“…….”

그냥 대충 알아들을 순 없는 거냐? 내가 꼭 구체적으로 말해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넘기고 싶었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한우주를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잘 설명해서 제대로 알아먹게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다.

그래, 한우주는 엄청나게 잘생겼으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감이 따를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중에는 반드시 미친놈이 껴 있기 마련이다. 그 미친놈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여러모로 녹록지 않다 보니…. 한우주가 미친 새끼들을 잘 거를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러니까 민망해하지 말자. 이건… 그거다. 일종의… 교육 같은 거라고…. 목을 몇 번 가다듬는다.

“애….”

“애?”

“애인이라든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우주 얼굴을 못 보겠다. 민망해하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했다. 그도 그럴 게… 한우주 입장에선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을 거 아니야. 갑자기 애인 이야기가 왜 나오냐고. 무슨 밭에 배추 씨앗 심으면서 김장 걱정하고 앉았냐고.

그치만 난 김장 망하는 미래를 봤단 말이야. 아니, 김장까지 갈 것도 없다. 이대로라면 배추 농사부터 제대로 조질 거란 말이다. 그런데 나 왜 지금 이딴 생각을 하고 있지? 김치 먹고 싶은가? 모르겠다. 얼른 마저 말하고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꼭 애인 아니어도 네가 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만약 그 사람이 못된 짓을 하면….”

한우주를 흘끔 살핀다. 아악, 엄청 집중해서 듣고 있잖아!

“그, 막. 어? 절대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 언어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인 것이든… 뭐든 간에 폭력적인 행동은 받아 주지 마. 그런 데 익숙해지면 답 없단 말이야.”

“음….”

“누구든 널 함부로 대하면 바로 손절 쳐야 돼!”

“으음….”

“알아들었어?!”

한우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도통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대답 듣지 말고 뛰쳐나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에 한우주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너는 안 그럴 거잖아.”

“엉? 나?”

“응.”

“내 얘기가 왜 나와?”

“글쎄. 내 앞에 있어서?”

한우주 이거 진짜 이상한 놈이네.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 얹었다.

“됐어. 하여튼… 그런 거 쉽게 확신하지도 마.”

“왜? 날 함부로 대할 계획이었어?”

“아니?!”

깜짝 놀라 소리치자 한우주가 고개를 홱 돌린다.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것이… 뭐야, 쟤 설마 지금 웃는 거야?

“야!!”

이젠 아주 어깨까지 들썩인다. 이게 진짜. 지금 난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데 웃어?? 분하고 창피하고 짜증 나서 버틸 수가 없었다. 급기야 한우주의 등과 어깨를 마구 때렸다. 그런데도 계속 웃는다. 하나도 안 아픈가 보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만 웃어!”

“…웃기는데 어떻게 해. 그럼.”

“나 농담한 거 아니야! 사람 겉보기로는 모르는 거라고. 멀쩡한 척하면서 속은 썩어 빠진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음, 그래서 네 속은 어떤데?”

“어? 나? 나, 나야 뭐… 완전무결하진 않지만 착하게 살려고 노력은 하….”

…썅.

저게 또 고개를 돌린다. 소리 없이 쪼개고 지랄이다. 진짜 못 봐주겠다. 한우주 개 빡쳐.

“몰라. 네 멋대로 살아, 나쁜 놈아. 난 갈 거야.”

매번 이렇게 놀림받는 것도 지친다. 내가 진지한 게 웃긴가? 마음이 단단히 상한 채 일어나 침대를 벗어나려는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 당장 이거 놓으라고 쌍욕을 할 생각이었다. 원망스러운 눈길로 한우주를 흘긴다. 그리고 나는… 욕이고 뭐고 화를 내는 것부터 실패하고 말았다.

한우주는 얼마나 웃어 댄 건지, 눈가가 촉촉한 게 왼쪽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꾸밈없이 밝은 표정과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이제 안 웃을게.”

“…….”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여전히 웃는 낯인데.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게 진짜인가 보다. 아니, 그냥 한우주라서 이러는 건가? 잠시 넋을 놓고 얼굴이나 구경했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정신을 다잡았다.

‘참나…. 한우주가 2퍼센트쯤만 덜 잘생겼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화를 되찾으려 해 봤지만 무리였다. 망할…. 일단 저 얼굴을 보면 안 된다. 뭐든 잘생기거나 예쁜 거나 귀여운 걸 보면 기분이 금방 풀린다는 말이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우주가 나를 따라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네 말 들을 테니까 화 풀어.”

화는 진작 풀렸지만 화난 척하는 게 낫겠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한우주 저것이 끈질기게 따라와 시선을 맞추려 든다. 그리고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오늘처럼 다치는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네 마음대로 되냐?”

“노력은 하겠다는 거지.”

대놓고 미심쩍단 티를 내었지만 한우주의 표정에는 아주 약간의 일그러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더 따지고 물을 수 있었지만 그랬다간 밤을 샐 것 같아 관두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한우주가 손목을 놓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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