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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54화 (54/150)

54화

혹 허지훈에게서 온 연락일까 걱정했으나 아니었다. 한우주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은 와 있었고, 지금도 전화가 오고 있었다. 잠깐, 아까 내가 10시쯤엔 들어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또 이야기한 시간보다 늦어 버린 건데…. 피곤하면 얼른 자라고 해야겠다. 나야 이제 조현우 집에서 지내도 되니까.

“여보세요? 한우주?”

[뭐야.]

“어…, 늦어서 미안. 자꾸 일정이 늘어지네.”

[아니 그거 말고. 목소리가 왜 그래?]

“응?”

…목소리가 어떻길래 그러지? 아, 아. 소리를 길게 내 본다. 살짝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 운 것 때문에 그런가 보다. 민망함에 대충 변명한다.

“감기라도 걸리려고 이러나. 목이 좀 따끔하네.”

[…그럼 얼른 돌아와. 언제까지 밖에 있을 거야?]

“아, 난 괜찮아. 한우주 너 피곤하다며? 걱정 말고 얼른 자.”

[집엔 어떻게 들어오려고?]

“나 지금 자취방이야. 방금 들어왔어.”

[자취방? 네 자취방?]

“응. 도어 록 비밀번호. 어쩌다 보니 찾았거든….”

한 달을 잊고 산 비밀번호를 하루아침에 찾은 게 수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솔직히 말했다.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 낼 여력이 없기도 했고, 웬만하면 한우주를 상대로 거짓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네 집에서 자게?]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한우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멋쩍어 괜히 노트북을 다시 열곤 전원 버튼이나 열심히 누르며 대답했다.

“으음… 응. 그럴 거 같은데. 너 졸리다며. 나 때문에 굳이 참지 말고.”

[…….]

“한우주? 여보세요?”

대답이 없다. 얘 설마 말하다가 잠들었나? 고물 노트북이 8번쯤 꺼졌을 때였다.

[조현우.]

“응?”

오늘따라 뜸을 자주 들이네. 생각하며 이번에야말로 이 얄미운 고물 덩어리를 놓아주었다.

[나 잠 안 와.]

“아까는 졸리다며?”

[지금도 졸려.]

“그럼 자.”

주섬주섬, 투박한 검은 가방에 노트북을 도로 넣어 둔다.

[조현우.]

“또 왜?”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써 본다. 원래 조현우가 쓰던 핸드폰은 사라졌고, 노트북은 고장 났다. 학교에도, 자취방에도 정보가 될 만한 건 더 없어 보인다. …나는 어떻게 조현우에 대해 알아봐야 하는 걸까. 포기해야 하나? 한우주랑 공략캐들 의심만 안 사면 되잖아. 억울하고 답답한 것만 참으면…. 나만 잘하면 될 일인지도 모른다.

체념에 가까운 생각에 온몸에 기운이 빠진다. 피곤함에 두통이 몰려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닥도 없이 가라앉는 나를 끌어 올린 것은 다름 아닌 한우주였다. 이어진 한우주의 말에 뺨을 맞은 것만 같았다. 아니, 뭐야. 나 진짜 맞은 건가? 미연시 주인공은 말로 뺨을 때릴 수 있는 걸까? 양쪽 볼이 뜨겁다.

[너 없으니까 잠이 안 와.]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슬슬 어깨가 아파 온다. 고물 노트북은 바위라도 되는 건지 마냥 무겁기만 했다. 한우주와 통화를 마치고 나는 자취방에서 노트북만을 챙겨 들고 나왔다.

내가 왜 이 밤길을 헤치고 한우주의 집에 가고 있느냐? 글쎄다. 정신 차리고 보니 밖에 나와 있던데. 그저 머리를 비우고 걷고 또 걷다가 거의 다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야 오늘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어떤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물러나길 반복한다. 그때마다 나는 바닷가에 우뚝 선 무른 바위처럼 조금씩, 어딘가 깎여 가는 것만 같았다.

‘지친 건가…?’

팔에 금이 갔을 때에도 꽤 서러웠지만, 그때는 이 좆같은 게임 얼른 엔딩 보고 나가고 말겠다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새로이 떠오른 걱정에 결의를 다질 틈 따위 없었다. ‘내가 과연 엔딩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진부하고 무의미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엔딩을 볼 때까지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허지훈이 퇴원했으니 앞으로는 학교에서 날마다 마주칠 테고, 나는 더 자주 조현우의 과거와 얽매이게 될 것이다. 나를 뒤흔드는 것은 모두 가상의 것이다. 조현우도, 허지훈도 게임 속의 인물일 뿐이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수십, 수백 번은 되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장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드러내는 저들을 단순히 가상의 것으로 치부해도 되는지에 대해 고뇌했다.

문제의 답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했다. 이렇듯 멋대로 나의 속을 침범하는 난제가 떠오를 때마다 슬프지 않을 자신이 없다. 언젠가 가슴에 내려앉은 슬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때에, 미치지 않을 자신은 더더욱 없다.

형체 없이 일렁이던 불안이 구체성을 갖추고 나서야 나는 내가 밤길을 나선 이유를 깨달았다. 혼자 있기 싫었던 것이다. 나 역시 오늘은 혼자뿐인 집에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낼 동안 나의 발은 참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이제 곧 오피스텔에 도착할 것이다. 바닥을 향했던 고개를 들고 앞을 바로 보자, 꽤 가까운 거리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의아함에 걸음을 멈추니 저쪽에서 내게 다가온다.

“한우주? 왜 나와 있어?”

언제부터 밖에 있었던 거지? 졸리다는 녀석이 뭐 하러 나와서 길바닥에 멀뚱히 서 있냐…?

“좀 춥긴 하네. 감기 걸릴 것 같다며. 들어가자.”

한우주는 나의 물음과는 전혀 관련 없는 말을 태연히 건넸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앞장서 집으로 향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흘끔거린다.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모양새다.

평소와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우주는 내가 이야기했던 시간보다 한참을 늦은 것, 한 달은 못 들어간 자취방에 갑작스레 찾아간 것, 허지훈의 일, 그 무엇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일상의 나열, 그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날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우주의 태도에 맥이 빠진 건지, 안심한 건지. 온종일 시끄러웠던 마음이 마침내 고요를 찾았다.

***

“고기 냄새 나.”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한우주가 불만스레 말했다.

“아…, 미안. 금방 씻을게.”

“고기 먹었어?”

“…응.”

누구랑 먹었는지도 물으려나? 그러면 허지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한우주도 오늘 내가 허지훈이랑 있었던 거 뻔히 아는데. 거실로 향하는 한우주의 뒷모습을 보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역시, 한우주가 다시 묻는다.

“무슨 고기?”

“허…, 엥. 뭐?”

“무슨 고기 먹었냐고.”

“…돼지갈비 먹었는데?”

“맛있었어?”

“맛…있었지.”

“맛있었던 거 맞아?”

떨떠름하게 대꾸해서 그런가? 진실성이 떨어져 보였나 보다.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한우주 너는 저녁 먹었어?”

“아.”

“아?”

‘저녁 먹었어?’라는 질문에 ‘아.’ 하고 대답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 먹었어?!”

“음….”

한우주가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나는 그 앞에 선 채로 마저 추궁했다.

“왜 안 먹었는데?”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누가 밥을 어쩌다 보니 굶어?”

“시끄러워…. 네 방 가서 씻기나 해.”

한우주는 몸을 반쯤 뉘이며 불만스레 말했다. 몇 마디 더 하려 들 때마다 고기 냄새가 어쩌고, 타박을 줘서 먼저 씻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한우주가 졸음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고 밥이고…, 다 너 때문이잖아.”

의아함에 걸음을 멈추고 한우주의 말뜻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자취방에서 한우주와 통화하며 들은 말을 떠올리곤 민망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둘러 방에 들어가 버린다.

씻으며 찬물을 머리에 들이붓는데, 샤워가 아니라 수련을 하는 기분이었다. 누가 한우주한테서 낯간지러운 말 좀 뺏어 갔으면 좋겠다. 매번 뻔뻔하게 굴고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것도 이 정도면 범죄 아니냐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시커먼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조현우 자취방에서 가져온 노트북 가방이다. 방 인테리어를 다 망쳐 놓는 게 흉물이 따로 없네….

‘내가 어쩌자고 저걸 여기까지 들고 왔지.’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망가진 건지 모르니까…. 만약 하드가 무사하다면 데이터 정도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생각에 가져왔을 것이다. 또 헛된 희망을 품고 실망하게 될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발견한 가능성을 덮고 지나갈 성미는 못 되었다.

‘진짜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하드만 확인해 보고 이번에도 안 되면 그냥…, 조현우가 뭐 하던 놈인지에 대해선 신경 꺼 버리자.’

하여간에 저놈의 고물덩이를 보니 기분이 다시 나빠져 곧장 침대에 드러누우려다가, 한우주가 떠올랐다. 아직도 소파에서 자고 있지는 않겠지? 아니나 다를까 거실 불이 훤히 켜져 있다. 거실 쪽 욕실에서 씻고 나왔다가 그대로 다시 엎어졌나 보다. 머리도 안 말리고 자고 있다.

“야, 한우주. 너 여기서 이러고 자면 감기 걸려.”

살살 흔들어 깨워도 도통 반응이 없다. 피곤하긴 했나 봐. 그러게 진작 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너 없으니까 잠이 안 와.

야, 이 미친. 왜 지금 이딴 게 생각나는 건데.

다리에 힘이 다 빠져 반대편 소파에 털썩 앉아 버렸다. 저걸 어떻게 깨우지…. 고민하며 곤히 잠든 한우주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또 다른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허지훈이 내게 한 말이었다.

-조현우. 너 아직도 한우주 좋아하냐?

-여태 정신 못 차리고 그 정신 나간 새끼가 좋다고 쫓아다녀?

조현우가 한우주를 좋아한다니…. 허지훈의 망상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냥 자기랑 사이 안 좋은 놈이랑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 막말한 거였으면.

‘…걔가 그럴 것 같지는 않던데.’

또다시 몰려오는 막막함에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허지훈을 안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살면서 걔처럼 감정에 솔직하고 투명한 놈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허지훈이 홧김에 막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인가?

허지훈이 오해하는 이유를 가늠해 본다. 이전에 조현우와 한우주 사이에서 오해할 만한 일이 있었다거나…. 혹은 어쩌면 조현우가 정말로….

“…웬 한숨이야?”

갑자기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퍼뜩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서 한우주가 내 쪽을 보며 졸린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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