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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47화 (47/150)

47화

모르는 척, 모르는 척. 나는 한우주가 어느 건물 몇 호수에 사는지도 모르고, 이런 고급 건물은 완전히 처음 와 보는 거다. 연기에는 자신이 없어 분명 삐걱거렸을 텐데 서연준은 아무런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우주의 집에 도착했을 즈음엔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 버렸다. 이제 시작인데 어쩌면 좋냐.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주뼛거리며 서 있자 머지않아 한우주가 나왔다. 한우주는…, 흰 티셔츠에 잠옷 바지를 입고 있었다. 너무 편하게 입었잖아. 서연준이랑 대비된다고.

“한우주 안녕.”

“어. 들어와.”

아니, 괜찮은가? 워낙 비율이 좋으니 잠옷 바람이어도 태가 나는 것 같기도?

“조현우. 안 들어와?”

“…들어가야지.”

또 쓸데없는 생각 한다. 한우주를 지나쳐 현관에 들어서는데 부드럽고 묵직한 향이 확 끼친다. 한우주 방금 씻었나? 아, 잠깐.

“야, 한우주!”

“왜.”

“너 또 머리….”

“머리?”

간신히 말을 참아 낸다. 저게 머리를 안 말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참견할 뻔했다. 감기 걸린다니까 하여튼 온갖 걸 귀찮아한다. 서연준은 현관 복도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다 젖었길래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은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다. 대충 말하고는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 한우주는 서연준과 내가 공부할 것을 꺼내 정리하는 동안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뽀송뽀송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새 머리를 말리고 왔나 보다.

“풉.”

“현우야?”

“아, 아니. 그냥 웃긴 게 생각나서….”

“뭔데 그래? 나중에 나도 알려 줘.”

“별거 아니야. 진짜로.”

요즘 한우주는 사소한 잔소리나 요구 사항을 곧잘 들어준다. 정작 큰일에는 끝까지 억지를 피워 대서 문제지만. 핸드폰이라든가, 거처라든가…. 서연준은 더 캐묻지 않고 미소만 지어 보였다가 한우주를 향해 말했다.

“한우주. 식탁 좀 써도 괜찮아? 거실 테이블은 좀 낮아서.”

“마음대로 해.”

“응. 고마워.”

교재와 자료들을 식탁 위에 얼추 펼쳐 놓고 서연준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내게 눈짓하기에 곤란한 참이었는데 웬일로 한우주가 알아서 예쁜 짓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연준 옆자리에 가서는 그대로 털썩 앉아 버린다. 서연준의 웃는 얼굴에 당혹감이 담겼다.

“한우주? 너도 공부하게?”

“어. 왜? 문제 있어?”

“그럴 리가. 현우가 내 자리에 앉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래. 공부 봐주기로 했으니까.”

“아.”

서연준의 말에도 한우주는 여전히 자리를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니 얌전히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모르는 거 생기면 부를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옆에 앉는 게 편하지 않을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야, 서연준.”

“응…?”

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들자 한우주가 팔을 잡아 저지했다. 어, 이거 꽤…?

“어딜 가려고.”

“현우 옆자리 가려는데?”

“야.”

“왜?”

“나도 물어볼 거 있어.”

서연준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춘다. 고개를 기울인 채로 미간을 좁히는 게 방금 들은 이야기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긴가민가한 투로 한우주에게 되묻는다.

“……그, 뭐라고?”

“물어볼 거 있으니까 얌전히 내 옆에 있으라고.”

“현우랑 먼저 약속….”

“여기가 누구 집인지 잊은 건 아니지?”

“……아, 아니지. 현우야, 넌 괜찮아?”

“응. 괜찮아!”

“그렇다면야….”

서연준은 수긍하면서도 이 상황이 이상한 듯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그 마음 이해한다. 사실 나도 한우주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그저 내가 애쓸 것도 없이 알아서 서연준 옆에 있겠다고 하니 대견할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뒤로 한참 동안 건전했다. 나의 부끄러운 욕심은 서걱서걱, 조용한 볼펜 소리와 함께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개뿔이다. 진짜 뭐 없나? 내가 자리를 비켜 줘야 하나? 이렇게 공부만 한다고? 미연시 주인공 집에 공략캐가 왔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기대해도 되지 않냐고. 명색이 미연시인데.’

하필 고전 시가를 펼쳐 놓은 탓일까. 나의 딴짓 세포가 쉴 틈 없이 일하기 시작했다. 엉뚱한 상상이 머릿속에 자꾸 떠올랐다.

남주와 여주…. 아니지. 남주와 남주, 그리고 병풍 같은 조연 하나가 공부를 하고 있다. 툭, 한우주가 실수로 샤프를 떨어트린다. 한우주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샤프를 주우려 하다가 서연준과 손등이 맞부딪힌다. 서연준 역시 떨어진 샤프를 주우려 한 것이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코가 닿을 듯한 아슬한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오랜 친구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처음 마주할 적의 앳된 모습은 세월이 흐르며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눈앞의 친구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남자일 터이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인지한다. 그리고 서로의 숨결이 닿자 마법 같은 분위기에 휩쓸린 둘은….

둘은…….

콱.

“현우야 왜 그래?”

“어? 응? 뭐가?”

“…그, 샤프 촉이 휘었어.”

“…….”

진짜다. 아니, 언제 이렇게 힘을 줬지? 한우주와 서연준이 나란히 나를 쳐다본다. 방금까지 엄한 상상을 해서 그런가? 지금은 두 사람 얼굴 보기가 좀.

“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 마저 해. 이, 이렇게 반대쪽으로 다시 휘면 되거든.”

나는 보란 듯 교재 위에 샤프 촉을 꾹꾹 눌렀다. 아깐 잘만 휘던 게 꿈쩍도 안 한다. 이 망할 것.

맞은편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지금 한우주랑 서연준 둘이서 내 꼴 보고 웃는 거야? 지금 비웃어?!

“야. 너희 뭐가 그렇게 웃겨?”

“네가 웃긴 짓을 하잖아.”

“미안, 미안. 웃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둘이 반응 한번 다르네. 무시하고 마저 샤프나 수리하려 했다. 그런데 서연준이 자신이 쓰던 샤프를 건넨다.

“현우야. 이거 써.”

“어? 괜찮은데….”

“난 다른 것도 많아.”

서연준이 묵직한 필통을 한 번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기꺼이 서연준의 샤프를 건네받았다.

“고마워.”

“뭘.”

“시끄러워. 공부에 집중이 안 되잖아.”

“…….”

“…….”

한우주 쟤는 또 왜 저래. 공부 제일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신경질이야….

하여튼 한우주의 날카로운 한마디로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시 공부를 이어 나갔다. 한우주는 서연준한테 물어볼 게 있다더니 질문 한 번 하지 않았다. 나는 서연준과 한우주의 관계를 진전시킬 기회를 엿보는 데 정신이 팔려, 서연준에게 뭘 물어볼 생각을 못 했다. 애초에 딱히 질문할 거리가 없기도 하다. 게다가 얼마 전 서연준이 준 요약본 파일을 생각하면 왠지 좀…, 공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 찝찝하기도 하고.

그렇게 또다시 찾아온 정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툭, 도르르르….

‘…….’

한우주가 샤프를 떨어트렸다. 이 기시감 뭐지? 아, 방금 내가 상상한 그 상황 아니야? 한우주가 샤프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동시에 서연준도 샤프를 주우려….

‘으아악!’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나 화장실!”

한우주와 서연준이 내게 관심을 주기 전에 딱 한마디 뱉고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다. 아주 혼자서 야단법석이다. 정신 차리고 세수라도 하고 돌아가야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새빨갛다. 아니, 나는 왜 쓸데없는 망상을 해서는 혼자서 이 난리냐….

정신 차리자. 눈을 꾹 감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런데 감은 눈 너머로 자꾸만 이상한 영상이 보인다. 한우주랑 서연준이 무슨, 뭐, 왜, 망할. 왜? 내가 왜 이런 걸 상상하고 있지? 드디어 미쳤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분명 좋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걸 상상하진 말라고, 인마.

‘하….’

결국, 나는 자신에게 형벌을 내렸다. 생각 의자에 앉아서 반성하기…. 그러나 화장실에는 의자가 없으므로 변기로 대체한다. 한 10분쯤 앉아서 머리를 비우니 진정이 좀 되었다. 아마 이쯤이면 한우주랑 서연준 사이에 뭐가 있어도 끝났겠지.

다시 돌아간 거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이전과 다른 게 없어 보이는데도 나의 착각인지, 공기에 분홍빛이 낀 것만 같다. 애써 무시하고 마저 공부나 하려는데 시선이 따갑다. 한우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아까부터 뭐야?”

“뭐, 뭐가?”

“자꾸 흘끔대잖아.”

“안 그랬는데…?”

“그랬어.”

“아닌데?”

한우주가 서연준을 보고 말한다.

“조현우 쟤가 아니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음….”

서연준이 곤란한 웃음을 짓는다. 뭐야? 왜? 나 이제 내 시선도 제어 못 하게 된 거야? 한우주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읽던 책을 덮어 정리한다.

“집중 안 돼?”

“…조금.”

“산책이나 좀 하다 올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눈짓한다. 따라 일어나란다.

“아니, 뭘. 나만 잠깐 나갔다 오면 되지. 오늘 내가 정신이 좀 없나 보다. 한우주 너는 하던 거 마저 해.”

“나도 몸 좀 움직이게. 얼른 일어나.”

…나 분위기 좋은 와중에 방해한 거 아니겠지? 한우주와 서연준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서연준도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앉아 있기 지칠 때도 됐어. 밖에 잠깐만 돌고 오자.”

시험공부…, 혹은 연애를 위한 기반 작업을 해야 할 애들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안태원. 한우주는 옷을 갈아입겠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서연준과 나만 현관 쪽에 덩그러니 선 채로 한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얌전히 서 있던 서연준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건넨다.

“현우야.”

“어?”

“공부는 잘돼 가? 물어보는 거 없이 가만히 있길래.”

“아…, 응. 생각보다는….”

“하긴. 현우 너는 알아서 잘할 것 같더라.”

“…….”

도대체 뭘 어떻게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묻어 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껄끄러움에 서연준의 눈을 이리저리 피하며 대답했다. 서연준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 너는 자신 없는 과목을 공부할 때엔 집중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는 것 같아. 아니면 딴생각한다거나….”

“…응?”

“그럴 땐 같이 풀면 좀 나으니까, 참지 말고 말해. 한우주한테 자리 바꿔 달라고 할게.”

뭐…, 뭐야. 어리둥절해 대답도 못 하던 중에 한우주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는 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가 느린 걸음으로 둘을 겨우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으로 나가고…. 말없이 둘의 뒤를 따르다 보니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서연준의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와 불쾌한 의문을 자아낸다.

서연준 쟤…, 도대체 언제 날 보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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