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벌써 몇 번은 겪은 일이다. 계속, 또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와 모르는 사람의 감정을 마주한다. 감당하기 싫은, 그러나 조현우의 몸으로 있는 이상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
이 망할 게임에 들어오고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가장 싫었다. 현실에서 안태원, ‘나’를 향한 감정도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 빈번했는데 하물며 ‘완전한 타인’을 향한 감정을 오롯이 받아 내는 것은 어떻겠는가? 특히 허지훈같이 표현이 거칠수록,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깊을수록 정신적으로 지친다.
허지훈은 정신없이 병실 안을 돌아다녔다.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근데 잘 안 되었나 보다. 갑자기 창문을 열고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욕을 내질렀다.
“아악! 이, 미친. 개 미친 새끼야!!!”
허지훈이 감정을 쏟아 내는 동안 나는 망연히 자리에 선 채로 바닥만 내려다봤다. 새로이 안 사실을 속으로 읊조린다. 조현우랑 허지훈이 보통 친구는 아니구나. 허지훈 저거 서운해서 저러나 보다.
아무래도 나는 조현우 몸에 든 안태원으로서 가장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을 만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허지훈처럼 밖에 대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켜 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야속했다.
***
허지훈이 그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놀란 의료진이 병실에 들이닥쳤다. 나는 거의 쫓겨날 뻔했다가 허지훈의 만류로 겨우 병실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허지훈은 병상에 누워 머리를 식히고 있고 나는 얌전히 그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다. 그저 허지훈이 진정하고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모양새는 꽤 병문안 같았다.
허지훈은 아까부터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래 뭐, 보기 싫은가 보다. 괜히 무겁게 생각해서 컨디션 망치지 말자. 이러다 면회 시간 끝나면 오늘은 그냥 집에 돌아가는 거지. 멍하니 창밖이나 구경하고 있을 때 허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새끼야?”
허지훈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허지훈은 여전히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조현우 얼굴 보기 싫은가 보다. 아무튼, 내 마음속에서 허지훈에 대한 공포심은 물러나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다만….
“팔 말하는 거야?”
“밀쳐졌다며.”
“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허지훈의 기분이 풀릴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이제는 허지훈이 어르고 달래야 하는 대상으로 보였다. 무서운 것보다는 낫지만 상대하기 피곤한 것은 변함없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끝을 늘이자 그제야 허지훈이 나를 봤다. 답답해 죽겠다는 양 낮은 어조로 되묻는다.
“왜 말을 안 해? 누구냐니까?”
“말해도 모를 것 같아서. 인하성.”
“인하성이 뭐 하는 놈인데?”
“어…, 우리 학교 1학년이고 야구해.”
“운동하는 놈이 사람을 밀쳐? 아니, 너는 어디서 뭘 하다 듣도 보도 못한 새끼랑 엮여서는…. 그래서, 그 새끼는 멀쩡하냐?”
“응?”
“걔 팔이든 다리든 뭐든 멀쩡하냐고. 뼈를 빠개서 가루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
“아, 아아! 안 멀쩡해. 걔도 팔 부러졌어! 게다가 전학 간대.”
아무래도 허지훈은 무서운 놈이 맞나 보다. 오늘 밤 인하성을 끝장낼 기세길래 서둘러 인하성의 소식을 마저 전했다. 그런데 허지훈 얘는 기분이 풀리기는커녕 되레 불쾌한 티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전학? 언제.”
“그, 글쎄. 아마 바로 가지 않으려나? 징계 먹은 거니까.”
“좆같네.”
“…뭐가?”
“그 새끼 면상은 알아 놔야 다음에 주먹을 갈기든….”
“아, 으악! 그러지 마!”
“…자꾸 말 끊고 지랄이야.”
허지훈이 혀를 차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한쪽 무릎만 세워 삐딱한 자세를 하고선 턱을 괸다. 곧, 원망 가득 담긴 눈길로 나를 흘겨보며 말한다.
“팔이 그 꼴이라 연락 한 번을 안 했냐?”
“…….”
“아니지. 전화는 받을 수 있잖아?! 조현우 너 진짜 뭐냐고?”
“그….”
하…, 뭐라고 답하냐. 조현우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허지훈 기분 덜 상할 말이 뭐 있을까. 머릿속에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다.
아 그게. 허지훈, 네 번호가 차단되어 있더라고? 이 새끼가 날 차단했어?! 이건 안 되겠다. 탈락.
나 그동안 혼수상태였어. 뭐, 인마? 그것도 인하성 짓이냐? 그 새끼 묫자리 봐 두라고 해라. 어…, 이것도 아닌 것 같다. 허지훈 퇴원해서 학교 가면 바로 들통날 거짓말이기도 하고.
아마도 이게 가장 나은 답이 아닐까.
“…잃어버려서.”
거짓말은 아니잖아. 이전엔 허지훈의 존재를 모르다시피 했고, 딱 연락하려는 때에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까. 합리화를 거쳐 제법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한다.
“핸드폰 잃어버렸었어.”
“너 어제 나한테 문자 했잖아.”
“그건…, 어제 핸드폰을 새로 샀으니까?”
“…….”
고르고 고른 변명마저 허점투성이긴 하다. 핸드폰이 없어도 병문안이야 올 수 있는 거고, 소식을 전할 방법이야 여럿 있으니까. 가령 오재영이나 강준희를 통한다든가…. 허지훈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뻔뻔하게 밀고 나가는 게 나의 최선이다. 안 통하면 어쩔 수 없고….
“그거뿐이야?”
허지훈이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물었다. 바로 대답하지 않자 재촉까지 한다.
“내 연락 안 받은 이유 그거뿐이냐고. 핸드폰 잃어버린 거.”
양반다리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 쪽으로 몸까지 튼다. 뭐가 그리 초조한 건지, 손가락으로 부산스럽게 제 무릎을 두드린다.
“응.”
긍정의 말이 떨어지자 허지훈의 표정이 단번에 풀린다. 어, 이걸 곧이곧대로 믿나? 이렇게 그냥 넘어간다고? 저거 괜찮은 척하는 거 아니야? 작게 떠오른 의심을 허지훈이 아예 박살을 내 버린다. 안도했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고는 벌러덩, 침대에 몸을 뉘며 웃는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또 소년다웠다. 처음 봤을 때와 지나치게 상반된 모습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벙찐 나를 두고 허지훈이 억지스러운 말을 뱉는다.
“나 일찍 죽으면 네 탓인 줄 알아.”
“어, 음….”
“새끼, 너 때문에 얼마나…. 거의 한 달? 식음 전폐했다. 나 홀쭉해진 거 봐.”
이건 좀 억지가 지나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허지훈은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건강해 보였다. 건장하고, 혈색 좋고, 아까 마구 소리 지르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운이 남아돌아서 문제인 것 같던데…? 아무렴 허지훈은 내 반응은 신경도 안 쓰고 자기 할 말을 이어 갔다.
“야, 아깐 뭐에 그렇게 쫀 거냐?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러니까 거기서 어떻게 안 쪼냐고. 잠깐의 고민 끝에 대답한다.
“오재영이랑 강준희가 그러던데. 네가 나 죽일 거라고?”
“뭐, 인마?”
틀린 말도 거짓말도 아니다. 오재영과 강준희 때문에 더 겁먹은 건 사실이니까. 같이 병문안 안 온 것에 대한 작은 복수로 이름을 팔아먹었다.
“야. 나보다 그놈들을 믿어? 조현우 이게 진짜?”
“…당연히 그건 아니지. 그, 으렇게 겁먹지 않았는데. 요즘 컨디션이 별로라 표정도 더 안 좋아 보였나?”
“흠….”
허지훈이 가늘게 뜬 눈으로 가볍게 나를 훑고는 호쾌한 투로 말했다.
“그러게? 전보다 안색이 구리긴 하네. 어오, 네 표정이 어땠는지 직접 봤어야 했는데. 존나 배신감 들어서….”
“거, 겁먹은 거 아니었다니까.”
허지훈이 짧게 혀를 찬다. 쩌억, 크게 하품하고는 한쪽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아, 뭐. 알겠어. 네 말이 맞겠지…. 오해해서 미안하다?”
“어? 어어, 그래.”
얼떨결에 사과까지 받아 버렸다. 이 태도 변화는 뭐지? 변명도 거짓말도 뭐 하나 빠짐없이 어설프기만 한데 허지훈은 의심도 않고 전부 믿었다. 친한 사이인 건 알겠는데…. 점점 혼란한 나를 두고 허지훈은 조잘조잘 잘만 떠들었다.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파서 입원한 허지훈이 조현우를 걱정한다고?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걱정? 뭘 그렇게 걱정해. 팔 때문에 그래?”
“그것도 있고. 네 꼴 보자마자 존나 기겁했다.”
“이거 한 2주 전에 다친 건데. 다른 애들한테 소식 못 전해 들었어?”
“다른 애들?”
“오재영이나, 강준희나….”
“아, 미친. 그러고 보니 그 새끼들 왜 입 닥치고 있었지? 와, 진짜 퇴원하고 다 조져 놓든가 해야지.”
…어떤 식으로 조질 예정인지는 모르겠다만 오재영과 강준희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아무튼, 팔 때문이 아니라면 더 이상하다. 조현우가 사정이 어렵긴 하지만 어떻게든 자기 앞가림은 하며 지내는 것 같던데. 허지훈이 조현우 가족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웠는지.
“난 진짜, 네 팔 처음 보고선….”
나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허지훈이 내뱉은 말 속에 답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허지훈의 목소리가 낮고 음산하게 울렸다. 대화를 나누며 풀어진 경계가 가시처럼 돋아나고, 불쾌와 분노를 여실히 드러낸다.
“한우주 그 미친 새끼가 그래 놓은 줄 알았잖아.”
한우주. 허지훈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우주의 이름이 나왔다.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허지훈은 한우주가…, 한우주가 내 팔을 부러트려 놓은 줄 알았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생각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인다.
“지금…, 허지훈 네가 날 걱정한 게 한우주 때문이라는 거야? 한우주가 날 해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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