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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32화 (32/150)

32화

5. 경계선

눈 밑이 퀭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4월 11일 금요일,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 오후 수업이 한창인데 나는 멍하니 메뉴 창이나 들여다보고 있다. 이거 본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바로 어제 아침, 새로 뜬 알림 창을 확인한 이후로 죽 이 상태다. 인물 수첩에 들어가고, 이벤트 목록을 확인하고, 혹 숨겨진 버튼이 없는지 샅샅이 살폈는데도 수확이 없다.

미련과 의문을 버리지 못해 밤에 한숨도 못 잤다. 망할, 공략 캐릭터 ‘???’는 또 뭔데. 히든 루트 특별 캐릭터, 뭐 그런 건가? 이름은 왜 안 알려 주는 거야?

시스템이 말하는 ‘특수 조건’이라는 건 또 무엇일까. 인하성 때에 이어서 두 번째 보는 문구다. 그때는 제대로 결론을 못 내고 넘겼지만, 이번에는 어설프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며 고민하고 추리해 본다. 조건을 알면 자연스레 캐릭터의 정체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1. 게임 시작 후, 정해진 일수를 채우면 자동으로 개방되는 특별 루트다.

2. 기존 공략 캐릭터가 삭제된 것과 관련이 있다.

3. 한우주가 호감을 느낀, 기존 공략 캐릭터 외의 인물이 생기면서 추가된 거다?

‘…….’

전혀 모르겠다. 인하성 때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3번이 유력하긴 한데, 이번 일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가장 가능성 없는 항목 아닌가?

이곳에 온 이후로 거의 매일 한우주와 붙어 다녔다. 한우주에게 접근한 새로운 인물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는 없다. 내가 곁에 없는 동안 누군가를 만났을 확률은? 그래, 아예 없지는 않다. 아버지를 만나러 나간 사흘 동안 뭐가 있었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기엔 루트가 추가된 시기가 마음에 걸린다. 왜 주말 끝나고 바로 추가되질 않고?

‘그날 한우주와 같이 있던 사람은… 고작해야….’

나랑…,

또…, 누가 있지?

거의 나밖에 없지 않나….

쿵.

책상에 이마를 들이박다시피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미치겠다. 이러다 머리 터지겠어. 더는 한계다.

엎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 지금 몇 시간째 깨어 있는 거지. 30시간? 32시간? 망할, 시험 기간 때도 이렇게 해 본 적 없다.

정신은 몽롱하고, 앞에서 선생님이 뭐라 떠드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이 방향 없이 흘러 자아 성찰의 단계에 다다른다. 나는 누구인가, 뭘 잘못했다고 지금 이러고 있나. 성찰의 단계를 지나니 갑자기 화성에 가 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꿈이 우주여행이었던 것 같기도….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곳을 하염없이 헤매는 도중 누군가 나를 강하게 흔들었다. 덕분에 지구로 강제 귀환당했다.

“야, 조현우! 미친, 죽었냐?!”

“그럴 리 있겠냐.”

그새 귀에 익은 두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몸이 흔들리니 멀미까지 난다. 어깨에 붙은 손을 겨우 떼어 내고, 느릿느릿 허리를 세워 앉는다. 반쯤 감은 눈으로 두 사람을 확인했다. 역시, 오재영이랑 강준희다. 얘네가 왜 여기 있어. 쉬는 시간인가?

“아, 씨. 깜짝이야. 좀비인 줄 알았네.”

오재영이 짐짓 놀란 체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바로 옆에 서 있던 강준희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시선을 내게 두고 말했다.

“잠깐 따라 나와. 오재 할 말 있대.”

“야, 존나. 나만 볼일 있는 것처럼 말한다?”

“넌 가만히 좀 있어.”

…정신없다. 상태가 엉망이라 말짱히 대화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거절하려니 얼마 전 오재영이랑 신경전을 벌였던 일이 신경 쓰인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장선 강준희와 오재영을 따르려니 무언가 내 손을 붙잡는다.

“조현우. 뭐 해?”

맞닿은 피부가 뜨겁다. 한우주 얘는 또 언제 일어났대.

“얘기할 게 있다고 해서, 잠깐….”

“너 피곤하잖아.”

“으음, 대화 못 할 정도는 아니야.”

한우주의 시선이 내 뒤편으로 옮겨 간다.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오재영이 큰 소리를 낸다.

“아니, 한우주 이 미친….”

강준희가 오재영의 입을 틀어막는다. 미처 뱉지 못한 욕설이 강준희 손안에 갇힌 채 웅웅댄다. 버둥거리는 오재영을 저지한 채로, 강준희가 한우주에게 말했다.

“야, 표정 풀어. 안 뺏어 가.”

“…….”

정적 사이로 흐르는 묘한 기류와 긴장감에 정신이 확 든다. 강준희와 한우주 사이에 껴 있자니 죽을 맛이다.

진짜, 분위기 왜 이래? 뺏긴 뭘 뺏어. 이상한 놈들….

한우주의 무심한 시선은 여전히 강준희를 향해 있었다. 곧, 나를 붙잡은 온기가 멀어졌다.

“다녀와.”

오른손이 유독 허전하다. 방금까지 느낀 온기는 금방 식어 버렸다. 왜 이렇게 손이 찬 것 같지. 그대로 교실에 눌러앉아 체온을 덥히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야말로 교실을 나섰다.

***

“야, 너는 무슨. 뭐만 하면 남의 입 막고 지랄이야. 손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

“그래서 손 자주 씻잖아. 방금도 손 소독제 뿌렸다.”

“미친. 어쩐지 알코올 향 존나 나더라.”

둘이 질리지도 않나. 아예 코너를 만들어라. 오재영과 강준희의 콩트 쇼….

창가 쪽 복도에 기대어 둘을 구경하고 있자니, 강준희가 오재영의 어깨를 잡아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려놓으며 말한다.

“용건이나 봐.”

“아오, 강준희!”

무슨 일인지 오재영이 주뼛거리며 눈치를 본다. 그러다 돌연 큰 소리를 낸다.

“야, 너 어제 또 연락 안 받더라!”

“오재.”

“아오!”

강준희가 손날로 오재영의 정수리를 콩 내리쳤다. 쟤네 진짜 뭐 하냐? 어색하게 웃으며 답한다.

“미안. 어제는 진짜 정신이 없었어.”

“그러냐. 그래 보이긴 하네. 그건 됐고….”

오재영이 말끝을 늘인다.

“미….”

미? 미…, 뭐지. 얌전히 듣고 있으려니 하품이 나왔다. 미친. 하필 이럴 때? 다른 뜻 없다. 진짜 졸려서 그런 거다. 혹 오재영이 오해할까 싶어 뭐든 변명하려는데, 오재영이 더 빨랐다.

“미…, 미친놈아! 뭐가 그렇게 피곤하냐?! 그제는 내가 미안했다!”

“뭐?”

…지금 나한테 사과한 거야? 잘못 들었나? 얼떨떨해 곧장 되물었다.

“미안하다고? 뭐가…?”

“아니, 꼭 말해야 아냐? 너한테 성질낸 거!”

“아.”

그때 일을 오재영이 사과하러 올 줄 몰랐다. 사이가 틀어질 걸 걱정하긴 했는데…. 공략 캐릭터 ‘???’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어…, 한우주 욕한 걸 왜 나한테 사과해…?”

“뭐? 그딴 걸로 사과하는 거 아닌데. 걘 욕먹을 만하….”

“오재.”

오재영 머리 위로 또다시 손날이 떨어진다. 오재영은 아예 정수리를 두 손으로 감싸 버렸다.

“…아오! 그놈의 한우주는 빼고 얘기해. 아무튼, 미안하다고. 요즘 힘들어 보이던데 내 아량이 좁았다, 짜식아.”

말을 마치곤 한숨을 푹 내쉰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만히 눈만 끔뻑이다가 흔하디흔한 인사말로 답했다.

“응. 나도 미안.”

“아악!”

순식간에 평소와 같이 부산스러운 오재영으로 돌아왔다. 이런 거 닭살 돋는다, 못 참겠다며 복도를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강준희는 그런 오재영을 애써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양손을 교복 바지에 꽂고는 내게 말을 붙인다.

“야, 조현우.”

오재영 다음에는 강준희구나. 그래, 너희 할 말 다 해 봐라. 시선으로 답했다.

“너 허지훈이랑 무슨 일 있냐?”

“허…. 뭐? 아, 허지훈.”

이틀 만에 듣는 이름이다. 맞다. 허지훈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했지. ‘???’ 루트 추가의 충격으로 완전히 뒷전이 되어 버렸다. 내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강준희가 미간을 좁힌다. 그럴 만도 하지. 강준희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둘이 무슨 일 있는 거면 말해. 연락하라고 안 보챌 테니까. 허지훈한테는 적당히 둘러대지 뭐. 네가 싫어서 연락 안 하는 거라면야….”

“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왜 걔 연락은 죄다 씹는데?”

음, 허지훈 관련해선 강준희나 오재영한테 물어볼 계획이었으니까…, 괜찮겠지? 이리저리 재 보면서 그럴듯한 말 생각해 내는 것도 일이다. 티 나더라도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핸드폰을 강준희 쪽으로 내민다.

“나 허지훈한테 연락 못 받았어. 그리고 걔 번호 잃어버렸어.”

“뭐?”

“번호 좀 알려 주라.”

강준희는 황당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말하며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리다가 우뚝 멈춰 선다. 내게 핸드폰을 되돌려 주며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야. 허지훈 번호 있잖아.”

“어?”

“직접 보고 확인해.”

입력하다 만 번호 아래로 어떤 연락처가 검색되어 보인다. 「ㅎㅈ」라 저장된 번호. 이게 허지훈이었어?

“…연락은 왜 안 온 거지?”

이제야 민망함을 갈무리한 것인지, 오재영이 다가와 기웃거린다. 내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나 보다. 오재영이 자기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야, 내놔 봐.”

그렇게 핸드폰은 오재영에게로 넘어갔다. 오재영은 핸드폰을 금방 훑어보고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현우 개 얼빵해.”

“뭐?”

“야, 수신 차단 해 놨잖아! 허지훈이 존나 시끄럽게 굴어서 해 놓은 거 아냐?”

오재영이 보란 듯 액정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진짜다. 조금 전에 본 번호가 수신 차단 목록에 올라가 있다. 이게 뭐야. 원래 수신 차단 돼 있었나? 난 누구 번호 차단한 기억이 없는데?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건 없다. 나 말고 조현우가 차단해 놓은 건가? 허지훈이랑 조현우 친한 거 아니었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오재영이 내 오른손에 핸드폰을 쥐여 주었다.

“와, 진짜. 정신 어따 두고 사냐?”

…그래. 사정을 모르는 오재영 눈에는 내가 어벙해 보이겠다.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강준희가 입을 열었다.

“실수로 차단했든지, 일부러 했든지. 굳이 안 물을 테니까 허지훈 퇴원하기 전에 연락 한번 해. 너도 걔 지랄하는 거 감당하긴 싫을 거 아냐.”

강준희는 말하며 내 오른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내 교실 문 쪽을 향해 손을 휘휘 젓는다.

“난 볼일 끝이야. 야, 오재. 가자.”

“어…. 야, 조현우! 몸 좀 챙기고 다녀라? 오늘내일할 사람처럼 다니지 말고!!”

“오늘내일….”

고개를 대충 까딱이며 인사하고 점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수업 종이 시끄럽게 울리고 나서야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뒤쪽에서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얘기 했어?”

허지훈 얘기를 한우주에게 해도 될까. 당장은 안 하는 게 낫지 않나. 아무래도 둘 사이가 좋진 않을 것 같은데. 대충 얼버무려 답했다.

“별말 안 했어.”

그 뒤로는 아예 한우주처럼 자 버렸다. 쉬는 시간, 수업 시간 가리지 않고 잤다는 뜻이다. 와중에 신기한 게, 종례 시간이 되니 몸이 알고 자동으로 깨더라.

그리고 하교하려던 때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인하성의 소식을 접했다.

“내가 싹 다 소송할 거라고. 알았어?!”

교무실 쪽이 소란스럽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번에 한 번 봤으니까. 인하성의 부모님이다.

멈춰 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한우주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저런 거 신경 쓰지 마.”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괜히 구경하다가 저 사람들 눈에 들면 좋은 꼴 못 볼 것 같다.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다. 다른 층에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목청이 크더라. 그러니 학생들의 주목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를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인하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가, 시험공부에 지친 고등학생들의 유희거리가 되었다.

인하성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인하성은 체육 특기자 자격을 잃었고, 강제 전학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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