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38)화 (138/138)

外二 율해경

화양 율씨 효경파 42세손 율해경은 먼 과거를 회상했다. 그가 영화단을 창설하고 사대귀인이라 불리기 전. 평범한 술사 나부랭이였던 날을.

주단 금씨와 손잡은 황실이 여타 세가를 핍박하던 시절. 첫째로 표적이 된 곳은 화양 율씨였다. 

율해서가 살았다면 두려워서라도 덤벼들지 못했을 텐데. 녀석은 바다보다 넓은 호수에서 죽어 버렸으니. 

당시 황실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죽은 율해서를 신으로 떠받들고 숭배하되, 녀석의 뿌리인 가문은 철저히 배척한 것이다.

거기에 파천한 황제를 호위하며 눈에 든 주단 금씨가 야욕을 부렸다. 속내야 뻔하다. 다른 세가와 혼인할 심산이었겠지. 피가 섞이면 혈맥으로 약조한 신령의 권능 또한 자연히 넘어올 테니.

힘의 견제를 위해 세가 간의 혼인은 금기시되곤 했다. 우선 본보기로 하나 멸문시키면, 여타 세가에서도 숙이고 들어오리라 여긴 걸까. 

결국 무력이 약한 화양 율씨가 제일 만만했으리라. 

우습게도 종주라는 작자가 먼저 도망질을 쳤다. 이래서야 황제보고 뭐라 할 처지가 못 되지. 결국, 마지막까지 가문을 지킨 건 마님이셨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화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터를 잡은 효경파는, 덕분에 멸문지화의 불길이 번지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해경은 날밤으로 종주를 욕했다. 눈을 뜨면 종주를 욕하고, 눈을 감기 전에도 욕하고, 꿈에서도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능한 종주가 술김에 홍의백면을 떠벌린 탓에 쉬쉬하면서도 알 사람은 다 아는, 그야말로 공공연한 비밀이 돼 버렸으니.

녀석의 도움으로 외침을 막아 낸 황실은, 정작 위기를 극복하자 눈엣가시 같은 모양이다. 하긴 권력의 본질은 무력이 아니던가. 언제든 권좌의 주인을 교체할 수 있는 무력 집단이 얼마나 거슬렸을지.

“종주님이든 소종주님이든 찾아야지 않겠습니까? 그분들을 위시하여 가문을 재건해야지요.”

“물론 모셔야 함이 마땅하나, 당장 어디 계신지도 모를뿐더러 무작정 모셔 온다 한들 준비도 없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내실을 길러야···.”

이래저래 떠드는 소리를 뒤로한 해경이 은신처를 벗어났다. 

답답했다. 가문을 등지고 도망친 종주를 굳이 찾고 싶지 않았다. 소종주, 율해원도 마찬가지. 찾아 봤자 무슨 소용이랴. 황실이 버티는 한 영원히 도망자 신세일진대.

율해서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도 더러 있으나, 해경은 낭설로 치부했다. 녀석이 진정 생존했다면, 화양에서 그리 당했을 리가 없잖은가. 

율해서는 뭐랄까. 단순히 뛰어난 자질의 천재··· 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유사 이래 그 어떤 술사도 지형을 뒤바꾸진 못했을 테니.

역사는 무수한 발견과 깨달음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지만, 간혹 독보적인 천재가 수천수만 걸음을 추월하여 시대의 흐름을 앞당기고 세상을 격변시키는 경우가 있잖은가. 

녀석은 그런 부류였다. 듣자 하니 비술사도 축지할 수 있는 법기를 만들고, 주단 금씨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혈조술(血操術)도 개량해서 쓸 수 있다던데. 놈이 생존했다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켰을까.

무어, 이미 죽었다만.

“······제가 죽기 전에 부디 한 번만 더 모란 님을 뵙게 해 주세요.”

해경은 지극히 사적인 소망을 담아 기원했다. 

간절함이 통한 걸까,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있었나.”

“······?!”

소스라치는 해경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해원이었다.

“너, 너어···!”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해경은, 왈칵 차오른 눈물을 옷소매로 연신 훔쳤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울지 마세요, 하고 쪼르르 다가와 위로해 주었을 녀석이. 무심히 보고만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은?”

“저어기 안쪽에 계셔.”

성큼 걸어가는 해원의 뒤를 서둘러 따라붙으며. 해경은 안절부절못했다. 혹 녀석이 은신처를 보고 실망할까 밑밥부터 깔기로 했다.

“그으, 뭣이냐. 우리도 급하게 피신하느라 형편이 썩 좋진 않거든··· 그래도 걱정 마. 너 하나 챙겨 줄 여력은 있으니까.”

돌아온 해원의 답은 예상 밖이었다.

“신세 지려고 온 거 아니야.”

“···? 그럼?”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인가, 확인차 들렀어.”

모진 일을 연달아 겪어 그런가. 생판 딴사람이 된 것 같은 해원이 낯설었다.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성의 없이 내뱉었다.

“쓸모없으면 버린다.”

해경은 우뚝 멈추고 말았다. 

너··· 누구야.

율해원은 그런 말 못 해. 그 착해빠진 녀석은 누굴 버린다느니 하는 소린 죽었다 깨도 못 한다고. 

무수한 항변이 목 끝까지 치밀었으나, 도저히 뱉을 수가 없었다. 기묘한 압박과 공포감으로.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것은 대지를 계승한 군주 특유의 위압감이었을 테지만··· 해경은 본디 삐딱한 구석이 있었다. 저를 막을수록 더 크게 반발하는 성질인데, 그게 하필 이때 튀어나와 버렸다.

“야,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쓸모를 따져 버리니 마니 해? 그렇게 치면 먼저 버려야 할 건 너희 아버지···.”

아차.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다.

우뚝 멈춘 해원이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천성이 나쁜 편은 아니라 자부하는 해경이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 내가 말이 심했···.”

“맞아.”

해원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휘었다.

“그 작자는 내가 겪은 인간 중에 가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작자였지. 그래서 두 번째로 버렸어.”

“무슨··· 종주님을, 무얼 어떻게 버린단 거야?”

해경을 가만 보던 녀석이 불쑥 접근했다. 놀란 해경이 흐익 하고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칠 쳤으나, 해원은 보다 빨랐다.

“죽였어.”

귓가에 스치듯, 작은 속삭임.

해원은 희게 웃었으나 해경은 그러지 못했다. 죽여? 누가, 누굴?

“너··· 너, 설마···?”

“수배령이 내렸는데도 빼돌린 가산으로 오입질이나 하기에 한창 중에 머리를 날렸어. 복상사라, 수준에 딱 맞는 결말이지?”

웃으며 다시 걸어가는 해원의 뒤에서. 해경은 인정해야 했다. 율해원이, 소종주가 변하였음을.

“······잠깐, 두 번째라고?”

부친이 두 번째로 버린 사람이라니. 하면, 첫 번째는 누군데?

그 의문의 답은 한참 후 알게 되었다.

해원이 저주를 내렸다.

— 허락받지 못한 권좌에 스스로 오른 자 모두 죄인이라.

인간의 왕을 거꾸러트렸다.

— 내 친히 죄인을 거두매, 육신의 업이 흙으로 돌아갈지니.

대지를 계승한 놈의 저주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을 흙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 이는 섧게 흐른 피에 바치는 맹세인즉. 권좌에서 혈맥으로 이어지리라.

그것은 섧게 흐른 피, 죽어 간 일족에게 바치는 맹세였다.

— 죄인과 그 혈에 조력하는 자 또한 죄인이라.

저주에 걸린, 피주자(被呪者)를 도운 사람에게도 저주가 옮게끔 했다.

— 산산이 부서지는 그 곁에 무엇도 남기지 않으리.

철저히 고독하도록.

“좀 심하지 않냐?”

효경파를 위시한 생존자들이 가문 재건에 힘쓸 무렵. 

모두가 해원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오직 해경만이 지체 높은 도련님께 서슴없이 직언했다.

넘치는 정의감과 충만한 의협심에서 그런 건 아니고. 참을성 없고 성질이 더러웠을 뿐이다.

“황실이나 주단 금씨까지는 이해하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손이 무슨 죄로 저주받아야 하냐? 새로 왕권에 도전하는 군벌은? 다 떠나서, 도와준 사람은 왜 또 덩달아 저주에 걸리는데!”

“화양 율씨는 무슨 죄로 숙청당했지?”

“······.”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어린아이까지 도륙당했어. 그들의 죄는, 화양 율씨로 태어난 것뿐.” 

하여 율해원은, 단지 황실의 혈통을 이었다는 이유를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아이에게 죄를 물었다.

“새로운 왕권? 그게 왜 필요하지? 고만고만한 인간끼리 군림하고, 대단한 척 거들먹거리고··· 심지어 그 꼴을, 내 몸 위에서 하겠다고? 웃기지 마.” 

피주자를 도운 사람은 왜 저주에 걸리냐고?

“죽을 땐 혼자여야지. 버림받은 절망에 사무쳐, 철저히 고독하게.”

‘······너처럼?’ 

해경은 그 물음을 속으로 삼켰다.

해원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확히는 두려워도 할 말은 다 하는 해경만을 곁에 두었다. 해경이 얼쩡거리는 걸 용인해 주는 쪽에 가까웠지만. 어찌 됐든 그 덕에 오직 율해경만이 진실을 알았다.

이미 죽은 해원이 유명경으로 되살아났음을.

복잡다단한 심경이었다. 멸문에 준하는 위기에 놓인 가문을 재건하기란 무척 힘겨웠다. 정신적, 실질적 지주로서 해원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해원의 분노는 정당했다. 분노를 풀어내는 방식이 적절한가는 다소 의문이나, 상대가 속세의 제정법으로는 처벌할 길 없는 권좌의 주인이니만큼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그렇게 억지로 합리화할 수도 있다. 

하물며 눈앞에서 가문이, 일족이, 어머니가 죽는 광경을 목도했는데.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그때 당시 해경 또한 황실과 주단 금씨에 이를 갈았던 탓에. 해원의 손속이 과하다는 상념은 가슴에 맺힌 울분에 파묻혀 버렸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것을 방관해 버렸다. 

그 대가는 이백 년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하아.”

깊은 골짜기에 쌓인 무수한 시신. 살이 썩어 가는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도자역으로 굳은 육신은 상하지 않는 탓에.

“여긴 왜 또 이 모양이래?”

해경은 수하를 시켜 시신을 수습했다. 한바탕 내린 비로 굳은 흙무더기를 퍼내고 시신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시신의 몰골은 처참했다. 미간이 쩍 갈라진 머리와 하관이 사라진 얼굴. 우연한 사고로 부딪힌 게 아니다. 필시 어느 심보 고약한 작자가 정성껏 다져 놓았으렷다.

“단주님. 여기 일반 시신이 있습니다.”

단원이 해경을 안내했다. 깨지고 부서질지언정 썩지 않은 도자역의 무덤 속. 부패한 시신 한 구가 진흙탕에 묻혀 있었다.

차림새나 지닌 물건으로 보아 백정일 터. 녀석은 날이 닳고 이가 나간 도끼를 쥐고 있었다.

“쬐끄만 게 무슨 독기로 이리 난장을 피웠다냐.”

시신의 몰골이 한층 끔찍해진 데에는 요 백정 놈이 한몫했을 테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해경은 골짜기의 시신을 모아 축지술로 옮겼다. 그가 다다른 곳은 다환 서북에 위치한 활화산이었다. 

과거 연나라 말기. 물의 군주가 사라지고 불의 군주가 폭주하자 영겁의 불꽃을 품은 바람이 제 몸과 함께 조각내어 퍼트렸다. 

이 화산은 당시 조각난 군주의 불씨 중 하나로, 정상에 서면 바다보다 넓은 호수가 보였다.

해경은 시신을 용암에 넣었다. 이 망할 저주에 걸린 육신은 썩지 않는 탓에 매장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가루가 되도록 빻을 수도 없고. 인격적으로 보내 주려 고심한 끝에 겨우 찾은 방도가 이것이었다.

피주자들의 공동묘지가 된 화산. 최근 이곳에는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용암이 솟구친다. 시꺼먼 연기와 함께 거대한 머리가 고개를 내밀더니 산정을 짚고 일어섰다. 

그것은 거인의 형상을 하였다. 공기에 닿은 용암이 검게 식어 굳었으나, 움직일 때마다 관절 부위가 찢어져 시뻘건 속살을 주룩 흘렸다. 

거인의 얼굴이 북쪽을 향했다.

“······더워서 그런가. 자꾸 북부로 가려 하네.”

하나 곧 목이 꺾인 거인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해경이 눈을 뾰족하게 치떴다.

“망할 놈. 양심이 있으면, 얘 몸이라도 튼튼하게 지어 줘라.”

난데없는 욕지거리였으나 대상은 명확했다. 언제부턴가 제 뒤에 나타난 기척을 눈치채고 있었으니.

“나더러 네 헛짓거리에 동참하라고?”

해경의 옆으로 다가온 해원이 나란히 섰다. 머리가 사라지고 남은 두 팔로 허우적거리는 거인을. 해원은 무감한 시선으로 흘려보냈다.

“이런, 썅. 나야말로 네가 벌인 개짓거리 수습하느라 영면에 들지도 못하고 이 지랄 하는데! 고작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다고?”

“언제 뒤치다꺼리 해 달란 적 있나?”

“그래! 넌 부탁한 적도 없는데 내 멋대로 송장들 모아다 예서 장사 지낸다! 네 저주로 죽어 나간 사람이 모여서 생긴 앤데, 책임감 같은 거 안 드냐?”

모두 두려워하는 해원을, 오직 해경만이 스스럼없이 대했다. 해원은 해경이 잔소리하고 대들고 바락바락 악을 써도 내버려 뒀다. 

그렇게 기묘한 관계가 이어졌다.

“시끄러워.”

왈왈 짖는 해경이 귀찮다는 기색임에도, 막상 입을 틀어막지는 않았다. 그가 진정 하고자 하면, 해경의 입 따위는 얼마든지 꿰맬 수 있을진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살이 익을 듯한 고온을 피해 물러서며. 해경이 운을 뗐다.

“황실이든 주단 금씨든 우리 원수는 진작 죽고 없잖아. 무의미한 저주를 언제까지 대물림할 작정이야?”

쿠우웅··· 거인의 한쪽 팔이 끊어졌다. 검붉은 용암이 피처럼 쏟아지자 해경은 속이 쓰렸다.

“······그럴 기분 아니야.”

“미친놈아, 이게 네 기분 문제냐? 하다못해 그, 뭣이냐, 도와주는 사람한테도 저주가 옮는 것만 해주하면 안 돼? 그것 때문에 저주가 역병이 돼 버렸잖냐.”

“나도 알아. 아는데···.”

해원이 한숨처럼 씁쓸히 토로했다.

“······분이 풀리질 않아.”

유명경으로 되살아난 그는 즉시 황궁으로 쳐들어가 저주를 내렸다. 이 땅의 새로이 군림한 주인에게 생을 허락받지 못한 백성은 흙으로 돌아갔다.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불현듯 떠올라서 기분이 진창에 처박혀. 다 타고 이젠 없나 싶다가도 살짝 들춰 보면 잔불이 남아 있어. 언제부턴가··· 분노가,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모양이야.”

처음 들어 보는, 해원의 내심. 

그 자신도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감정임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자백.

“···하, 나도 모르겠다.”

한껏 쏘아붙일 기세던 해경은, 애꿎은 제 머리만 흐트러뜨렸다. 

대지가 진노하여 역병과 같은 저주가 임하였으니. 한낱 인간은 이 거대한 흐름이 멎을 날만을 고대했다. 부디 그날이 너무 멀지는 않길 바라며.

음산한 지하 공동에 하얀 봉인구가 둥실 떠올랐다. 백지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만든 거대한 구형은, 천장에서 쏟아진 빛을 받아 어두운 지저에서 홀로 눈부셨다.

“아주 쌍으로 지랄을 했구나.”

해경은 대놓고 혀를 찼다. 

형제 싸움이 일단락되고 산이 하나 생겼기에 어디서 저걸 가져왔나 했더니만. 여기 지하를 끌어다 쓴 모양이다. 

대지의 군주라면 새로운 토양도 능히 생성할 수 있겠으나, 없는 걸 새로 만들기보다는 있는 걸 가져다 쓰는 게 훨씬 쉬울 테니.

“······끄응.”

율해서의 봉인은 상당히 견고했다. 미리 계획하고 시간을 할애한 것도 아니고. 교전 중에 이리 복잡한 봉인을 즉흥적으로 만들다니. 

하여간 천재란 것들은. 율해서가 촌각을 다투며 시전한 봉인을 수일에 걸쳐 해체한 해경은, 진이 빠져 주저앉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한데 기껏 꺼내 준 보람도 없게. 해원은 적반하장격으로 나왔다.

“누가 꺼내 달랬어?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멋대로 저지르냐고.”

이런 썅······

“이 새끼는 도와줘도 지랄이야! 형아한테 뒤지게 처맞고 나한테 화풀이냐? 가서 머리나 식혀!”

단원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율해서가 특별히 해원을 때리지는 않았다. 

하나 당장 열이 뻗쳐오른 머리가 그런 걸 떠올릴 리 없다. 해경은 해원을 잡아다 창성에 밀어 넣었다. 

허탈함이 물밀듯 차올랐다.

내가 이 망할 도련님 몸종도 아니고. 어쩌다 저놈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가 되었을꼬. 전생에 저놈한테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해원은 대지의 군주에 가장 근접한 존재이자, 이 땅에 나고 자란 모든 생명을 선별하고 징벌하는 권리와 능력을 갖추었다. 

심지어 영화단을 창설하고 얻은 부와 명예는 물론, 무력까지. 고생은 저가 다 하고 제 놈은 결실만 취하는 주제에. 부족할 거 하나 없고 성질머리마저 고약한 놈이······

왜 이리 눈에 밟히는 걸까.

해경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아무개가 찾아왔다.

해원과 흉신의 교전 후 창성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미리 주민을 대피시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세간과 건물이 죄 무너져 버렸다.

해경은 또또 수습해야 했다. 뒤집힌 길을 정비하고, 망가진 건물을 세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머물 곳을 내어주고······

그나마 다행으로 영화단에는 훌륭한 술사들이 다수 소속되어 있다. 그들이 합심하자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재건되었다. 

창성의 주민들은 영화단과 그를 이끄는 단주에게 고두감읍했으나, 애초 쑥대밭이 된 연유를 아는 해경으로선 마음이 불편했다.

툭 까놓고 해명하기는 난감했다. 흉신과 유랑술사, 해원과 해서의 관계는 물론. 이백 년 전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해원은 피주자들이 세상에게서 버림받은 절망과 공포에 빠지길 원했다. 하여 대지의 군주를 자처하고, 계승 여부를 함구했다. 이제 와 구구절절 설하기엔··· 너무 늦었지.

피해 주민들에게 곳간을 열어 주며 해경은 이를 갈았다. 율해원 이 망할 자식은 또 어디로 나른 건지. 분명 잔소리를 피해 숨은 것이리라.

“돌아오기만 해 봐라.”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훈계할 셈이다. 해경은 놈에게 할 말을 조목조목 정리해 두었다.

하나 열흘이 지나고 달포가 넘도록. 해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정원을 가꾸던 찰나. 홀연히 기척이 나타났다.

겹겹의 결계를 뚫고 영화단주의 정원으로 즉시 축지할 수 있는 자는 한 손에 꼽힌다. 그중 지금 찾아올 만한 녀석은······

“율해원?”

고개를 들자 가면 쓴 행인이 서 있었다. 해경은 대답 없는 가면인이 해원임을 확신했다.

“야, 인마! 너 대체 어딜 싸돌아다닌 거야?!”

해경이라고 마냥 손 놓고 있진 않았다. 다환 각지에 흩어진 단원에게 인상착의를 알리고 해원의 수색을 우선하라 일렀다. 

한데도 찾지 못한 까닭은, 녀석이 축지술을 마구 써 댄 탓이리라.

“어이구, 그 엉성한 가면은 또 뭐냐? 꼬라지 봐라··· 밥은 먹고 다녔냐? 일단 가서···”

“따라와.”

못 본 새 싹수만 늘었나.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용건만 꺼내는 행태에. 해경은 열불이 찼다.

“이 새끼가. 내가 너만 보면 꼬리 흔드는 개인 줄 알아? 뭐, 따라와? 누가 네놈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닌대?”

젠장. 내가 왜 저 망할 놈을 신경 써서는. 해경은 이백 년간 솔찬히 거듭한 후회를 하고 또 했다.

“···오라고 했다.”

“방금 와 놓고 또 어딜 가려고!”

호미를 팽개친 해경이 씩씩대며 다가가 놈의 멱살을 냅다 잡았다.

“망할 자식! 언제까지 네 좆대로 휘두를···!”

거칠게 잡은 탓일까. 해원의 가면이 흘러내렸다. 녀석의 맨얼굴을 목도한 해경은, 일순 호흡조차 잊고 말았다.

얼굴의 절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서늘한 강철이 대신했다. 

그나마 남은 얼굴 반절도 엉망이었다. 잠을 자기는 한 건지 눈 밑이 퀭하니 어둡다. 이마와 뺨은 물론 눈동자까지 크고 작은 금이 어지러이 뻗어 있어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듯했다. 

어찌하면 이런 몰골이 되는지. 해경은 너무도 잘 알았다.

“······도자역?”

툭. 가면이 떨어졌다. 힘 빠진 손에서 옷깃이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해원의 하나 남은 눈이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너, 너··· 네가 왜···?”

“따라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해경은, 녀석에게 잡혀 축지당했다. 

후끈한 열기가 덮쳐들었다. 손가락도 몇 부러졌는지 차가운 쇳덩이가 대신한 모양을 멍하니 보던 해경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화기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다환 북서 쪽에 자리한 활화산. 해경이 도자역 시신을 모아 위령하는 분화구.

“너와 언약을 맺은 지도 꽤 오래됐지. 현존하는 술사 중, 형님을 제하면 네가 가장 큰 그릇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너라면, 남은 내 신력을 감당할 수 있을 거다.”

해경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사실 요 며칠간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해원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니. 

한때 감히 헤아리는 것조차 까마득하던 녀석이. 이제는 제 눈으로도 얼마쯤 가늠할 수 있었다. 해경은 깨달았다.

해원이 영지전에서 패했다. 녀석이 제 권역을 빼앗겼다.

“지금이라도 율해서한테 살려 달라 빌 생각은··· 없겠지.”

녀석의 손에 힘이 실리는 걸 느낀 해경이 도중에 철회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대체 어쩌다 이리된 거야. 너희들, 우애 좋은 형제 아니었어?”

“언제 적 얘기야.”

“하지만 그, 뭐냐. 산송장 같던 네가 그나마 반응하는 게 형님 일이잖냐.”

해원이 코웃음 쳤다.

“죽기 전에는, 그래··· 형님을 미워하면 안 된다, 원망하면 안 된다, 형님은 죄가 없다, 형님도 피해자다··· 그리 되뇌었지. 원망하면 안 되는데 자꾸 원망하고 싶은 내가 혐오스러웠고.”

하나 유명경으로 되살아난 그는 달라졌다.

형님을 미워하면 안 돼. 

왜 안 돼?

원망하면 안 돼. 

어째서?

형님은 죄가 없어. 

그럼 우리 가족은 죄가 있어 죽었나?

형님도 피해자야.

그래. 

나 역시, 피해자고.

“그땐 참 멍청했지.”

해원은 몸서리쳐지도록 어리석은 과거를 잇새로 짓씹었다. 형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다며 혼자 있게 해 달라 하고는······

막상 혼자가 되자, 버려질까 두려워하던 머저리를.

허름한 굴피집에 남아 벌벌 떨던 해원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박찼다.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극심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온 세상이 적으로 돌아선 가운데 홀로 남겨진 불안감.

그 당시 율해원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겁쟁이였다. 

원망? 미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설령 멸문의 원흉일지라도 상관없으니 그가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란 것이다. 

제 안의 이기심을 직면한 해원은, 버림받기 전에 버리기로 했다.

“왜일까.”

마른 입술이 버석하게 열렸다.

“그 시절 나는 형님과 매일같이, 몇 년을 동고동락했는데······.”

해원아. 누가 네 형님이야.

원하신 가족 놀이에 어울려드린 걸 정말로 착각하면 곤란하죠, 도련님.

“······이백 년이 지나고서야 처음으로, 형님을 마주 본 기분이 들어.”

해경은 해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배다른 형제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달았음을, 내심 짐작할 따름이었다.

“밤마다 어찌나 시끄럽게 굴어대는지. 통 잠을 못 잤어.”

아무개가 남기고 간 원혼은 매일 밤 악몽을 선사했다. 

보라고, 네 저주로 이렇게 되었다고. 너도 어서 이 고통을 느껴 보라고, 그리 강요하듯이.

“피곤해서··· 이제 그만 자려고.”

해원이 앞으로 나아갔다. 지나치게 뜨거운 탓에 더 갈 수 없는 해경만 산정에 남겨졌다.

“망할 놈.” 

진절머리 나는 놈과의 이별을 직감한 해경이 끝끝내 투덜거렸다.

“뒤지려거든 혼자 조용히 뒤질 것이지. 애꿎은 나는 왜 불러내서는, 하필 죽는 꼴을 보여 주고 그러냐? 내 꿈자리도 뒤숭숭하게 만들려고?”

“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지간한 대신령보다는 나은 권능이 아직 남아 있어. 내가 이대로 죽으면, 대지진이 재현될지도 몰라.”

“율해서가 알아서 하겠지!” 

“형님한테 고이 넘겨줄 맘은 없어. 그러니까.”

빙글 돌아선 해원의 몸이 뒤로, 분화구로 넘어갔다. 

반사적으로 놈을 잡으려는 듯 손 내밀던 해경이었으나, 단지 그뿐. 

자욱한 잿빛 연기 너머로 놈이 사라졌다. 곧이어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해경의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 ···—!!”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끔찍한 압박. 

전신의 감각이 확장하며 범위를 넓혔다. 풀 한 포기, 너른 숲과 우거진 산, 높이 쌓아 올린 성벽과 도심을 감각했다.

반쪽짜리 군주가 죽고 그의 권능이 전승되었다.

정도를 넘어선 지각의 확대에 실성하기 직전, 툭- 벽에 막히듯 팽창이 멎었다. 율해서의 영역에 부딪힌 것이다.

덕분에 간신히 지옥 문턱에서 돌아온 해경은, 그러고도 잔존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다. 그의 위로 폐부를 태울 듯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거인이 머리를 숙였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지를 툭툭 떨구던 녀석에게 단단한 몸이 생겼다. 강철로 이뤄진 몸체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도자역으로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를 쇳덩어리로 땜질하던 녀석.

— 이제부터 네가 다화련이다.

망할 놈. 그딴 걸 유언이랍시고······

환상처럼 울리는 이명을 끝으로. 해경은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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