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37)화 (137/138)

外一 금비설

미로의 한가운데에 마련된, 그럴싸한 감옥.

그곳에 몸을 누인 부친을 보며 금비설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오늘은 도깨비 감투 따위로 숨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당당히 들어섰다.

손에 쥔 서신을 괜스레 매만져 본다. 서신은 소영이 보낸 글월로, 도자역이 주단에서 물러나는 시일이 적혀 있었다. 

유랑술사는 오래도록 다환을 괴롭힌 지긋지긋한 저주를 기어이 퇴치해 냈다. 

재고 따지고 할 거 없이 무작정 몰아낸 타지방과 달리 이곳, 주경에는 정확한 시일을 지정했다. 주단 금씨의 현 종주이신 부친을 위해서다. 

도자역이 중증에 달한 아버지는 겉뿐 아니라 속까지 거미줄처럼 빼곡한 금이 갔다. 저주가 풀리는 즉시 사망이 예정된 몸뚱이.

이왕 사라질 저주라면, 옛 설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유치한 결말은 안 되는 걸까.

“저주가 곧 사라진다 합니다.”

어머니가 설명하자 아버지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전신이 굳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신체였다.

“유랑술사가 손을 썼다 해요.”

금이 간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진 어머니가, 나직이 속삭였다.

“설이는 괜찮을 겁니다. 더는 애써 버티지 않으셔도 돼요. ······부디 편히 쉬세요.”

현실감이 없다. 평생 없는 셈 치고 살아온 아버지가 새삼 작고하신다 해도 썩 와닿지 않았다. 

묘하게 붕 뜬 기분으로 있던 비설에게. 아버지의 눈동자가 향했다.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가족이 십수 년 만에 재회한 순간. 하나 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때가 되었다.

금이 간 살갗이 붉게 벌어지고 핏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도자역이 물러난 몸은 피로 물들었다.

“······설아···.”

전신에서 피를 쏟으며, 제 이름을 부르는 탁한 음색. 일순 눈가에 열이 올랐다.

이상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가 무어라고. 이제 와 새삼 부친의 정 따윌 느낄 리 만무하건만.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한지.

“···용서, 를······.”

목구멍에 핏물이 차올라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금비설을 향한 시선에 온기가 차츰 가셨다. 이부자리를 검붉은 피로 축축이 적시며,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감상에 잠길 겨를은 없었다. 이 자리에는 세 식구만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맙소사, 진정 피를 흘렸군요!”

“놀랍구려. 유랑술사가 참으로 도자역을 물리친 겐가!”

“그자는 일찍이 마마님도 몰아낸 적 있지 않나. 그리 생각하면 도자역도···.”

“어허, 자네. 도자역을 내린 분이 뉘신 줄 알고! 우리라고 좋아서 이리 감내했겠나? 군주께서 내린 저주를 한낱 인간이 어찌 감히······.”

종친회의 원로들은 저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어머니는 그들을 서릿발처럼 매섭게 노려보았다.

“확인을 마치셨으면 이만 물러나 주시지요.”

“······부인, 종주께서 작고하시었는데 우리도···.”

“임종을 지키는데 곁을 허락한 것만으로 제 인내는 다 하였습니다. 당신들께 일말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물러나 주시지요.”

망설이던 그들이 주춤 발길을 돌렸다. 

탁- 문이 닫히고. 아버지의 시신 곁엔 어머니와 금비설만이 남았다. 금비설이 털어놓았다.

“솔직히 아버지가 낯섭니다.”

“이해합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집니다. 참 많이 원망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해합니다. 무정한 어미였지요.”

금비설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가문의 또래 아이들이 산과 들을 뛰놀 적에도 공부와 수련에 매진했다. 주단 금씨는 매달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성적에 따라 대우를 차등하여 경쟁을 부추겼다. 이때 좋은 성적을 받은 아이들이 부모님께 칭찬받는 걸 보고는 그리했더랬다.

금비설은 십 년이 넘도록 장원을 놓치지 않았으나, 칭찬 한 번 들은 적 없었다. 모친께선 비설이 만나 뵙는 것조차 꺼리셨다. 부모의 정을 갈구했으나, 무엇도 받을 수 없었다. 

금비설은 노선을 변경하여 가업에 몰두했다. 

한데 가문의 어른들은 비설에게 자리를 내어주길 꺼렸다. 저보다 못한 성적의 아이들도 진즉 한 자리씩 꿰차는데도. 정작 종손에게는 모두가 꺼릴 지저분한 일만 떠넘겼다. 

재효에게서 ‘너보다 금비환이 낫다’는, 굴욕적인 언사를 들을 만큼. 더러운 짓거리를.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까닭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받으리라 믿어서다. 괜찮아. 나는 능력이 있으니까. 언젠가는, 분명······

이제는 안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이든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내든. 저들은 관심이 없다. 

어차피 죽을 테니. 

어머니는 먼저 갈 자식에게 부러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종회에선 곧 죽을 희생양에게 중책을 맡기지 않았다. 아이들과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했다.

허탈했다. 

어린아이에게 집이란, 곧 세상이다.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농락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홀로 아등바등했다.

“알고 있을 테지만··· 이 어미는 힘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술과 노름에 빠진 아버지의 손에 팔려 온 신부.

혼롓날이 되어서야 겨우 대면한 신랑은, 놀라우리만치 어리고 또 멀끔했다. 

위세 높은 명문가의 종손임에도 신부가 넷이나 도망을 갔다더니. 심지어 저처럼 술사와 연이 없는 한미한 집안의 여식을 사 오기에 대단한 하자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진상은 그날 밤, 신방에서 밝혀졌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신랑은 새신부에게 조곤조곤 일러 주었다. 도자역의 실체와 그들 집안에 대물림되는 저주. 그 대상이 자신이며, 아이에게 이어지리란 것도.

「금전은 이미 받으셨지요? 도망가시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제야 깨달았다. 어린 신랑은 그간 이런 식으로 신부들을 돌려보낸 것이다.

신랑은 신부가 무사히 도망갈 방도까지 계획했다. 의형제이자 흉금을 털어놓는 친우를 몰래 대기시켜 둔 것이다. 그를 통하면 무사히 종가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괜찮습니다.」

신부는 그 성의를 사양했다.

「제가 받은 건 한순간의 일확천금이 아닙니다. 동생들이 잘 클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편없는 아비 따위를 믿을 순 없다. 

앞서 신부가 넷이나 도망간 탓에 주단 금씨에서는 새신부의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덕분에 형편없는 아비를 가족에게서 떨궈 낼 수 있었다.

「팔려 온 신세에 정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릴 욕심은 진작 버렸습니다. 안심하세요. 아이는··· 없는 셈 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무사히 첫날밤을 보내고. 신부는 신랑의 친우를 만나게 되었다. 지난밤 신부를 몰래 빼돌리려 작당했다던 그 의형제라고.

잠시 신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신부에게 접근한 그가 미소했다.

「이번에 오신 분은 눈치가 있어 다행입니다.」

신랑이 친우라 믿은 자는, 집안에서 심은 간자였다. 순진한 신랑이 신부들을 무사히 보내었다 믿는 사이, 그들을 처리한 장본인.

도망간 신부 모두 살인 멸구 당했다.

괜히 머리가 굵어져 헛바람이라도 들까,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어린 신랑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가 잔머리 굴려 봤자, 가문의 손바닥 안이었다.

「우리 아이는 저주를 알지 못했으면 해요.」

부른 배로 처음 태동을 느낀 날. 어린 신랑은 그리 말하였다.

「제가 어떻게든··· 버텨 볼게요. 우리 설아가 걸음을 떼고, 말을 하고, 장성하여 지금의 저보다 어른이 될 때까지.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제가 끈질기게 버티겠습니다. 아이에게 닥칠 저주를 최대한 늦춰 볼게요.」

저는 그러질 못했어요. 어린 신랑이 다소 울적하게 덧붙였다.

「기억이 시작될 즈음부터 저주에 대해 지겹게 들었거든요. 그 탓에 어차피 죽을 거 힘들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포기해 버렸죠.」

그게 참 아쉽더라고요. 

「사람은 결국 언젠가는 죽잖아요. 주어진 시간이 남들보다 조금 짧다 하여 쉬이 포기해 버리다니. 차라리 그 짧은 나날을 보다 충실하게 누릴 것을.」

미래를 그리며 사는 삶과, 오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은 전혀 다른 까닭에.

「설아는 미리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요. ······저처럼 되지 않도록.」

어린 신랑은 신부 몰래 종회 측에도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더랬다. 

제 아이는 자신에게 하듯 제약을 두지 말라고. 만일 그리했다간, 도자역에 걸린 몸으로 온 집안을 날뛰며 역병을 퍼트리겠노라고.

신랑은 약조를 지켰다. 이 저주가 끝나는 날까지 버티고 버티어··· 그들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금비설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을 나서자 멀지 않은 곳에서 맴도는 종회 어른들이 보였다.

······역겨운 것들.

“비설이 나왔느냐. 부인께서 상심이 크신 모양이니 네가 잘···.”

“말씀을 삼가셔야지요.”

금비설은 나이 지긋한 노인을 향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연치가 어리다 하나, 저는 이제 어엿한 종주가 아닙니까. 예를 지켜 주시지요.”

그제야 저들도 무언가 깨달은 듯싶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종주를 가문의 수장이 아닌, 희생양이자 제물로 치부한 세월이 길었던 탓일까. 예의범절마저 잊은 모양이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우리 종주께 너무 편히 대하고 말았구려.”

“괜찮습니다. 앞으로 주의해 주시면 됩니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가장한 금비설이 온화한 어조로 제안했다.

“어머니께서 그리 보내시어 마음 상하셨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진정되시거든, 다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흠흠. 그래 주시겠소?”

“물론이지요. 좀 전에는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말을 아끼었으나··· 처음 뵌 아버지께 부모의 정을 느끼기란 다소 어렵더군요. 저보다는 외려 어른들께서 더욱 각별한 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연 인사할 자리쯤은 마련해드려야지요.”

금비설은 저들의 얼굴에 드리운 불안감이 얼마간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비설이 제 아버지 일로 앙심을 품을까 하던 염려가 해소된 덕이리라. 

그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금비설은 다짐했다.

기필코 네놈들 머리 꼭대기에 서 주마. 

주단 금씨는 여타 세가와 달리 종주 직에 특별한 권한이랄 게 없었다. 금비설은 종주에 오른 후 모든 권력을 제게로 모을 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목표는 같다. 다만 그 이유는 변했다. 

전에는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한 놈들을 양껏 비웃어 주려 했으나, 이제는 다르다. 반드시 저 가증스러운 놈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걸 처절히 무너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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