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 물음에 아무개는 조금 당황했다. 극악무도한 저주를 내린 마두가 아니라, 흡사 정인을 노린 불한당을 경계하듯 한 언행이라.
“어··· 나는, 그러고 싶은데···.”
제힘으로 해원을 당해 내기는 무리임을 안다.
아는데. 참말 아는데도··· 속이 들끓었다. 저 망할 놈에게 한 방 먹이지 않고는, 악몽이 아니라 화병으로 잠 못 이룰 것 같았다.
한데 그 망할 놈이 하필 술사의 동생이다. 몰래 한 나쁜 짓을 들킨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아무개에게. 다정한 음색이 내려앉았다.
“가고 싶으면 가야죠.”
어?
놀란 아무개가 고개를 빼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술사가 피식 웃었다.
“벌써 잊었어요? 서운하네.”
약조했잖아요.
“원하는 곳 어디든, 반드시 데려다드리겠다고.”
분명 그리 말한 적 있다. 해운 하씨 종가와 주단의 장승, 수호령인 칠교 남매에게 연달아 출입을 거절당하고. 작은 초가집에 나란히 누워서.
그가 동백꽃을 접어 준 날이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길을 여는 것 하나는 잘해서요.”
그의 등 뒤로 하얀 부적이 비상하는 새처럼, 널리 흩어졌다. 차르륵··· 종이가 닿은 곳마다 뒤죽박죽 섞인 공간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술사가 한 보 물러섰다.
“가세요.”
아무개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저를 가로막은 설원이, 사막이, 바다가 사라진다. 모양이 맞지 않는 조각을 억지로 짜 맞추듯, 얼기설기 이어붙인 땅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앞으로는 누가 막아서든, 개의치 말고 아무개 님 마음대로 가세요.」
한 발 한 발. 아무개가 향하는 곳마다 반보 앞선 백지 부적이 축지를 걷어 내고 본래 창성의 정경을 되돌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다드릴게요.」
어느 순간, 아무개는 달리고 있었다.
팔랑팔랑 종잇장이 파도치듯 천지를 휩쓸었다. 하얀 부적의 포말이 훑은 자리는 시전의 상점과 가택, 잘 다져진 도보로 회귀했다.
— 수호지신께서 당신의 앞길을 열어 주길.
잊혀진 사원의 축언이 불쑥 떠오른 까닭은, 그 축언이 실제가 된 탓일까.
배다른 형제가 지척에서 경쟁했으나, 형이 앞섰다. 이백여 년의 간극을 고작 며칠 새 넘어선 것이다.
아무개는 승리를 직감했다.
술사가 열어 준 궤도에 오른 몸체가 유연하게 작동했다. 금이 간 손등은 따끔하며 옅은 핏기를 비쳤다. 전신을 침식하던 저주가 꼬리 말고 도망쳤다.
이제 아무개가 하려는 것은, 생사를 건 위험천만한 전투가 아니었다. 확인 사살이다.
혼자일 땐 멀게만 느껴진 거리가 지금은 무척 짧았다. 해원이 축지로 난장을 쳐 둔 지형을 되돌린 덕이다. 혹은··· 술사가 은근슬쩍 길을 줄여 주었을는지도.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난 수백 년간 이 땅에 끔찍한 저주를 내린 이가 목전에 있고.
콰직—!
놈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다는 것이므로.
전신이 흉기나 다름없는 귀장군의 몸으로. 해원의 안면을 있는 힘껏 갈겼다.
달려온 가속에 체중까지 싣자 놈의 얼굴이 뒤로 꺾이듯 젖혀졌다. 상체가 기울더니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살과 살이 마찰하는 차진 소리가 아닌, 단단한 기물이 부서지듯 묵직한 타격음.
해원이 맞은 부위를 감싸며 고개 숙였다. 아무개는 놈의 멱살을 쥐고 억지로 일으켰다. 숨기려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해원의 얼굴 절반이 부서져 깨졌다.
「아무개 님. 흉신으로서 어떤 권능을 가지고 계시나요?」
언젠가 술사의 물음에 답했더랬다.
「내가 직접 겪은 재액을, 조금··· 돌려줄 수 있어.」
한이 맺혀 죽어서도 타계(他界)하지 못하고 저승길을 돌아 나온 원혼. 그 죽음의 요인인 재액을 되갚아 주는 것이야말로 흉신의 진정한 권능이다.
또한 흉신을 이룬 원령 가운데엔, 도자역 희생자가 허다했다.
“네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역겨운지, 너도 겪어 봐.”
아무개의 저주는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인 술사의 묵시적 허락 아래 이뤄진 것.
하여 기존의 도자역과 완전히 같을 순 없었다. 가장 큰 차이는 확산성. 저주에 걸린 이를 돕기만 해도 같은 저주가 옮는, 전염의 연쇄를 끊고 오직 목표한 이에게만 깃드는.
해원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듯도 했으나, 사전에 봉쇄당했다. 형의 권능이 아우를 넘어 인근 지역 모두 술사의 권역이 된 까닭이다.
덕분에 아무개는 방해받지 않고 맘 편히 놈을 작살낼 수 있었다. 얼굴 절반을 으깼으니 남은 반쪽도 공평하게 만들어 줄까. 참, 그 전에 왼팔부터 뜯어 놓아야지. 억눌러 온 흉신의 포악한 성정이 간만에 활개 치려던 찰나.
털썩-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돌아본 아무개는 화들짝 놀랐다. 술사의 왼 소매가 온통 피로 젖어 든 것이다.
실금이 간 아무개의 손등에도 옅은 핏기가 감돌았다. 하물며 팔이 통째 떨어져 나간 술사는, 도자역이 물러가면······
무릎걸음으로 버티는 술사의 삿갓이 어슷했다. 남은 손으로 왼팔의 단면을 움켜쥐었으나, 지혈될 것 같진 않았다. 무섭도록 쏟아진 피가 소매를 적시다 못해 뚝뚝 흘러 바닥에 고일 지경이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아무개는 해원을 팽개치고 술사를 향해 돌아섰다. 서둘러 그에게 가려는데 덥석, 발목이 잡혔다.
그림자에서 나온 손이 아무개를 붙잡았다.
— 어디 가?
하나로 시작된 손은 수십으로 늘어 아무개의 사지를 비롯한 전신에 들러붙었다.
— 가지 마.
— 여기 원수가 있잖아. 도자역의 원흉.
— 이놈부터 죽여야지. 어딜 가려고?
비교적 분명한 의사를 지닌 듯하던 그들은, 차츰 증오와 원한에 매몰되어 갔다.
— 죽어죽어죽어죽어······
— 제발, 살려 줘···!
보다 잔인하고 가혹하게 짓밟으라는 살의와, 살고 싶다 살려 달라 애걸복걸이 혼재하는 아우성.
죄다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이거, 놔···!”
술사님이 피를 한 됫박은 쏟고 있는데. 원한이고 복수고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조바심이 나 미칠 것 같은 아무개와 달리. 과거 한철에 매몰되어 그 시절에 멈춘 원혼들의 뜻은 달랐다.
— 키아아이악······!
귀곡성이 짙어졌다. 아무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검은 손이 종국엔 시야마저 가렸다. 더는 술사님이 보이지 않자 아무개는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났다.
“이, 것들이···.”
이를 악문 아무개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복수가 하고 싶으면··· 직접 해!”
원혼을 잘라 낸 것이다.
전부는 아니다. 오랜 세월 이 땅을 괴롭힌 저주를 극히 증오하는, 일부 원혼.
하나 일부라도 저 자신을 구성하던 까닭에.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부위를 잘라 낸 것과 흡사했다. 몇몇 원혼을 떼어 내자 전신을 휘감은 어둠이 한결 옅어지고 살가죽이 생으로 뜯기듯 시큰한 고통이 일었다.
그 덕에 술사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아무개는 그에게 달려갔다. 거리를 좁힐수록, 비릿한 혈항이 코끝에 진동했다.
술사 앞에 주저앉자마자 옷자락을 찢어 냈다. 피 흐르는 단면 위쪽 상완부를 힘껏 조여 묶어 지혈했다.
“괜찮겠어요?”
아무개가 떼어 낸 일부 원혼이 해원에게 들러붙었다. 음산한 귀기에 뒤덮인 해원은 검은 덩어리처럼 보였다. 술사가 그를 눈짓했다.
“도련님을 상대할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요. 작정하고 숨으면 저도 찾기 힘들어서요.”
“······상관없어.”
복수가 주목적인 건 원혼들이지 아무개가 아니다. 아무개는 처음부터 술사를 위해 놈을 없앨 심산이었다.
무어, 만족스럽진 않으나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원한에 매몰된 혼령은 아무개에게 그랬듯, 반쪽짜리 군주에게도 지독한 밤을 선사할 테니.
잠 못 드는 악몽을 계속해서 풀고 또 풀어낼 테지. 그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술사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눈매를 설핏 찌푸릴 뿐이었다. 입가에는 습관적인 미소마저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반면 지혈하느라 피투성이가 된 아무개의 손은 볼썽사납게 떨렸다. 능숙하고 꼼꼼하게 지혈했으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귀장군의 몸에 밴 습관이 무의식중에도 알아서 척척 진행했을 뿐.
“아아, 사라졌다.”
술사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 과연, 해원의 기척이 없어졌다.
“정말 괜찮겠어요?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그러지 마···.”
아무개의 눈매가 발갛게 물들었다. 물막이 아롱거리는 시선을 들자 그를 본 술사의 입꼬리가 언뜻 굳었다.
잠시 아무개를 가만 보던 그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반쯤 굴리고는 의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실은 허세였어요.”
“···? 뭐가?”
“쫓아가자는 거요. 당장 추격전을 하기에는 여력이 다소 부족하네요.”
하하, 웃는 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해원과 장시간 경쟁하느라 지쳤을 테지. 그런 주제에 아무개가 뒤쫓고자 하면, 내색 않고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냈으리라.
이래서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곤란하다.
“이만 돌아갈까요.”
지혈을 마친 술사가 일어서던 중 살짝 비틀거렸다. 아무개는 소스라치며 그를 부축했다. 창백한 안색의 그가 아무개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왔다. 곧 그들 또한 사라졌다.
“흐음. 난감하네요.”
축지로 창성에서 벗어났으나, 저자도가 아닌 엉뚱한 곳에 와 버렸다.
“영역을 급히 확장시킨 탓에 거리 감각이 이상해졌어요.”
걸음을 뗄 때마다 풍광이 휙휙 변했다. 울창한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 울음이 들리는가 하면, 새하얀 설원에 나란히 첫 발자국을 찍기도 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자 모래사막에 발이 푹푹 빠졌다.
숨 쉬듯 손쉽게 해내던 축지술이 오락가락했다. 술사는 나직이 탄식했다.
옛날 언젠가 이 같은 적이 있었더랬다.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맥없이 비틀비틀. 닷 살 어린아이가 하룻밤 새 성인이 된 양, 급속도로 확장된 감각에서 비롯한 괴리. 종잡을 수 없는 거리감에 속수무책으로 떠돌기만 했다.
한 가지 그때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정말 곤란하네요.”
다환은 넓고 대륙은 더더욱 넓다. 인간의 지각을 아득히 넘어선 공간감. 해원의 영역을 차근차근 갈취하여 제 손에 넣던 그는, 실로 난처해지고 말았다.
어릴 적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법 모난 구석이 있었다. 하나 대지의 군주를 계승하고부터는 고슴도치마냥 삐죽 세운 가시를 전부 뽑아냈다. 모난 구석을 자르고, 깎고, 도려내 마모시켰다. 혹여 실수라도 누군갈 해치지 못하게끔.
아무개의 생각처럼 다정하고 상냥해서가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다.
물의 군주가 실연하자 그의 영지인 북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이로 인해 빚어진 전란을 몸소 겪었다. 대지의 군주가 몸부림치자 온 땅이 무너졌다. 물의 군주의 진노를 받은 북방은 지금껏 차디찬 동토로 전락했다.
이 세계의 근원은 그토록 강대하고도 연약했다.
그 무거운 짐이, 제 어깨에 지워졌다.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면, 느끼는 바가 달랐을는지도. 하나 평생 인간의 삶만 겪은 그가 무슨 수로 다른 존재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저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보다는 세상을 존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체계로 취급했다. 분노와 슬픔, 증오 따위의 부정적 심상을 거세하고 의도한 인격을 조형했다. 어떤 상황 속에도 그의 심상은 정적인 명경지수로 남을 수 있게끔. 희로애락이 비대칭으로 치우친, 감정적 불구로.
그리하여 원수에게 복수를 다짐하던 소년은, 저를 짓밟으려는 이조차 가벼이 웃어넘기는 어른이 되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어쩌면 좋죠.”
감정에 휩쓸리는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하여 마음만은 줄 수 없다 못 박았건만.
“또 실패할 것 같아요.”
숱한 실패를 겪은 망국의 수호신은 예감했다. 이번 방어전도 처참히 패배하리라는, 불길한 미래를.
······어쩌면, 이미 함락당했을지도.
“···? 뭐가···?”
아무개는 영 뜻 모를 소릴 하는 술사를 멀뚱멀뚱 보았다. 핏자국이 점점이 튄 흉신의 살벌한 낯이 어여뻐 보였다.
아주 제대로 맛이 갔군.
제 상태를 자못 객관적으로 판단한 술사가 피식, 맥 빠진 웃음을 흘렸다.
“나쁘지 않네요.”
실상은 극악했다. 그는 팔 한 짝이 날아갔으며, 아무개도 제 일부를 도려내 버렸다.
중구난방인 축지술 탓에 귀갓길은 멀고 험했으며, 서로 의지하지 않고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진이 빠졌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니. 실성한 건가.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잠깐 손 좀 주실래요?”
고개를 갸웃한 아무개는 그를 부축한 오른손 대신 왼손을 내밀었다. 그 약지에 두고 간 반지를 도로 끼워 주며 술사가 당부했다.
“앞으론 제 허락 받고 빼셔야 해요.”
알겠죠?
다정한 어조로 생글생글 웃으며 청하는데도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아무개는 움찔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팔랑팔랑 백지 부적이 두 인영을 뒤따랐다. 나부끼는 모양새가 마치 백기를 흔드는 양했다.
예정된 패배를 향한 동행이 사뭇 기꺼웠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