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33)화 (133/138)

133화

석소오는 즉시 물러섰다. 

아무개의 발밑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 그것은 수백의 눈(目)인 듯했고, 수천의 입(口)인 듯싶기도 했다. 혹은 그 이상의 무수한 손(手)과도 닮아 있었다.

무어라 콕 집어 형용하기 어려운 형태로 파도처럼 쉼 없이 일렁이는 그것을, 아무개가 짓밟았다.

“시끄러워.”

시작도 전에 기운 빼지 말라고, 아무개가 짜증스레 윽박질렀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석소오를 힐끔 돌아보며 선심 쓰듯 툭 내뱉었다.

“여기서··· 멀리 벗어나. ······괜히 휩쓸리지 말고.”

쓸모를 다한 인간을 떨궈 낸 아무개가 홀로 걸음을 내디뎠다.

「위험한 짓은 안 돼요.」

당신을 괴롭히는 것 모두 없애 버리겠다는 흉신의 맹세에, 술사는 그리 타일렀다.

「저를 위해서라도 마찬가지예요.」

아무개의 심경이 다소 난폭하게 변한 것을 느껴 그랬을는지도.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아무개 님은 종종 극단으로 치달을 때가 있어서, 혹여 그럴까 염려되네요.」

반지가 사라진 검지는 허전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술사가 준 반지는 원혼을 억제하는 효능도 더한 까닭에. 

놈들과 함께 싸우기로 한 이상, 반지는 낄 수 없었다.

「어디 가지 말고······ 옆에 있어요.」

당부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아른거렸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창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높다란 전각으로 직진했다. 길이 없어도, 우뚝한 집채와 담장이 막아서도 개의치 않았다. 숱한 장애물을 뛰어넘어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 흉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디서 이리 흉흉한 사기(邪氣)가 들어왔나 했더니···.”

영화단주, 율해경.

전각의 대문을 등지고 선 율해경이 아무개를 마주했다.

“이건 단일 개체가 지닐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넌 뭐냐?”

“비켜.”

그를 스치듯 훑은 아무개가 스산한 어조로 선언했다.

“내 용건은··· 율해원이야.”

낯선 이에게서 해원의 이름이 불린 순간, 율해경의 낯이 삽시에 굳었다.

영화단이 창성에 자리 잡은 이래. 대지의 군주 다화련이 아닌, 율해원을 찾은 이는 처음이었다.

이쯤 되면 어디까지 알고 왔나 확인해 봤자 부질없는 짓일 터. 자세를 바로 한 율해경이 한층 진중하게 되물었다.

“무슨 용건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고개를 비딱하게 꺾은 아무개가 스스럼없이 답했다.

“죽이려고.”

율해경은 놀랐다. 대담하게도 주인집 마당에서 살인을 예고하는 미친놈보다도, 그 선언이 퍽 놀랍지도 않은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이미 오래전, 내심 예견했던 걸는지도. 일면식도 없는 이가 대뜸 율해원을 죽이겠다며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이런 날을 말이다.

“······그래.”

창성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율해경이 깊은숨을 토해 냈다.

“그럴 만도 하지. 놈이 저지른 짓이 있는데.”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던 율해경이 씁쓸히 토로했다. 하나 곧 표정을 달리한 그가 싸늘히 고했다.

“복수가 목적이라면, 나부터 쓰러트려야 할 거다. 나는 그놈 공범이나 다름없으니.”

아무개는 스스로 공범이라 밝힌 이를 살폈다. 이 자가 화왕이 언급한 ‘율해원 곁에 있는 썩 괜찮은 조력자’일 테지.

“네가··· 도자역 퍼트렸어?”

“······뭐?”

“아니잖아. 그럴 능력은 못 되니까.”

율해경의 낯이 일그러졌다. 아무개는 그를 보면서도 덤덤했다.

“이 땅에······ 도자역이, 영원히 남길 바라는 게 아니면··· 비켜.”

복수 의사가 아주 없지는 않다. 흉신의 원혼 중 상당수는 도자역 희생자였고, 그들의 뿌리 깊은 증오가 아무개에게도 깃든 까닭에.

하나 아무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술사다. 그 외에는 모두 곁가지에 불과하니.

“그래, 그래. 비키라잖아.”

일순, 그들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귀장군의 육신으로도 접근을 감지할 수 없는, 축지술 특유의 표홀한 기척. 

율해경의 어깨에 손을 걸친 상대가 아무개를 훑었다. 그 입꼬리가 이죽거리듯 비틀렸다.

“이건 또 뭐야. 조잡한 영혼끼리 잘도 기워놨네. 누더기가 따로 없잖아?”

아무개의 실체를 단숨에 간파한 그가 빈정댔다. 율해경은, 아무개를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리만치 와락 표정을 구겼다.

“야! 초면에 무슨 말을 그렇게···!”

“넌 이만 빠져.”

검지 끝마디로 해경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내며 그가 나섰다.

“너도 도자역은 거북하잖아? 잔소리 듣기도 귀찮아 죽겠다.”

“······그건, 하지만 너도···!”

상대는 아무개를 모르는 듯했으나, 아무개는 곧장 알아봤다. 어두운 지하 공동에서 술사를 공격하던, 그 얼굴을 잊을 리 없으니. 

그날 누가 팔을 잃었는데. 

아무개는 녀석의 왼손을 확인했다. 오른손에 비해 반쯤 토막 난 엄지손톱. 물어뜯는 습관은 여전히 못 고친 모양이지. 확실하다.

이놈이 율해원이다.

“······—!”

표적을 확신한 순간, 섬뜩한 살의가 흘러나왔다. 

율해경을 비롯해, 흉신의 범위 안에 놓인 모두가 가위에 눌린 양 전신이 조여들고 귀가 먹먹하게 울리는 듯한 이명을 들었다. 정신은 깨어 있되, 몸은 마비된 듯 굳어 옴짝달싹 못 하는 가운데 살갗을 바늘로 쑤시듯 살기가 따갑게 찔러 댔다.

“이것 봐라?”

아무개의 살기를 맞닥뜨린 해원이 눈썹을 치뜨며 가볍게 튕기듯 손짓했다. 

해원을 중심으로 지면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크게 넘실거렸다. 해일처럼 일어난 땅이 길게 늘어지며 아무개를 성벽 말미까지 단숨에 밀어냈다.

축지로 땅을 접을 수 있다면, 반대로 잡아 늘리는 것도 가능한가. 

적의 능력을 파악한 아무개가 원혼들을 해방했다.

— 키이아아악···!

섬뜩한 귀곡성이 창성에 널리 울려 퍼졌다. 

새까만 어둠은 아무개가 밀려난 거리 만큼,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해원과 해경이 각각 좌우로 몸을 돌려 피했다. 그 사이를 뚫고 나아간 어둠이 전각에 부딪혔다.

콰아앙! 높은 대문과 이어진 담장이 반파되며 무너졌다. 해경이 질색하고 해원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담겼다.

그들 가운데 아무개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홀연히 피어난 아무개가 해원에게 발뒤축을 꽂아 넣었다. 해원이 두 팔을 사선으로 교차하며 공격을 막았으나,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 감긴 어둠이 포탄처럼 터져 나갔다. 해원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아무개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무너진 정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선 즉시 해원을 몰아붙였다. 

예까지 오는 동안 석소오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다. 상대는 땅을 수족처럼 자유로이 다루고, 그를 대신해 싸울 인형을 무수히 빚어낼 수 있으며, 땅 아래 금속을 모아 재련도 않고 형태를 가공할 수 있다고. 

‘그럼 단순히 지면뿐 아니라···’

휘이익! 사방팔방 날아드는 기왓장을 검은 손들이 낚아채 으스러트렸다.

‘···이런 것도, 조종할 수 있겠지.’

기와는 흙으로 반죽하고 구워 낸 기물이니.

이래서 따로 무기는 챙기지 않았다. 상온에서 금속을 고체와 액체로 넘나들며 자유로이 갖고 노는 녀석한테 냉병기를 휘두르는 건, 날 잡아 잡수라는 뜻이잖은가.

쾅, 콰과광—···!

율해원은 계속해서 전각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아무개는 벽을 부수고 담장을 내달리며 추격했다. 막 안뜰로 착지하려던 찰나.

“그러고 보니 확인을 안 했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붕 위 용마루에 걸터앉은 해원이 아무개를 내려다봤다.

“날 죽이러 왔다지? 이유가 뭐야. 역시 도자역?”

아무개는 놈이 앉은 지붕 아래 기둥을 박살 냄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조각난 파편이 흙먼지를 뚫고 어지럽게 튀었다. 원혼의 귀곡성을 벗 삼아 아무개의 음울한 어조가 나직이 울렸다.

“······내려다보지 마.”

눈알을 파내고 싶어지니까.

“하, 정신 나간 놈이군.”

지탱하던 기둥이 부서지고 지붕이 내려앉기 전, 높이 뛰어오른 해원이 일갈했다.

“진정으로 날 이길 수 있다 생각해?!”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해원에게. 검은 손들이 접목하듯 서로에게 이어 붙으며 뻗어 나갔다.

“······어.”

아무개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새까만 손들이 체공 상태의 해원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콰앙, 쾅, 쾅, 콰광—···! 

해원이 날아가며 부딪힌 벽이 수차례 부서지고, 연달아 큰 구멍이 뚫렸다. 

그림자에서 돋아난 검은 손들이 아무개를 던지듯, 하늘 높이 밀쳐 올렸다. 직후, 아무개가 있던 지면에서 무수한 가시가 우수수 솟구쳤다. 

벽을 무너트리고 건물마저 꿰뚫은 가시가 근방을 뒤덮었다. 시야 범위 내에 멀쩡한 평지가 남아나질 않았다.

“······망상이 지나친데.”

해원의 음성이 지척에서 들렸다.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 너머. 유독 높게 솟은 가시의 첨단을 딛고 선 녀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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