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아무개는 원혼을 갑옷처럼 전신에 휘감을 셈이었다. 병풍 속에서 태어나 빚어졌을 당시 그랬듯.
여느 때처럼 힘으로 억압하고 강제하여 뜻한 대로 다룰 수도 있다. 하나 그런 방식으론 한계가 명확했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원혼들은 고삐가 느슨해진 순간 제멋대로 굴 테니.
교전의 흥분이 극에 달하면, 자칫 이성을 잃고 그들의 악의와 절망에 동화되어 버릴 위험마저 있었다. 옛날 만물점에 서신을 전하러 온 심부름꾼 아이에게 그러했듯이.
외부의 적을 두고 내부에 분란의 여지를 방치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하여 아무개는 잠시나마 원혼들과 협력하기로 했다.
“······도와줘.”
원혼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아무개라고 이 상황이 맘에 찰 리 없으니.
녀석들은 아무개의 태생적 근원인 동시에 살아가는 한 영원히 싸워야 할 적이었다. 율해원이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평생의 적에게 손 내민 셈이다.
“나 말고, 술사님을.“
일순 원혼이 잠잠해졌다.
“너희도 봤잖아··· 술사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개는 원과 한으로 이루어진 영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빚 갚는 거 좋아하지? 살생하고 해악을 끼치려는 것도··· 너희가 받은 고통을, 되갚아 주려는 거잖아.”
술렁이는 원혼을 향해. 아무개가 선언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두가, 적어도 한 번은 술사님께 목숨을 빚졌어.”
숨 쉬는 공기, 해갈할 물, 내딛는 지면, 따스한 빛.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향유한 것들.
그러나 술사는 지금도 홀로 대지를 지탱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 속 당연시한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희생과 선의를 바탕에 두었음을 깨달은 순간.
“갚아, 너희도.”
아무개는 양심에 호소하지 않았다. 원한만 남은 귀령에게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목숨 빚을 수금하러 온 무뢰배인 양, 억지를 썼다.
저를 둘러싼 원혼들이 어수선했다. 아무개는 냉담한 눈으로 까마득한 어둠을 주시했다.
역시 안 되려나. 이지가 흐려지고 악의만 남은 원혼에게 협조를 구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던 걸까. 결국 내부의 불안을 남겨 두고 싸워야 할까. 상념을 이어 가던 찰나.
무언가 보였다.
악을 쓰며 소요를 일으키는 원혼들 가운데. 작디작은 혼 하나가 암흑에서 빠져나왔다.
아무개를 마주 보고 선 그것은, 전신에 금이 간 도자역 환자였다. 절벽에서 떨어진 듯 얼굴은 물론 전신에 성한 곳 없이 산산이 조각난 아이.
주단의 거지 꼬마.
남장을 하고 술사를 형님이라 부르던 아이였다.
최초의 이탈자가 발생하자 사방에 드리운 어둠이 동요하며 들끓었다. 그에 기름을 붓듯, 또 다른 혼이 걸어 나왔다.
차륵, 차르륵···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 아무개는 두 번째로 나선 이를 목도했다. 양팔에 구속된 사슬을 길게 늘어트리며 다가온, 목 없는 원혼. 귀장군 백운이다.
잇따라 나선 원혼이 보였다. 긴 머리를 산발한 채 손에는 낫을 든 여인. 애금이다.
바닥을 기는 적안장군. 도끼를 든 백정 소년. 그 밖에 자못 익숙한 원혼이 하나둘 앞으로 나왔다. 그 수가 점차 늘더니 어느덧 일일이 셈하는 것조차 난해할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생전 유랑술사 혹은 수호지신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자들이다.
한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가, 원과 한으로 가득 찬 혼을 어둠에서 끌어냈다.
“저깁니다.”
새까만 흑의의 영화단원은 높은 성벽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웅장한 전각을 가리켰다.
“단주님께서 화원보다도 각별히 신경을 쓰는 곳입니다. 일반 단원의 출입을 엄금하죠. 만약···.”
잠시 머뭇하던 영화단원, 석소오가 첨언했다.
“만약, 당신의 말대로 군주께서 창성에 머물고 계신다면. 분명 저곳일 겁니다.”
낯선 외부자, 아무개에게 창성의 지리를 알려 주며 석소오는 얼마 전 일을 회상했다.
여느 때처럼 연무장에서 신체를 단련하던 중이었다. 땀에 전 웃옷을 훌훌 벗고 신중히 정권을 내지르던 찰나.
차르르륵— 종잇장이 날아들더니 어깨에 찰싹 붙었다. 그 즉시 멀찌감치 축지당했다.
어리둥절하여 돌아보니 모두들 각자 용무 중에 축지당했더랬다. 황망하고 어이가 없는 와중 누군가 말했다.
「결계다.」
일렬로 너른 고리를 이룬, 백지의 행렬.
그들 모두 고리 바깥에 있었으며, 어느 누구도 고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대관절 어찌 된 영문인지. 상황 파악조차 어려워 난감해할 무렵, 한 단원이 종이를 가리켜 일컬었다.
「혹시 백지 부적 아니야? 유랑술사가 성명 절기처럼 사용하는 그거!」
삽시에 소란이 일었다.
유랑술사가 어인 일로 창성까지 와서는, 사람을 죄 쫓아내냐는 의문부터 그가 이리 막대한 권능을 지녔을 리 없다는 불신까지.
토론이 본격적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재차 결계가 이동했다. 창성 밖 멀지 않은 곳. 산과 들 뿐인 너른 평원으로.
단원들은 결계를 쫓았다. 뚫고 들어갈 수는 없어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있었으니.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확인해야 했다.
그날, 단원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지면이 수차례 뒤집히고 솟구쳤다. 검붉은 지맥이 토룡처럼 하늘 높이 머리를 들더니 서로를 휘감으며 무너졌다. 그 자리에는 산이 하나 생겼다.
인간의, 일개 술사의 교전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재해였다.
단원들 중에는 먼 곳을 감시하거나 탐지할 수 있는 능력자도 더러 있었다. 그들의 일설에 따르면, 이 모두가 고작 두 인영이 싸운 결과라 했다.
「삿갓을 보니 한 명은 유랑술사 같아. 상대는 누군지 모르겠네.」
「유랑술사는 주로 회피하는 편이군. 상대 쪽에서 땅을 조종하는 듯싶은데··· 얼굴이 낯설어. 초면이야.」
「이런 실력자가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無名人)이라니? 말도 안 돼!」
경이로운 전투에 압도당한 단원들은, 뒤늦게 교전 양상을 분석했다.
「실력은 무명인이 한 수 위인 것 같지?」
「당연하지! 땅을 두부 썰 듯 반듯이 가를 때도 놀랐지만, 토인을 제조할 땐 경악했다고. 심지어 움직이는 토인을, 저리 찍어 내듯 만들다니.」
내가 유랑술사였으면 바지에 지렸을 거라고, 노골적인 언사를 입에 올리면서까지. 그들은 무명인에 대한 감탄과 공포를 토로했다.
그때. 창백한 안색으로 내리 굳어 있던 선배 단원이 츳, 혀를 찼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이리 보는 눈이 없어서야. 너희가 어찌 영화단에 입단할 수 있었는지 실로 놀랍구나.」
그 선배는 뛰어난 실력과 달리 험한 입으로 평판이 썩 좋지 않았다.
후배들이 눈치 보며 입 다물자 선배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부연했다.
「재해와 다를 바 없는 교전이 목전에서 벌어지는데. 흙먼지 하나 튀지 않는 게 정상이라 생각하느냐? 땅이 바둑판처럼 갈라지고 천지를 개벽하리만치 뒤집어엎는데. 희미한 진동조차 느껴지질 않잖으냐.」
흥분하여 끓어오른 후배들은, 선배의 지적에 뒤늦게 깨달았다.
「결계 때문이다.」
선배는 일렬로 둥실 떠다니는 백지 부적 한 장을 검지로 툭, 튕겼다.
「확실히 저 무명인은 대단하다. 편의상 무명인이라 지칭했으나, 필시 사람이 아닐 터. 최소한 어느 지방 영주 급에 달하는 대신령일 게다.」
그때 석소오는 자신의 본가, 강암을 떠올렸다.
강암의 상징인 다섯 손가락 형태의 기암 봉우리는 그들 가문과 오랜 연을 이어온 대신령, 암학이 언약의 증표로써 만든 것이었다.
허면 저 무명인은 최소 오대세가와 연을 맺은 대신령 급의 존재란 말인가.
「대신령에게 뒤지지 않고 맞설 자가 천하에 몇이나 될 성싶으냐? 어쩌면··· 유랑술사는, 단주님 이상의 실력자일지 모른다.」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단주님 이상이라는 건 좀······.」
「단주님께선 대지의 군주 다화련 님과 언약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어떤 술사가 군주의 계약자를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후배들의 반발에 선배는 거듭 혀를 찼다.
「화려한 눈속임에 넘어가지 마라. 보다 본질을 파악해.」
단순할수록 강하며, 언뜻 수수해 뵈는 힘이야말로 진정 두려운 것이다.
선배의 말은 석소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강암 석씨의 가훈을 정확히 짚어 냈기에.
강암의 비전술법인 석화(石化)는 신체를 돌처럼 단단하게 굳히는 기술이다. 단순하고 투박하나 숙련이 극성에 달하면, 전설로 여겨지는 금강불괴(金剛不壞)에 도달할 수 있다 하는.
「유랑술사가 이리 견고한 결계를 만드는 능력자인 줄 몰랐다만, 극히 난잡한 전투 중에도 일절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는 건 더욱 놀랍구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두 인영이 무너진 지반 너머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부적의 고리가 급격히 줄어들며 한 점으로 모였다. 하늘 높이 원을 그리며 날아드는 부적의 행렬은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연상케 했다.
이윽고 영화단주가 나타나며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신입단원인 석소오로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운, 까마득한 단주님은 전 단원에게 귀가를 명했다.
그 후로 지금껏.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단원들이 그날 일을 복기하며 토론했다. 석소오는 갑작스러운 전보를 받고 잠시 창성을 벗어났다.
「오라버니.」
그를 기다린 것은, 막냇동생 소영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끈덕지게 붙어 다니던 염재효마저 떼놓고 홀로 나온 소영이 전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도자역이 실은 군주가 내린 저주라는 것도, 주단 금씨의 진상도, 모두 놀라웠다.
하나 무엇보다도 그를 충격에 빠트린 것은, 유랑술사가 맞선 무명인이 대지의 군주 다화련이라는 점이다.
날고 기는 영화단원 모두를 경악케 한 교전은, 실상 작디작은 축소판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니.
아무개가 왕 살해 의식과 율씨 형제의 계승에 관해서는 함구한 탓에. 소영과 재효는 대지의 군주가 세대 교체한 것을 알지 못했다. 비정상적인 전승으로 힘의 균형이 뒤틀린, 불완전한 반쪽짜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화련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 공감했다. 과거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흉신을 봉인하고자 유랑술사와 맞섰던, 그때의 근성은 아직 여전했다.
소영에게 설명을 들은 석소오는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형님들이 이런 이야길 했다면 헛소리로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한다며 무시했을 테지. 하지만 그는 얼마 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전투를 먼발치에서나마 목도했다. 하물며 발화자가 석소영이다.
석소오는 막냇동생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암석을 빚어낸 듯 진중한 소영은 어릴 적부터 생각이 깊고 신중하여 고민이 길었다. 그런 만큼, 결단을 내리고부터는 가족 중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신속했다.
그런 소영이 군주를 막아야한다 했다. 설령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라도. 대의를 위해.
소영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석소오는 집안의 암묵적인 규율을 떠올리곤 한숨 쉬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겨우 탈출하나 싶었더니만. 결국 이렇게 첩자 노릇이나 하게 생겼으니.
“한데 참으로 혼자 가시렵니까?”
석소오는 미심쩍은 기색을 감추고 물었다.
소영이 소개해서 만났다만··· 아니, 그걸 소개라고 해도 되려나.
「도움을 주면 도자역이 옮는다고? 그럼 설마 소영이 너도···.」
석소오의 물음에 소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를 끝마친 동생 앞에서. 차마 오라비가 되어서는 발 빼겠다 할 수도 없어 어물거리던 찰나.
「일이 계획대로만 풀리면··· 어차피 저주도 끝나.」
이 사람, 아니 ‘이것’이 나타났다.
「······무섭고 안 내키면, 지금 꺼져. ···괜히 발목만 잡으니까.」
그는 길 안내 외에 모든 협조를 거절했다.
소영의 설명에 따르면, 유랑술사가 끼고 다니는 존재라던데. 그리 든든한 아군을 두고 어찌 홀몸으로 온 건지.
상대는 대지의 군주 다화련이다. 오대세가를 비롯한 다환의 모든 술사가 나서도 모자랄 판에. 단독으로 뭘 어찌하겠다는 걸까?
“······혼자 아니야.”
— 키이이이익···!
그 순간, 반발하듯 아무개의 발치에서 먹물처럼 짙은 어둠이 터져 나왔다.
끔찍한 사기가 귀곡성과 어우러졌다. 마치 이 자리에만 차가운 밤이 내린 듯,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