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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30)화 (130/138)

130화

그는 딱히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시, 하고 수긍마저 했다.

“말해 줘도 돼요? 꿈 내용을 말하면, 효력이 사라지잖아요.”

술사가 되물었으나, 아무개는 개의치 않았다. 악몽 따윈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되든 관심 밖이다.

“······됐어, 이제.”

그는 일찌감치 눈치챘던 걸까. 그럼에도 베갯잇의 효력이 사라지지 않도록 부러 모른 척했나.

설령 짐작에 그쳤다 한들 몽중에 겪은 만물점주의 일화가 쐐기를 박았으리라. 눈치 빠른 그라면, 베개의 효능을 알아채고도 남았을 테니.

원하는 이를 꿈속에서 그리는 것.

이를 통해 베개를 베고 잔 흉신의 꿈도 헤아려 볼 수 있다. 아무개가 꿈속에서조차 보고파 할 이가 또 누가 있으랴.

“아직도 제가 좋아요?”

등에 이마를 맞댄 채 아무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광처럼 머리를 부비는 몸짓에 술사가 피식 웃었다.

“신기하네요. 그 꼴을 보고도 좋아할 수 있다니.”

환상이 깨졌으니 실망할 차례 아닌가,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자도에 당도하고부터 술사는 여러 면모를 드러냈다. 요리를 못하고, 미각과 후각에 장애가 있으며, 돈벌이로 공방을 운영했다. 손수 물질해서 종이를 만들고, 전답의 일을 도우며, 허름한 초가에서 묵기도 했다.

사대귀인 유랑술사는 신비로운 풍문과 달리 무척 소탈했다. 덕분에 아무개 홀로 꾸며 낸 환상이 번번이 깨졌더랬다.

그 모두가 술사의 의도였다. 언젠가 말했듯, 한낱 인간을 신격화하고 숭배해 봤자 결국은 파국일 따름이니. 그를 추앙하는 아무개에게 비루한 현실을 낱낱이 보여 주어 환상이 깨지게끔 유도한 것이다.

기실 유랑술사란 작자는 별 볼 일 없는 한낱 필부일 뿐. 네가 그리 따를 만큼 대단한 위인이 아니라고. 말로 설득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 줬다.

하나 아무개의 마음은 외려 그 의도를 양분 삼아 개화했다. 숱한 소문의 주역인 사대귀인 유랑술사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주목하게 되었으므로.

단지 유랑술사를 숭배하고자 했다면, 아무개는 그가 율해서임을 애써 부정하지 않았으리라. 외려 놀라운 업적이라며 우러렀을 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외환을 막아 내고 지형을 뒤바꾼 역사는, 신격에 걸맞은 고귀한 행보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무개는 싫었다. 그의 희생이 기껍지 않았다. 좀 더 이기적이고 자신을 위했으면 했다.

그제야 흉신은 깨달았다. 제 안에 고인 감정의 형태가 변했음을.

“나한테, 신은··· 술사님이야.”

“그러지 말아요.”

술사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신이라기엔 너무 형편없잖아요.”

신이 이리 무능하면 어찌하냐고. 당신의 신은 훨씬 유능해야 한다고. 

숨결에조차 스러질 듯 작은 소리로 그가 읊조렸다. 술사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개는 바닥에 늘어진 그의 왼쪽 소맷부리를 꾹 움켜쥐었다.

“······술사님. 여전히··· 죽고 싶어?”

이제는 안다. 그가 죽으려 한 연유도. 마음만은 줄 수 없다 한 까닭도.

북방의 지배자이자 물의 군주, 혹한의 대제가 실연하고 수년간 가뭄이 이어졌다. 전례 없던 대가뭄은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외국을 침범하고 약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로부터 이백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북방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사람이 살 수 없는 동토로 전락했다. 군주가 진노하였기에. 

그까짓 감정 때문에.

반면교사로 삼을 역사가 이리 버젓한데 어찌 같은 위험을 이 땅에 감당시킬 수 있으랴. 제 감정놀음 따위에 만천하가 휘둘리게 둘 수는 없었으리라. 

과거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지에게 그가 외쳤다. 설령 원치 않았다 한들, 이미 짊어졌으면 책임을 지라고. 

대지를 물려받은 그는. 원치 않았으나 이미 짊어졌기에, 책임을 졌다. 

그리하여 은장도를 목에 겨누고도 차마 죽지 못하고 다시 일어섰다. 이름 모를 작은 거지 꼬마를 위해.

「왜··· 여긴 멀쩡하지?」

아무개는 거지 꼬맹이를 통해 그를 본 적 있다.

「다른 지역은 모두 엉망인데···. 어째서, 여기만 멀쩡하지?」

반듯한 대로와 죽 늘어진 상가, 스쳐 가는 인파를 망연히 응시하던 소년의 의문.

수줍게 미소 지으며 나란히 걸어가는 연인. 칭얼대는 아이 손에 주전부리를 쥐여 주는 부모. 소리 높여 호객하는 장사치. 뻐근한 어깨를 풀고 기지개를 켜는 일꾼들.

「······하.」

여느 때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일별한 소년이 돌연 실소했더랬다. 

「하, 하하···.」

소년은 필시 일전에 목도한 광경을 떠올렸으리라. 무너진 황궁과 도심, 저잣거리.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방치된 시신을 쪼아먹는 까마귀 떼. 집을 잃고 산과 들로 내몰려 걸신들린 듯 인육을 먹어 치우던 사람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타지방에 비해 주단은, 원수의 땅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다환 전역이 지진의 여파로 몸서리치던 찰나, 주단의 술사들이 전력으로 막아 낸 덕이다. 이후에도 막대한 재력으로 일대를 안정화했다.

소년은 실패했으나, 그들은 성공했다.

「하하, 하하하하···!」

허리를 굽히고 실성한 듯 광소를 터트리던 소년이 돌연 웃음기를 거뒀다. 광적인 웃음마저 사라진 낯은 공허했다. 

꿈속에서 봤을 적 아무개는 그 눈을 안다 여겼다. 마음이 죽어 버린 자들이 그러하듯. 자기 자신을 포기하여 내비치는 망연함인 줄로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그가 포기한 것은 자신이 아닌, 복수였다.

뒤늦은 깨달음에 아무개는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다. 나의 원수가 다른 누군가에겐 은인일 수 있음을.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백 번의 선행으로 한 번의 악행을 갈음할 수는 없다. 선행은 선행대로, 악행은 악행대로. 명백히 구분 지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함이 마땅하다. 복수란, 상대의 선행은 배제하고 오직 내게 저지른 행위를 되갚는 것이다.

다만 소년은··· 율해서는, 그리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무고한 타인의 일상을 망가트릴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은장도는 진즉 손이 아닌 목을 관통했으리라.

“······죽으면 안 돼, 술사님.”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사인은 다정일 테지.

그러니 나는 당신이 무정해지길 바랄밖에.

“술사님은··· 좋은 사람이잖아. 타인을 위하고, 사람을 구하려 하지.”

난 아니야.

“나는··· 술사님 외에 다른 인간은, 싫어.”

이런 말 하면 그가 미워하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던 아무개는, 이내 말문을 열었다.

“술사님이 사라지면, 이 세상 따위 모두 망가트릴 거야.”

전심전력으로. 흉신의 위명에 걸맞은 최악의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술사님.”

협박이었다. 

날 막으려거든, 간신히 진정된 땅에 혼란이 거듭되고 재앙이 임하길 원치 않거든,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위협.

아무개는 술사의 짐이 되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하나 이번만은 그의 책임감에 기대어, 그의 삶을 강제로 연장하고자 했다.

과거의 당신이 세상을 위해 죽고자 했다면, 이제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도록.

“어찌 홀로 나와 있니.”

나른한 음색이 귓전에 울렸다. 

계단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웅크린 아무개가 힐끔 눈을 들었다. 화왕 모란이었다.

다른 놈이라면 무시했을 테지만. 모란은 술사의 스승이자 그의 유년 시절을 거쳐 간 어른 중 그나마 정상적인 보호자에 속했다. 아무개로서는 함부로 하기 다소 껄끄러운 이. 하여 순순히 답했다.

“내가 있으면··· 술사님은, 편히 아프지도 못해. ······괜찮은 척하느라.”

전신이 식은땀에 젖어 들고 가만있는 것조차 버거운 듯 연신 거칠게 호흡하면서. 어찌 신음 한 자락 흘려 내지 않을까. 참으로 지독한 사내였다.

“여전하구나.”

모란은 그리 평했다.

“나야 속 시끄러울 뿐이다만. 그 애는 적잖이 힘들진대.”

“······? 시끄러워?”

“들리지 않니? 이리 소란한데도.”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멀뚱 있으니 모란이 손 내밀었다. 창백하리만치 희디희었으나, 꽃물이라도 들인 양 첨단에 이를수록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손이다.

무심코 물러서던 아무개는, 화왕의 입가에 서린 옅은 미소에 멈칫했다. 

사제지간이라 그런가. 웃는 모양새가 어쩐지 술사님이랑 비슷한 것도 같은······

“···—!?”

모란의 붉은 손끝이 톡, 가볍게 이마를 건드렸다. 찰나의 접촉이었으나 그 잠깐 새 아무개는 현세와 다른 별세계를 오갔다. 

그곳에선 천지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부딪히고, 쓰러졌다. 비유하자면 자연재해와 같았다. 

이백 년 전 대지진으로 하룻밤 새 도시가 매몰되고 산이 쪼개지며 너른 평원이 구름 가까이 융기하던 시절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겉보기엔 언뜻 평온하나, 실상은 이렇단다. 아무래도 대신령쯤 되면, 각축의 격도 달라지기 마련이라.”

충격으로 멍해진 아무개를 두고 모란이 부연했다.

“일종의 땅따먹기인 셈이지. 천하를 두고 벌이는 거대한 한판.” 

각자 주도권을 두고 영역을 넓히는 알력 다툼. 화왕은 이를 마당놀이에 비유했다.

“이거···.”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킨 아무개가 되물었다.

“이거··· 술사님이 하는 거야?”

“물론.”

모란은 지체 없이 긍정했다.

“그간 해서가 제 몫을 방치한 탓에 해원이 실질적인 주인 역을 도맡았단다. 무주공산은 먼저 차지하는 쪽이 임자이니.”

하나 상황이 변했다. 율해서가 마음을 바꿨다.

“해원을 봉인시키고 그 틈에 주도권을 되찾을 계획인 듯싶구나. 당장은 봉인되었다 한들 해원이 그간 거느린 세월이 있으니 즉각 회수하기는 다소 까다롭겠지. 해원이도 가만 당해 주지는 않을 테니. 지난한 싸움이 되겠어.”

대지의 힘을 이은 두 계승자의 갈등은, 인체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뤄졌다.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아. 신령의 권능이란 제 권역 밖에선 극히 반감하기 마련이니. 해서가 이 땅을 차지하면, 권역을 잃은 해원의 영향력도 줄어들겠지. 자연히 도자역의 저주 또한 미약해질 테고.”

술사는 해원을 설득해 저주를 회수하기는 무리라 판단했다. 결국 노선을 틀어 해원의 영향력 자체를 무력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치만··· 그건, 술사님이 원치 않던 일이잖아···?”

이 땅의 주인이 문제라면, 주인을 바꿔 버리면 된다.

말은 쉽지. 술사가 이 땅의 유일한 주인으로 군림하고자 했다면, 지난 이백 년간 숱한 기회가 있었을 터다. 그럼에도 지금껏 무명의 술사로 남은 까닭이 무어겠는가.

그는 군주가 되길 원치 않았다.

“물론, 해서는 바라지 않겠지.”

그 애는 자길 ‘우연찮게 과분한 권능을 얻은 평범한 인간’이라 여기잖니. 화왕이 덧붙였다.

“스스로 정의한 인간성에서 벗어나는 행위 일체를 지양하지. 때론 강박적으로 자신을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짜 맞추는 느낌마저 든단다.”

유랑술사라 불리는 동안 대지의 권능을 단 한 차례도 쓰지 않은 건 그런 까닭이다. 대지를 다스리는 힘은 ‘인간적인 영역’에서 한없이 벗어났으니.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 낸 셈이다. 전신을 마비시킨 후 머리만 깨어 있는 격이기도 했다.

“원치 않았다 한들 결국은 해내겠지. 안타깝지만······ 그 아이는 원해서 한 일이 더 드물지 않니?”

상당히 쓰라린 지적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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