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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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가 눈 떴다. 물막이 한 겹 덮은 시야가 흐릿했다.
「특별히 원하는 꿈이 있으신지요?」
몽환전을 방문했던 날. 아무개를 따로 불러낸 꿈장수는 단둘이 이야기 나누었다. 꿈을 남에게 알려 주면 효력이 사라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다지.」
당시 아무개는 회의적이었다. 흉신의 악몽은 원혼에게서 비롯된 것인즉, 타고난 기질을 어찌하랴?
「에잉~ 이런 기회 흔치 않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쇼! 현실에선 불가능한 모오든 일이 꿈속에선 가능합니다요?」
그는 뭇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걸 줄줄이 늘어놓았다. 곳간 그득히 쌓인 금은보화라든가, 산해진미가 상다리 휘도록 차려진 밥상이라든가, 남몰래 흠모하는 정인과 맺어지기까지.
무얼 해도 아무개가 시큰둥하니 꿈장수가 한숨을 푹 쉬었더랬다.
「정녕 좋은 게 단 하나도 없습니까?」
아무개는 다 싫었다.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으나 본질은 흉신이다. 이 세상에 속한 무엇이든 흡족할 리 만무했다.
즉시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무개가 멈칫한 까닭은, 밖에서 기다리는 이가 떠오른 탓이다.
「···술사님.」
나는 술사님이 좋아.
······술사님만, 좋아.
「술사님이, 꿈에 나오면··· 나쁘지 않을지도···.」
조금이라도 괜찮다. 한순간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그가 악몽 속에 얼굴을 내비친다면, 아무개는 자신을 잃지 않을 터였다. 지긋지긋한 원혼들이 살아생전 비참한 나날을 일깨우며 한사코 충동질해도.
「원하는 이가 꿈에 나왔으면 한다는 게죠? 흠······ 좋습니다! 마침 제게 적당한 기물이 있습죠.」
꿈장수는 몽환의 신령이 자아낸 베갯잇을 주었다. 그 베개를 베고 자면, 매번 율해서의 꿈을 꿨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율해서와 유랑술사는 성격부터 표정, 말버릇까지 천양지차였으니. 관심도 없던 수호지신의 일대기를 목도한 아무개는 또 사기당했다고 이를 갈았더랬다.
한데 꿈이 이어질수록. 어쩌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어쩌면, 사기가 아닐는지 모른다고.
율해서가 술사님일는지 모른다고.
불쑥불쑥 의구심이 샘솟았으나, 아무개는 의식적으로 부정했다. 율해서가 술사님이라면, 그렇다면······ 너무 슬프잖아.
아무개는 그의 유년 시절이 행복한 가정에서 밝고 건강하게, 지금처럼 늘 웃으며 자라길 바랐다. 그에 반해 율해서의 삶은 극히 비참하고 척박하잖은가.
심지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조차 좌초되고 말았다. 원치 않는 이유로.
이렇듯 힘겨운 생애가 당신의 것이 아니길 바랐다. 지극히 이기적인 희망으로, 아무개는 모든 정황을 외면하고 부정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리 만무하건만.
다 타고 재만 남은 수면향을 물끄러미 보던 아무개는 창살 모양대로 스며든 빛을 따라 일어났다. 장지문을 열어젖히자 환한 햇살이 온통 찬연했다. 아무개는 아연실색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영화단주만 알아보려 했다면, 이리 지체될 까닭이 없다. 그는 유랑술사이자 수호지신이며, 대지의 계승자였으니.
무언가··· 뭔가 잘못됐다.
덜컥 겁이 난 아무개가 사당을 박차고 나섰다. 술사가 손 본 비석에 냅다 달려들어 술법을 시전하자 찬란한 광채와 더불어 숱한 점, 선이 쏟아졌다. 개중 홀로 붉은 점을 낚아채듯 움켜쥐자 천지가 뒤틀렸다.
축지술. 특히 먼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시 빚어지는 광경이었다.
“···뭐야?”
술법의 잔재로 일렁이는 지면에 바로 서기도 전에.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음색이 쩌렁쩌렁 울렸다.
“방해꾼은 꺼져!”
갑작스런 공세. 하나 천무지체라 불리던 귀장군의 육신은 살의와 적의에 즉각 반응했다.
무섭도록 응축된 신력이 방향을 바꿔 자신을 노린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보다 앞서 직감한 육체가 그에 대비하려던 찰나,
누군가 공격로를 가로막았다.
“무, 슨···!”
콰득—···!
직선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 낸 육신이 산산이 부서졌다. 간신히 형태가 남은 신체 일부가 날아와 아무개의 가슴팍에 툭, 부딪혀 떨어졌다.
손이었다. 떨어져 나간 팔꿈치부터 잔뜩 금이 가고 깨진, 도자역 환자의 손.
무척 익숙한 손이기도 했다. 손등을 관통한 상흔이 특히 그러했다.
아무개는 반사적으로 전방을 향해 고개 들었다. 몽중에서나마 수차례 접한 율해원이 보였다. 그에 맞서 제게 등을 보인 상대는 분명······
“······술, 사님···?”
공동의 어두운 그늘에 선 아무개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선명한 빛 아래의 술사를 목도했다. 왼쪽 소매가 텅 비어 나부끼고, 항시 제자리를 고수하던 삿갓마저 잃어버린.
그 남자의 시야에는 목매어 죽은 발이 늘 아른거렸다. 한쪽 신이 벗겨진, 도련님. 율해원의 발이.
술사는 환각을 피하고자 챙 넓은 삿갓을 썼다. 해가 진 밤에도, 사방이 막힌 실내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항상.
그러다 간혹 예기치 않게 삿갓이 벗겨지면,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겉으론 보이지 않는 깊은 내상이 그의 안에 여전히 남은 까닭에.
아무개가 내달렸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달려간 흉신은, 간절히 두 손을 내밀어 남자의 눈을 가렸다.
“술사님, 보지 마···!”
그의 눈을 가린 아무개가 소리쳤다. 간곡한 외침이 닿은 걸까. 손아래 와 닿은 술사의 몸이 움칠, 작게 떨렸다.
차르르륵— 바람 한 점 없는 공동에서 종이가 요란하게 흩날렸다.
넓게 드리운 고리형의 결계가 순식간에 범위를 좁혔다. 무수한 백지 부적이 회오리치듯 빙그르르 돌아 구멍 난 동공으로 몰려들었다.
부적이 해원에게 달라붙었다.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여 눈 깜짝할 사이 해원의 전신이 목내이(木乃伊)처럼 하얗게 뒤덮였다.
“아아아악—···!”
쏟아지는 부적의 행렬. 물에 빠진 듯 허우적대는 손과 발, 핏대 선 목을 타고 일그러진 얼굴마저 뒤덮은 종이는, 최종적으로 거대한 구를 이루었다.
하얀 종이로 만든 구 형태의 봉인이 둥실 떠올랐다. 해원을 가둬 버린 술사는, 하나 남은 손으로 제 눈을 가린 손을 덮었다. 그가 준 반지를 낀 손이었다.
즉시 축지했다.
털썩, 술사의 몸이 허물어졌다. 아무개는 여기가 어딘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함께 주저앉았다.
여전히 두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린 아무개는, 술사의 등에 바짝 붙은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삿갓을 잃고 한쪽 팔마저 부러진 상황. 그는 교전을 이어갈 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제부턴 자신이 해결을 봐야 했다.
“······음?”
긴장으로 촉각을 곤두세운 아무개의 귓가에. 나긋한 음색이 들려왔다.
“해서 왔니?”
유랑술사를 선뜻 이름으로 부르는 이라면, 당연 그밖에 없다.
화왕 모란.
사방에서 풍겨 오는 그윽한 꽃내음을 뒤늦게 자각했다. 아무개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꽃의 신령은 뿔 대신 머리에 매화꽃 가지가 돋아난 사슴의 등에 앉아 있었다. 꿀처럼 진득한 눈. 연한 꽃잎처럼 하늘하늘한 옷자락. 고귀함과 우아함을 갖춘 왕의 곁에 새와 벌, 나비가 맴돌았다.
“안녕.”
지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너른 화원에서. 꽃의 왕이 흐드러지게 웃어 보였다.
아무개는 외딴 전각에 들어섰다. 술사를 부축해 앉힌 후 주위를 살피던 흉신의 눈이 장식용 휘장을 포착했다.
즉시 창가로 다가간 아무개가 휘장을 잡아 찢었다. 찌이익, 고운 천이 비명을 지르며 결대로 갈라졌다.
이어서 술사의 등 뒤에 무릎을 세워 앉고는 찢은 휘장을 눈가에 둘러주었다. 삿갓이 없으니 임시방편으로 쓸 안대였다.
“······술사님··· 아파?”
아무개는 아팠다. 다친 곳도 없는데.
술사의 휑한 소매만 보면 눈가에 열이 오르고 시야가 흐릿했다. 안대에 매듭을 묶어 고정한 후 술사의 등에 이마를 기대었다.
“미안해···.”
그 등이 너무도 단단해서. 살과 근육으로 이뤄진 사람이 아니라, 가마에 구워 낸 도자기처럼 차고 딱딱해서. 더할 나위 없이 슬퍼졌다.
나 때문에. 나를 도와주려다······
“뭐가 미안해요?”
사정없이 흔들리는 아무개의 목소리와 달리. 술사의 물음은 지극히 평이했다.
“내가, 내가··· 하필 그때 가지만 않았어도, 술사님 팔은······.”
그가 자신을 지키고자 막아선 것쯤은 당연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운이 나쁘다지만, 이런 순간에조차 최악의 시기를 고르는 건 너무하잖아.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개는 일상처럼 당연시하던 불운에 절망했다.
“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술사는 웃었다. 다소 힘 빠진 목소리가 기운 없었지만, 그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은 듯했다.
“삿갓이 떨어진 바람에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는걸요. 코앞에서 공격이 쏟아지는데도 말이에요.”
아무개 님이 때맞춰 오지 않았다면, 팔 한 짝이 아니라 전신이 박살 났을 거라며 그가 덧붙였다.
“괜찮아요, 전부. 다 괜찮아질 거예요.”
여느 때처럼 더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어조. 아무개는 이를 악물었다.
거짓말.
“술사님··· 거짓말쟁이.”
이제는 안다. 그는 거짓말에 아주 능숙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일대의 산채를 세 치 혀로 농락했듯이. 꿀처럼 다디달아 깜빡 속아 넘어가고 싶을 만큼 감미로운 거짓을 연신 속삭인다.
“무모한 짓 안 한다고 했으면서. 금방 다녀온다고 했으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단 말인가. 팔 하나를 잃어 놓고, 호흡조차 버거운 듯 거칠게 숨 쉬는 주제에.
전혀 안 괜찮으면서 그렇게 웃으면, 속아 넘어갈 줄 아는 건가?
“으음.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저로서도 예상 밖의 만남이었던지라.”
한데 이번에는 거짓말 아니에요. 술사가 그리 덧붙였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정말로···”
“나, 봤어.”
그가 변명처럼 이어 가던 말을 도중에 잘라 내며. 아무개가 고백했다.
“다 봤어. 꿈에서··· 율해서가 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