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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7)화 (127/138)

127화

그 말대로. 웃음기가 가신 얼굴은 서늘했다. 

해원은 허리를 크게 젖히며 파하, 대소했다.

“이제야 좀 형님 같네! 어울리지도 않게 실실거리는 낯짝이 얼마나 역겨웠는지!”

쿠구궁— 술사가 디딘 땅이 급격히 융기했다. 까마득히 일어선 지면은 구름마저 꿰뚫을 듯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술사는 지맥의 옆구리를 타고 내려갔다. 수직이나 다름없는 경사를 미끄러져 내려가며 전후좌우로 인형이 내뻗는 손을 스치듯 피하고 뛰어넘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작정이야?!”

해원이 지휘하듯 장창을 휘두르자 격자로 들쑥날쑥하던 지면이 동시에 솟구쳤다. 길쭉이 늘어난 대지가 뱀의 머리처럼 쏘아져 나갔다.

세 가닥의 지맥이 술사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과광! 요란한 폭음이 터지며 술사가 타고 오던 지맥이 무너졌다. 붕괴하는 다리처럼 허리가 꺾인 지맥은 맥없이 추락했다.

그 무렵 술사는 이미 다른 지맥으로 옮겨 간 후였다. 구부정하게 휜 경사면을 미끄러지며 연신 고개를 들이미는 지맥을 뛰어넘고 갈아탔다. 네모반듯한 지맥이 용솟음치며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무리 지어 사냥하는 짐승처럼 쉼 없이 퍼붓는 가운데. 술사는 미세한 틈새를 교묘히 오갔다. 시시각각 뒤쫓는 그것들을 피해 내달리던 술사가, 돌연 우뚝 섰다.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도망가던 목표가 멈췄다. 하늘을 검게 뒤덮은 지맥이 일제히 쏟아졌다.

하나 그 무엇도 술사에게 닿지 못했다.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에 들어온 듯 날카로운 이빨처럼 돋아난 지맥들이 단 한 자를 남겨 두고 정체됐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었다. 술사를 사방팔방으로 둘러싼 지맥이 바르르 요동치며 땀방울 같은 흙 알갱이를 떨구었으나, 거기서 한계였다. 그 많던 지맥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탓이다.

술사는 저들이 멈추는 바로 그때 함께 섰다. 단순 예측이 아닌, 현 상황 자체가 의도한 바였다. 이리저리 오가며 서로 엉키고 꼬이도록 유도한 것이다.

기다랗게 뻗은 지맥이 공중에서 얽히고설킨 모양은 흡사 거미와 같았다. 거미라기엔 다리가 너무 많았지만.

엉킨 매듭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하던 지맥이 서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투둑, 다리가 부러졌다.

거대한 원구형의 흙더미가 운석처럼 낙하했다. 지면과 충돌한 순간,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의 구름마저 흩어졌다. 너른 평지에 시커먼 산이 새로 빚어졌다.

충돌 직전, 지맥의 고치에서 벗어난 술사는 반쯤 쓰러진 숲으로 들어갔다. 신록으로 숨어드는 그를 쫓아 해원이 숲 어귀로 축지했다.

“어딜···!”

해원이 장창을 휘둘렀다. 강고한 금속성이 녹아내리듯 흐물흐물 늘어지더니 수풀을 겉돌며 길게 휘어졌다. 창이 아니라 채찍이라도 휘두른 양 했다.

“위대한 수호지신께서 이리 도망만 다니면 쓰나!”

낚싯대처럼 창을 휙 잡아당기자 휘어져 있던 금속이 일자로 곧게 퍼지며 단단한 고형으로 굳었다. 창이 훑고 간 수목이 일제히 꺾이고 부러졌다.

그 너머에 술사가 있었다.

“하긴, 애당초 수호신이란 호칭이 형님한테 가당키나 한가?”

폐허가 된 숲 너머. 배다른 형님을 향해 해원이 이죽거렸다.

“수호신은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잖아. 형님이 뭘 지켰는데? 설마··· 나라?”

해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면 망국의 수호신인가?”

망국과 수호신이라. 말이 조금도 사리에 맞질 않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해원의 말을 들어 주던 술사가 간만에 입을 열었다.

“왜 이리 화가 났어요?”

“난 원래 이랬어! 형님이 빌어먹을 거울로 되살린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촤아악—! 가시처럼 솟구친 땅이 정면으로 내달렸다.

“하룻밤 새 온 가족이 몰살당했는데, 당연히 화가 나지! 그게 정상이잖아?”

술사는 역동하는 가시밭을 피해 물러섰다. 쓰러진 숲을 벗어나 너른 평원에 접어들자 그 뒤로 해원이 축지해 왔다.

“형님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지척에서 울리는 음색에 술사가 고개를 뒤로했다. 하나 이번에는 해원이 먼저였다. 

술사의 어깨를 잡아 돌린 해원이 그대로 짓눌렀다. 쿵-! 술사의 등이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기억나, 형님? 내가 물어봤었잖아. 가족으로 생각한 적 있냐고.”

먼 옛날. 과거의 율해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 형님은 단 한 번이라도 내 가족이었던 적 있어?”

미소가 가신 얼굴이 해원을 내려다봤다. 아무개라면 지레 겁먹고서 술사님 화났냐고, 나 미워하면 안 된다고 침울하게 웅얼거렸을 낯이었으나, 해원으로선 외려 이쪽이 익숙했다.

“해원아.”

나직한 부름. 해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처음이었다. 매양 도련님이라며 깍듯이 하던 그가, 처음으로······

“누가 네 형님이야.”

건조한 시선이 모로 기울었다. 자신을 나무에 처박은 배다른 아우의 귓가에 대고.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입술이 속살거렸다.

“원하신 가족 놀이에 어울려드린 걸 정말로 착각하면 곤란하죠, 도련님.”

쩌억, 쩌저적—!

일대가 삽시에 금이 갔다. 무너진 땅 아래에는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어두운 공동(空洞)이 자리했다. 발 디딜 곳을 잃은 두 인영이 함께 추락했다. 

아뜩한 낙하의 순간. 해원이 상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럼, 우리 가문에는 왜 들어왔어!”

들뜬 삿갓을 한 손으로 내리누른 술사는, 남은 손으로 해원의 손목을 잡아 돌렸다. 허공에서 반 바퀴 회전한 그가 해원의 허리를 발뒤축으로 찍어 눌렀다.

콰아앙—! 해원이 바닥에 내리꽂히며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차르륵··· 백지 부적이 허공을 노닐었다. 술사는 부적을 계단 삼아 사뿐 내려섰다.

“장중보옥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은 모르시겠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대다수 상민은 어린 자녀를 일찌감치 생업에 종사시킨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술사가 첨언했다.

“네 살 무렵부터 일감을 구하러 다녔어요. 뭐든 가리지 않고 품팔이하다 보니 그럭저럭 적성에 맞는 일도 찾았고요.”

술사는 농사에 소질이 있다 했다. 절뚝이라는 꼬마가 일손을 보탠 전답은 그해 풍년이 든다는 소문이 옆옆 고을에까지 퍼졌다고. 

풍문을 듣고 궁금해서, 혹은 미심쩍은 마음에. 여러 구실로 불러낸 이들은 추수할 무렵이면 만족하여 이듬해 또 아이를 찾곤 했다.

“돌이켜보면, 제 피에 흐르는 모란 님의 언약 덕이었을 테죠.”

바닥 깊숙이 처박힌 해원이 몸을 비틀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선 술사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저는 저자도라는 하중도에서 살았지만, 뭍에 일감이 많다 보니 섬 밖으로 종종 나갔어요. 한창 바쁜 농번기 철에는 뭍에서 숙식하는 게 일상이었죠.”

그날도 마찬가지였다고. 술사는 말했다. 

“여느 때처럼 뭍에서 일손을 거들고 잠들었는데. 오밤중에 누가 흔들어 깨우더라고요.”

캄캄한 밤이었다. 누구든 진즉 곯아떨어졌을, 깊은 밤.

“섬에 불이 났다더라고요. 너희 집도 섬에 있지 않냐고, 어서 일어나 보라는데··· 잠이 싹 달아났지 뭐예요.”

우스운 이야기라도 하듯 술사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어찌어찌 섬에 도착하고 보니 죄다 물가로 나와 있더라고요. 하나하나 뜯어봤죠. 혹시라도 그중에 어머니가 계실까 해서.”

아무리 큰 화재가 났다 한들 하중도잖은가. 재산상 손해는 있을지언정, 인명 피해는 없어야 했다. 물가로 피신하면 되니까.

“물론, 어머니는 안 계셨죠.”

해원은 웬 딴소리냐며 꼬투리 잡지 않았다. 그저 모종의 결말을 예상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물가로 도망쳐 왔는데.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어요. 다리가 불편하셨거든요.”

저벅저벅. 술사가 걸어왔다.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신형이, 천장 구멍으로 스며든 빛발에 윤곽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발에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만든 구멍이었죠.”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고 화마로 뛰어들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당신께선 힘겹게 마당을 기어 나왔으나, 싸리문도 채 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가문에 왜 들어왔냐 하셨죠? 궁금했어요.”

삿갓이 드리운 그늘 아래. 메마른 시선이 상대를 향했다.

“그 구멍··· 누가 만든 걸까요?”

술사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살의는커녕 일말의 적의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지극히 고요하고 잔잔하게. 무심한 듯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화양 율씨 종가에 가고 얼마 되지 않아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릴 들었어요. 옛날에 어느 노비가 도망치다 붙잡혀 와서, 발뒤꿈치에 구멍을 뚫고 삼줄로 엮어 몇 날 며칠간 대문에 묶어 놓은 적 있다고요.”

본보기였다. 도망친 노비가 어찌 되는가 똑똑히 알려 주고자.

“도망친 이유야 뭐, 뻔하죠. 한낱 천것이 귀한 종손의 씨를 품어 버렸으니.”

율해서는 해원의 배다른 형이다. 

즉, 노비가 마님보다 먼저 아이를 가졌다.

누군가는 기회라 여기고 배 속 아이를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하나 또 다른 누군가는, 도망을 택했다. 

앞서 한 차례 실패하고. 평생 나을 길 없는 상처를 입고서도.

“···그래서 복수한 거야?”

한층 가라앉은 어조로 해원이 던진 물음에. 술사의 삿갓이 모로 기울었다.

“복수라뇨?”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책임을 물으려고, 우리 가문에···.”

“아시잖아요, 도련님.”

삿갓 그늘 아래 드러난 입매가 호를 그렸다.

“제가 진정으로 복수하려 했다면, 황실이든 주단 금씨든 구태여 끌어들일 필요 없어요. 번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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