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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6)화 (126/138)

126화

“지각? 누구 맘대로?”

진정으로 안타깝다는 양하는 술사의 언행에 해원이 코웃음 쳤다.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 당장 내놔!”

해원에게서 터져 나온 기운이 폭발하기 직전, 술사를 둘러싼 부적의 둘레가 급격히 증폭했다.

차르르륵— 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가던 부적 중 한 장이 율해경의 가슴팍에 달라붙고, 그가 사라졌다. 축지술이다.

같은 상황이 창성 곳곳에서 발생했다.

서책을 보던 자, 검을 휘두르고 신체를 단련하던 자, 산책하고 주전부리를 먹던 이들까지. 영화단의 일원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모두가 부적에 스친 순간, 축지당했다.

백지 부적이 너른 원을 그리며 파문처럼 번졌다. 잠시 후 확장세를 멈춘 그것은 지면과 수평을 이루며 한 줄기 너른 고리를 이루었다. 축지술에 당한 사람 모두 고리의 바깥에 놓였다.

난데없이 쫓겨난 단원들은 황망한 낯으로 서로를 대면했다. 혹자는 노기를 터트리며 부적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텅—! 튕기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단원이 확언했다.

“결계다.”

부적의 결계로 안팎 공간을 단절시킨 즉시 술사는 앞으로 축지해 갔다. 해원이 서둘러 물러났으나, 술사의 손끝이 어깨를 스치고 말았다.

다음 순간. 뒷걸음으로 디딘 땅은 너른 풀밭이었다. 영화단주가 애지중지하던 꽃송이는 온데간데없고 푸른 초목으로 가득한 정경. 

해원 역시 축지당한 것이다.

“뭐 하자는 짓거리야, 형님?”

“단주님이 정원을 망가트리지 말라셨잖아요. 소중한 것 같은데. 지켜드려야죠.”

신경질적인 어투에 술사가 나긋이 답했으나, 해원은 비웃을 따름이었다.

“그게 뭔 줄 알고 지켜? 장장 이백 년에 달하는 해묵은 집착의 결정체를? 차라리 오늘을 핑계 삼아 뒤엎는 편이 모란도 좋아할걸.”

과거 화왕이 율씨 종가에 친히 내방하던 시절. 화양에는 웃지 못할 속설이 있었는데, ‘화양 율씨의 첫사랑은 모두 같다’는 얘기였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화왕 모란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령이라 일컬어지는.

“이참에 그 징글맞은 정원을 치워 버릴까 했는데. 형님이 쓸데없이 배려한 바람에 물 건너갔잖아.”

정원에서 결계를 편 술사는 해원과 함께 축지했다. 결계는 시전자인 술사를 따라 이동했고 정원을 포함한 창성과 거주민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 목적은 단절. 결계 내부에서 어떤 사달이 벌어지든, 결계 밖으론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재미있네. 이리 단순한 결계마저 소름 끼치도록 형님답잖아.”

해원이 발장난 치듯 앞코로 땅을 톡, 두드렸다. 짓궂은 장난질이었으나 그 여파는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돌을 던지듯. 지면에 흘려보낸 힘이 물결처럼 널리 퍼지더니 결계와 충돌했다. 쾅—! 대지가 폭발했다. 

결계 밖 단원들은 시꺼먼 땅이 터지며 하늘 높이 치솟는 것에 기함했다. 평지에서 난데없이 산사태라니! 

생매장당할 위기에 직면한 단원들이 경계했으나, 곧 저들에겐 흙 알갱이 한 톨 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리 거대한 폭발에는 당연 수반되어야 할 폭음과 진동조차 없었다.

“누구에게든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그 터무니없는 결벽증은 여전한가 봐?”

해원이 냉소적으로 일갈했다.

“실패했으면서.”

동시에 술사의 정면으로 축지했다.

해원이 정권을 내질렀다. 술사의 어깨가 반보가량 물러나며 회피했다. 

해원의 권은 허공을 후려치고 말았으나, 위력은 여전했다. 곁을 스쳐 간 풍압에 술사의 삿갓이 붕 떠올랐다. 고정끈이 팽팽히 당겨 턱 아래를 파고들었다.

쿠과과광—···!

술사의 등 뒤 너른 평지가 부채꼴로 뒤집혔다. 들뜬 삿갓을 한 손으로 잡아 누르며 물러서는 찰나 간, 배다른 형제의 시선이 서로를 교차했다.

해원의 눈에 깃든, 명백한 살의를 일견한 술사가 거리를 벌렸다.

“제가 죽으려 한 이유는—”

한숨을 내쉰 술사가 거듭 축지했다. 그가 사라진 자리로 해원의 다리가 횡을 그었다. 긴 다리의 궤적을 따라 땅이 깊게 패며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예요.”

멀찍이 동떨어진 곳에서. 술사의 뒷말이 나직이 이어졌다.

“특정 개체로 편향된 힘이 온 세상에 반향을 일으키는 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하물며 구속이나 제압도 불가한 형국이니.”

그 자신을 인격체가 아닌, 위험한 병기나 도구 따위로 취급하는 언사였다.

“제가 도련님께 죽든, 도련님이 제 손에 죽든. 궁극적으로 제 목표를 역행하는 셈이죠.”

무한에 가까운 대지를 담아낼 수 없어 처참히 파괴되던 과거와 달랐다. 배다른 형제는 각자의 방식으로 군주의 권능을 체화하며 그릇의 용적을 키웠다.

만일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남은 한 명이 오롯이 군주를 승계하리라. 아우는 완벽한 힘을 추구하고자. 형은 자아 잃은 반쪽짜리 권능이 고삐가 풀려 날뛰는 꼴을 막기 위해.

“위험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뭔데?”

해원이 조소했다.

“알잖아, 형님. 인간의 역사는 같은 실수의 반복이야. 남의 ‘몸’에 멋대로 기생해 놓고는 저들이 소유한 줄 착각하고,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하는 몰염치한 것들에게. 이 세상이 너희 인간종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체벌로 훈계해야 해. 그것들은 좋게 말로 해선 도통 못 알아먹거든.”

“마치··· 도련님은 사람이 아닌 듯이 말하네요.”

“처음부터 그랬잖아?”

쿠구구궁—···

술사가 딛고 선 땅을 중심으로 네모반듯한 선이 생겼다. 너른 대지가 바둑판처럼 갈라지며 그 모양대로 융기하고 침강했다.

“나는 다화련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고.”

사각의 칸이 제멋대로 뒤죽박죽 오르내렸다. 덩어리진 흙더미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며 팔다리를 지닌 인형으로 화했다.

“내가, 이 땅의 군주야.”

대지를 수족처럼 자유로이 다루는 힘. 이는 분명 군주 다화련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흙으로 빚은 무수한 인형을 과시하듯 발아래 둔 그는 실로 만인을 거느린 왕인 양했다.

술사는 습관적으로 축지를 시도했으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원의 소행이었다. 축지는 땅을 접어 이동하는 술법. 해당 지역의 주인인 신령은 땅의 변형을 막을 수 있다.

즉, 이 일대는 해원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나는 형님과 달라. 멀쩡한 힘을 썩혀 가면서까지 역겨운 ‘인간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술사가 선 영역이 침강하고 주변 땅이 융기했다. 사방이 흙벽으로 둘러싸여 갇힌 그에게. 흙인형이 뛰어들었다.

흑돌로 뒤덮인 너른 반상(盤上)에 홀로 남아 포위된 백돌. 국면은 계산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불계패였으나, 술사는 기권하지 않았다. 

전후좌우로 쏟아지는 공세를 유연하게 회피한 후. 헛손질로 휘청이는 인형의 어깨를 딛고 벽면을 박차고 오른 그가 높이 융기한 지면에 안착했다. 

때마침 달려든 인형을 피해 술사는 빙글 돌아 뒤를 점했다. 오금을 가볍게 툭 치자 인형이 허우적거리며 구덩이로 빠졌다.

“인간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훌륭한 군주님께. 하찮은 인간이 여쭤보고픈 게 있는데요.”

술사는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 냈다.

“도자역은 어찌할 계획이신가요?”

저 멀리 제멋대로인 바둑판 너머에서 해원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건 복수야. 형님은 복수를 부정하지 않는다 했잖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곧 긍정을 뜻하진 않죠.”

술사는 더 높은 사면으로 가뿐 넘어갔다. 허리 숙여 주먹질을 피한 그는 인형의 등을 걷어차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복수라면 그때 당시 연나라 황제 폐하와 주단 금씨 종주를 비롯한 몇몇에게 했잖아요. 죄 없는 먼 후손까지 저주를 대물림한 이유가 뭐죠?”

“그럼 안 될 이유는 뭐지?”

해원의 고개가 삐딱하게 뒤틀렸다.

“우리 가문은 시답지 않은 빌미로 몰살당했잖아. 황제는 그래도 되고, 나는 안 될 이유가 뭔데?”

참말로 모르겠다는 듯, 얼핏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해원이 첨언했다.

“평범한 백성이 살인을 저지르면 죄지은 자만 형을 받지만, 역모를 꾀하면 구족을 멸하지. 둘 다 죄인의 친족은 무고해. 하지만 후자는 나라의 주인인 황제를 위협했으므로 다신 일어설 수 없게 짓밟는 거잖아?”

해원이 손 내밀자 평지에서 날카로운 장창이 묘목처럼 자랐다. 토양의 금속을 응집해 즉시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이 땅의 주인이지. 따라서 감히 내게 해를 끼친 것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씨를 말려야 마땅해.”

휙, 휙— 해원의 손에서 회전하던 장창이 정지했다. 장창의 뾰족한 첨단이 유랑술사를 가리켰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거야!”

무한히 생성된 흙인형이 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팔방 몰려드는 모양새가 사탕에 들러붙는 개미 떼 같았다.

“간혹 복수를 거창한 대의인 양 착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복수는 단순한 앙갚음에 지나지 않아요.”

덥석, 흙으로 빚은 손이 술사가 선 땅의 모서리를 붙잡았다.

“원칙과 신의가 무너진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수단으로서 복수의 효용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글쎄요.”

네모 각진 사방에서 흙손이 연달아 우수수 기어올랐다.

“복수에 명분은 있을지언정, 정당성은 없어요.”

하물며 위계에서 당위를 찾은 복수라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술사를 무수한 흙인형이 뒤덮었다. 그가 딛고 선 사각의 지면을 벌떼처럼 우글우글 뒤덮은 인형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후두둑··· 인형이었던 흙덩이가 비처럼 쏟아졌다. 

검은 흙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술사가 삿갓을 고쳐 썼다. 둥실 떠다니는 백지 부적 가운데. 삿갓의 그늘진 어둠 속 한 쌍의 눈동자가 해원을 선명히 직시했다.

“웃기지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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