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
형용되지 못한 비명이 목구멍 안에서 들끓었다.
고통에 절어 실성한 채 바닥을 기었다. 부러진 손마디 따위는 아픈 축에도 들지 못했다. 입안에 흥건한 피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해 턱으로 질질 흘리며 소년이 기어간 곳엔 평범한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적당히 길고 굵어 지팡이로 삼기에 썩 그럴듯해 보였다. 율해서는 부러지고 꺾인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를 쥐었다.
엎어진 몸을 앉은 자세로 바꾸는 데만 족히 한참은 걸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무 기둥에 의지해 일어서기까지 했다.
그 무렵 녀석은 다환 전역을 감각하고 있었다. 북부와 남부는 물론, 서부까지. 국경을 넘어 확장해 나가는 기감이 아찔했다.
혼재하여 쏟아지는 자극의 홍수를 거슬러.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겨운 걸음을 내디뎠다.
온 세상이 뒤집혔다.
축지술을 시전할 때 흔히 보이는 풍경이지만, 율해서는 그럴 용의가 없었으리라. 땅을 접어 이동할 셈이면, 굳이 일어설 필요 없이 지면에 쓰러진 그대로 축지하면 되므로.
의도치 않은 축지는 녀석이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좌우지간 무사히 귀환했다는 것 정도일까.
단 한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반파된 만물점이었다.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기댄 몸이 비틀거렸다. 귀가 먹먹한 것이 고막이라도 터진 모양이다.
“···!? 돌아왔나?”
마당을 전전하던 점주가 반갑게 맞이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몰골을 보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는—”
뜻한 바 말소리는 나오지 않고 목 안에서 피가 들끓었다. 알아듣지 못한 점주가 무어라 되물었으나, 아무개는 어쩐지 녀석이 한 말을 알 것 같았다.
해원이는?
“······자, 잠깐!”
마주 보고 선 점주의 둥글한 얼굴에 돌연 당혹감이 서렸다. 그가 서둘러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푸욱—
서늘한 날붙이가 등에 꽂혔다. 심장을 관통한 그것은 가슴 밖까지 비죽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를 꿰뚫은 검신을 멍하니 보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뒤로했다.
해원이었다.
해원의 검이 소년을 찔렀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은백색 검면을 척척히 적셨다.
검을 쥔 왼손이 유독 선명히 시야에 비쳐 들었다. 물어뜯는 습관 탓에 반토막이 난, 못난 엄지손톱.
······원래 오른손이었는데.
***
이백 년의 세월을 넘어. 배다른 형제는 다시금 서로를 마주했다.
“설마 형님이 먼저 찾아올 줄이야.”
해원이 선뜻 운을 떼자 유랑술사가 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이리될 줄은 몰랐네요.”
입가에 형식적인 미소를 드리운 술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군주님 흉내는 재미있던가요?”
꽤 요란하게 일을 벌이셨던데, 하고 덧붙이자 율해경의 안색이 흐릿해졌다.
이백 년 전. 율해서는 대지의 군주를 소환해 냈다. 불타는 고통을 견디다 못한 대지는 이를 떠넘길 상대를 발견했다.
당시 이 땅의 모두가 광적으로 맹신하던 전쟁 영웅. 타고난 천재성은 물론 신앙에서 비롯한 설익은 신격이 더해져 반신(半神)의 경지에 다다른, 소년 술사.
태초에 ‘대지’라는 형태의 신(身)을 구축한 후 줄곧 잠들어 있던 다화련은, 자아가 성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신체에 무수한 생명이 태동하고 문명을 세우는 동안에도 먼 과거에 정체된 그의 정신은 너무나 미숙했다.
그게 문제였다. 대지의 군주는 제가 저지른 일이 소위 ‘왕 살해 의식’이라 불린다는 것도 몰랐으리라. 생사의 경중에 무지하기에.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정신적 소멸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소년 술사는, 자아가 사라지고 남은 군주의 육신을 강제로 계승했다.
불세출의 천재이자 난세의 영웅, 열렬한 신앙의 주인. 그런 이에게도 온 세상의 대지를 제 안에 담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실제 군주를 소환하고 만물점으로 축지했을 무렵, 소년은 명백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 등에 칼이 꽂혔다.
왕 살해 의식이란, 왕을 죽임으로써 그 힘을 계승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왕을 죽이고 계승 중인 전승자를 죽이면? 어찌 될런가.
“흉내라니. 섭섭한 소릴 하네, 형님.”
해원이 손을 내밀었다. 지면이 날카롭게 솟구쳤다.
밤송이처럼 들쑥날쑥 돋아난 가시가 술사를 향해 휘몰아치듯 달려들었다. 후욱— 풍압에 삿갓이 들썩이며 자욱한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콜록, 기침한 율해경은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옅게 가라앉은 흙먼지 사이로 비죽이 솟아난 가시가 멈췄다. 유랑술사의 미간 바로 앞에서.
“눈 뜨고 똑바로 봐. 아직도 내가 다화련을 ‘흉내’ 내는 것 같아?”
왕 살해 의식이 진행 중인 계승자를 죽이면, 어찌 되는가.
그 해답은 율해원에게 있다. 배다른 아우는 형제의 등에 칼을 꽂아 계승자를 계승했다.
“나 원.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의인인 척 흉내 내기에 진심이잖아?”
어깨를 으쓱한 해원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위. 선. 자.
“그나저나 형님. 만물점주한테 얘기는 전해 들었지?”
꼭 전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리 중얼거린 해원이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나는 날엔, 우리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거라고.”
우뚝 멈춘 가시밭이 재차 약동했다.
가시 위로 가시가, 그 가시에 또 가시가. 가지 뻗듯 끝없이 자라난 가시밭은 근방을 구멍투성이로 만들 기세였다. 하나 목표인 유랑술사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해원의 뒤로 축지한 술사는, 즉시 지면에서 치솟는 가시를 피해 멀찍이 이동했다.
“망할 놈들···!”
율해경이 분통을 터트렸다.
“싸우려거든 나가서 싸워! 네놈들 때문에 아까운 꽃잎 한 장이라도 떨어졌단 봐. 가만 안 둘 줄 알아!”
산통 깨는 소리에 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그런다고 모란이 눈길 한 번이나 줄 것 같아? 이제 그만 꿈 깨. 언제까지 철없던 어린 시절 첫사랑에 목을 맬는지.”
“모란이 아니라, 모란 님! 존칭 붙여서 불러! 그분은 네 스승이야!”
아웅다웅하던 그들은 차르륵— 종이가 펼쳐지는 소리에 퍼뜩 시선을 돌렸다.
“곤란하네요.”
유랑술사의 주위로 백지 부적이 둥실 떠다녔다. 길고 각진 종이가 일렬로 줄지어 동그란 고리를 형성했다. 술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부적의 고리가 동심원을 이뤘다.
“오늘 도련님을 뵐 줄은 몰랐거든요. 영화단주님과 인사나 나눌까 했는데.”
“부적을 그리 꺼내 놓고 인사나 나누시겠다? 전혀 설득력 없잖아?”
“하하. 아무리 그래도 죽이겠다는데 가만 당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이상하네.”
해원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안전히 죽는 게 형님 목표 아니었어? 앞으론 후계자 찾는답시고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돼. 내가 있으니까.”
나는 달라졌어. 해원은 그리 말했다.
“완전히 죽이지도 못하고 부스러기나 받아먹던 머저리가 아니라고. 이제 나는 형님이 당장 소멸해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
과거 율해서라는 그릇은 대지의 군주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질 뻔했다. 그때 율해원이라는 그릇이 나타나 율해서로부터 넘쳐흐른 낙수를 담아냈다.
두 형제가 나란히 대지를 계승한 것이다.
당시 해원은 율해서에게서 넘쳐흐른 권능의 일부를 받아 내는 것만도 버거웠다. 하나 이백 년 이란 세월을 허투루 보내진 않은 까닭에. 지금에 와서는 형님의 힘도 넘볼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술사는 단칼에 거절했다. 의외라는 듯 해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술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가기로 했거든요.”
지금쯤 사당에서 한창 자고 있을 흉신과 나눈 약조. 해원이나 해경은 알 길 없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였다.
“제 사정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예요. 도자역 같은 끔찍한 저주를 퍼트린 자가 유일한 군주로 즉위하는 건··· 이 땅의 백성들에게 너무 가혹하잖아요?”
유유히 흐르는 부적의 대열 너머. 술사가 나긋한 어조를 이어 갈수록, 해원의 낯이 구겨졌다.
“의외네? 형님은 나한테 부채감이 있잖아. 속내야 어떻든 겉으론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나한테 목숨을 내주기가 그리 싫어? 내게는 위선조차 아깝다는 거야?!”
해원은 평이하게 운을 뗐으나, 차츰 격앙된 언성으로 변모했다. 종국엔 고함이라도 지르듯 거세게 쏴붙이는 그에게. 술사는 딱한 사정이라도 들은 양 저런, 하고 타이르듯 말했다.
“지각이네요. 아쉽지만 이미 늦었어요. 조금만 더 서두르지 그러셨어요. 순순히 목을 내어드렸을 텐데.”
해원이 도자역의 근원임을 알기 전이라면, 그리했으리라.
······아무개를 만나기 전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