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쓰러진 대문의 잔재를 가뿐히 넘어선 소년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어느새 너른 공터에 다다라 있었다.
율해서는 주위를 살폈다. 혹여 누가 휘말리지는 않을까. 거듭 확인하고서야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지면에 손끝을 대자 미미한 신력이 흘러 들어갔다. 그를 중심으로 진법이 떠올랐다.
소환진도 종류가 여럿이다. 개중 율해서는 가장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소환진을 택했다. 신력이 바닥나 비술사와 다를 바 없는 몸으로는 이조차 버거운 형편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기본 소환진에 군주가 응할 리가···.”
기대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듯. 녀석이 중얼거리던 찰나.
섬뜩한 기운이 진법을 잠식했다. 소년이 느낀 생경한 감각을 아무개 또한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감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
율해서는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거대한 위압감이 전신을 짜부라트릴 듯 짓눌렀다. 눈앞이 흐려지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전에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적 있다.
물의 군주.
화왕의 정원에서 조우한 그는, 그때는 이리 심하지는 않았다. 이제서야 아무개는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그날 물의 군주가 한낱 인간 아이를 얼마나 배려해 주었는지.
— ···—······. ······! ···—?!
머릿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 ······—! ···, ······—···? —···—···! ···!
그것은 의념(意念)이었다.
제 의사를 상대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꽂아 넣는, 신령의 원초적인 소통법.
대지의 군주가 내지르는 의념은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기나긴 잠에서 막 깨어난 대지는, 물의 군주와 꽃의 왕이 예견한 대로 인간종 자체에 익숙지 않은 듯했다. 대지는 꿈장수나 주단의 장승처럼,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끔 표현하는 것에 무지했다.
하나 말이 통하지 않아도 미소와 눈물의 차이를 아는 것처럼, 단편적인 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괴로움이었다.
대지는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저도, 아파죽겠다는 분께··· 이런 재수 없는 소릴,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턱이 아리도록 악다문 잇새로. 율해서가 힘겹게 내뱉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고요···.”
바늘에 찔리면 흠칫 몸이 떨린다. 문지방에 발을 찧으면 눈물이 찔끔 나고, 살짝 베인 상처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손톱에 인 작은 거스러미조차 신경 쓰이기 마련인데. 혹여나 칼에 찔리기라도 하면? 전신에 화상을 입으면?
어느 누가 잠자코 견딜 수 있을까.
“당신이, 몸부림 한번 칠 때마다··· 얼마나 많이, 죽어나는지······ 알기는 해?”
— ······—? ······—···! ···— ···.
뇌리로 연거푸 의념이 쏟아졌다. 율해서는 시끄러워··· 하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당신 발길질 한 번에 산맥이 솟아나고, 손짓 한 번에 도시가 쓸려 나간다고.”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사고력이 유아만도 못한 건 알겠는데,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이 너무 거대해서··· 이 세상은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런 어리광은 아무도 못 받아 줍니다.”
율해서의 말마디를 듣던 아무개가 불현듯 의문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혼잣말이지?
설마, 지금 군주와 대화하는 건가?
아무리 현실감 넘친다 한들 결국은 몽중이다. 율해서의 안에 갇힌 아무개는, 육신의 감각은 경험할 수 있을지언정 녀석의 생각과 감정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만약 율해서가 먼 이국의 언어로 말하면, 그들 언어를 모르는 아무개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대지의 군주가 내지르는 불가해한 의념은 아무개의 한계일는지도 모른다.
율해서는. 녀석은 광활한 대지를 이해한 걸까?
그리하여 다시금 기적을 행하려는 걸까?
“설령 원치 않았더라도··· 이미 짊어졌으면, 책임을 져!”
아무개는 깜짝 놀랐다.
처음이었다. 율해서가 화를 낸 건.
“몰랐다면 이제라도 배워! 당신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 자아가 있어. 당신 자의식만 유독 특별한 게 아니라고!”
— ······—? ···!
소년의 거듭된 질타에 대지가 화답했다.
비록 긍정적인 답은 아니었지만.
“······무슨, ···!”
압도적인 질량감이 텅 빈 내부를 순식간에 채웠다.
캄캄한 심해에 내동댕이쳐진 듯 막대한 힘이 쏟아졌다. 율해서의 육신이 고꾸라지고 지면에 처박혔다. 혈관이 끊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며 장기가 터져 나갔다. 눈과 코, 입과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사람이라기보단 흡사 곤죽에 가까운 몰골.
하나 무엇보다도 끔찍한 점은, 온몸을 휘감은 열기였다.
작열하는 화염이 전신을 불태우는 듯했다. 평범한 불이 아니다. 물을 끼얹어도 결코 꺼지지 않는, 태초의 폭발에서 비롯된 광염이다.
울창한 밀림을 사막으로 변모시킨 화기. 불의 군주가 폭주하며 불사르는 열기에 비하면, 인두로 지지는 것쯤은 간지러운 지경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쩌면 의식을 잃었을는지도. 무엇 하나 확실치 않았다. 소년의 고통을 함께 겪은 아무개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 해서.
지옥의 겁화보다 잔혹한 화형을 겪는 소년의 곁에. 환상처럼 꽃이 피어났다.
— 정신 차리렴.
쓰러진 율해서의 눈앞으로 하얀 모란꽃잎이 한 겹 나폴나폴 내려앉았다.
— 의식이 시작됐단다. 왕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 대지는 네게 전부 떠넘길 셈인 모양이구나. 불에 타는 고통까지, 모두.
한 마디, 한 마디. 화왕의 의념이 닿을 때마다 꽃잎이 한 장 한 장 낙화했다.
— 어인 변덕인지. 그런 걸 고려할 만한 의식이 존재하긴 할는지.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일념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소년이 유아만도 못한 사고력에 어리광이라 지칭한 그것은, 너른 대지였다. 그저 오롯이 실존할 뿐인 까닭에 생과 사의 개념 또한 없는 걸까.
이 열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제 자아 따윈 아무래도 좋을 만큼.
— 힘내렴. 견뎌야 한다.
성대는 진작 망가진 소년이. 지극한 고통 가운데 희미한 의념을 전했다. 그에 화왕이 답했다.
— 글쎄··· 다화련의 자아가 너보다 먼저 소멸할 경우, 이 세상이 어찌 변모할는지. 나로서도 가늠하기 어렵구나. 지금까지 그랬듯, 흙으로 빚어진 단단한 대지의 형상으로 남아 줄지. 혹은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낯선 형태로 화할는지.
섬뜩한 가정이었다.
— 아직 절망은 일러. 너는 이미 예사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잖니? 온 땅에 널리 퍼진 신앙이 너를 반신이나 다름없도록 만들었단다. 네 신력이 온전했다면 대지의 침입에 반발했을 테지만, 우연찮게도 마침 네 안이 텅 비었으니 다른 걸로 대신 채워도 나쁘지 않을 테지.
환상일까. 아무개는 모란이 실로 소년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 이만 물러가도록 하마.
신령으로서 의념을 보내는 건 매한가지일 텐데. 다화련과 모란은 판이했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소년을 단숨에 파괴해 버린 대지와 달리, 화왕은 보드라운 꽃잎처럼 살며시 다가왔다.
— 혈맥으로 이어진 약조가 네 안에 깃들어 있어. 날 때부터 지닌 것이라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겠지만, 화왕의 언약이란 그리 가벼운 게 아니란다.
내가 떠나거든,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대지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 ······언젠가 다시 만나길 고대하마.
살아남으라는 말을 화왕은 그리 대신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화왕이 떠나고 언약이 끊어지자 소년의 심상에 깊은 공허가 생겨났다.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라지고서야 깨닫는다. 술사란 근본적으로 혼자일 수 없었다. 언약을 맺은 신령이 늘 함께하므로.
“······—!”
소년과 세상을 잇는 마지막 연이 끊어지고. 꽃이 떠난 자리를 대지가 가득 메웠다. 그럼에도 소년의 그릇에 온 땅을 담아내기란 역부족이다. 화왕은 손꼽히는 대신령이나, 왕 중의 왕인 군주는 비교 불가한 대상이었으니.
한낱 인간이 군주의 격을 감당할 리 만무하다. 뭇사람이라면 진작 짜부라져 죽었을 압박 속에서 소년의 생을 이어 준 건, 다름 아닌 신앙이었다.
— 이 땅을 보호하고 지켜 주신 수호지신께······
— 고통으로 얼룩진 세상을 수호하시고······
내부가 차오를수록 감각이 확장되었다. 소년은 미처 의식 못 한 사이 근방 산천은 물론, 현(縣)을 지나 군(郡)을 넘어 도(道)에 이르는, 드넓은 영역을 자각했다.
인간의 육(肉)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극도로 뻗어 나가는 감각은,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었다.
넘실거리는 지각(知覺)의 망망대해에서 신을 숭배하는 기도가 무한히 메아리쳤다. 가히 특정할 수 없는, 절대다수의 신앙.
그들의 염원은 소년을 초월적 존재의 반열에 이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