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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3)화 (123/138)

123화

소년의 압도적인 기세에 주춤 경도되어 버린 점주는,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미간을 구겼다.

“또냐? 너도? 대체 어디서 말이 새길래 승냥이마냥 들러붙는 놈들이 끊이질 않아!”

버럭 성을 내던 점주는 소년의 등에서 스르륵 흘러내린 시신의 얼굴을 맞닥뜨리곤 질겁했다.

“이런 미친! 시체를 통째 가져온 놈은 또 처음일세?!”

상종하기도 싫은 미친놈을 마주한 듯. 점주가 슬금슬금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는 제 행동거지를 묵묵히 좇는 소년의 시선이 오싹한 듯 움츠러들었다.

“긴말 않으마. 안 된다.”

“왜죠?”

“내게 유명경이 있는 건 아는 놈이, 내가 그걸 어찌 얻어 낸 줄은 모르는 게냐? 후에 어떤 사달이 났는지도?”

“대강은 압니다.”

“안다는 놈이 그래?!”

이마와 목에 핏대를 세운 점주가 마구 삿대질했다.

“유명경으로 되살린 인간은 생전과 정반대가 된다. 다정하고 살갑던 성정이 비정하고 잔혹해지며, 공경하던 스승과 부모를 멸시하고, 은애하던 정인을 증오한다. 심지어 살인조차 서슴지 않음이야!”

네놈이 둘러메고 온 놈이 널 증오하고 저주할 거란 말이다!

노기 어린 고성을 한바탕 쏟아붓고도 마뜩잖은 듯 점주가 씩씩거렸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율해서가 무감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일순 당황하는가 싶던 점주였으나, 이내 코웃음을 쳤다.

“무어. 다 겪어 보기 전엔 그리들 호언장담하지. 오냐, 백번 양보해서 네놈은 괜찮다 치자.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괜찮다더냐? 죽은 놈 부모 형제부터 벗과 동료, 스승까지. 놈을 아끼고 사랑한 전부한테 허락받은 게야!?”

“그것도 괜찮을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소년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모두 죽었으니까요.”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거듭 호통하던 점주가 우뚝, 멈췄다.

돌겠네··· 구시렁거리던 점주는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지간해서는 적당히 겁이나 좀 주고 쫓아 버리는데. 이놈한텐 그럴 깜냥이 안 되니, 원.”

점주가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찰나.

대지가 흔들렸다.

“······! 뭐, 뭐야?!”

단순 착각인 줄 알았으나, 차츰 커져만 가는 진폭에 점주가 낯을 굳혔다.

율해서는 즉시 마루에서 물러났다. 마당에 내려서자 요동치는 지반이 보다 선명히 와 닿았다.

지붕에 겹겹이 쌓은 기와가 덜덜 떨리며 서로 부딪혔다. 처마에 걸어 둔 등롱이 풍랑을 조우한 듯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크게 덜렁거렸다.

이어서 건물 전체가 휘청였다. 집안에선 세간살이가 떨어지고 부딪혀 깨져 나갔다.

“아··· 안 돼!”

당장 무너질 듯 기둥이 요동치건만. 점주는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시신을 마당에 내려논 율해서가 그를 뒤쫓았다.

“안 돼, 이것만은···!”

내실로 들어선 점주가 항아리를 대뜸 끌어안았다.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모양새가 아무개에게도 퍽 익숙했다.

원혼을 수집한 항아리.

“밖으로 나오세요. 곧 지붕이 무너질 겁니다!”

“나는 됐어! 항아리, 이 항아리부터!”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항아리를 두고 떠나진 않으리라는 듯. 점주가 광적으로 집착했다.

이 와중에도 대지의 몸부림은 더욱 거세졌다. 서랍장에 나란히 진열한 가재는 모두 떨어지고 바닥에는 뒤집힌 함이 입을 쩍 벌리고서 속에 든 걸 죄다 토해 냈다.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생매장될 판국이라, 율해서는 점주의 맞은편에서 함께 항아리를 잡았다. 그러나 천근만근인 양 꼼짝도 않았다.

미간을 좁힌 율해서가 항아리를 살폈다. 겉면에 덕지덕지 붙은 부적을 해석한 소년이 점주의 어깨를 붙잡았다.

“항아리에 영혼을 봉인해 둔 겁니까? 평범한 방법으론 들 수 없겠는데요.”

“저, 저승차사의 포승줄로 포박하면 돼! 그럼 들 수 있어!”

“포승줄은 어디 있습니까?”

“저기 건넌방에······”

쿠웅! 와르르⎯

한쪽 벽면이 무너지고 천장이 삐딱하게 내려앉았다.

인제 와서 건넌방으로 가기엔 너무 늦었다. 율해서는 이를 악물고 항아리를 끌어안았다.

항아리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

점주의 눈이 부릅 뜨였다.

소년은 수천수만의 원혼을 품에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디뎠다. 걸음을 걷는다기보단 발을 질질 끄는 것에 가까웠다.

“먼저 나가 계세요!”

“하, 하지만···”

“방해만 됩니다!”

드물게 험한 말을 쓰면서까지 점주를 먼저 보낸 율해서는 홀로 남아 항아리를 옮겼다.

지면이 그네라도 타듯 이리 휘청 저리 휘청했다. 갈라진 천장에서 부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벽에 세워 둔 장이 기우뚱 쓰러지더니 길목을 막았다. 율해서는 넘어진 장을 우지끈, 밟아 부수며 나아갔다.

간신히 대청마루로 나온 찰나. 삐걱이던 벽이 푹 꺼지고 짓눌린 문틀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콰직- 대들보가 추락하며 마루를 뚫고 깊이 박혔다.

항아리를 든 팔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겨우겨우 항아리를 마당에 내려놓을 즈음, 율해서는 전신이 탈력하여 너덜너덜했다.

쿠구궁⎯···! 소년의 등 뒤로 집채가 폭삭 무너졌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고스란히 깔려 버렸으리라.

“······고생했네.”

점주가 치하했으나, 상황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드넓은 땅은 지금도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때 점주의 앞섬에서 푸른 불빛이 번뜩였다. 연경이다. 

점주가 허겁지겁하며 연경을 꺼내었다. 거울 반대편에서 정객이 인사할 겨를도 없이 외쳤다.

⎯ 군주, 대지의 군주가 깨어났습니다!

“무어?!”

항아리에 팔을 걸치고 주저앉아 있던 율해서가 흘깃 눈동자를 움직였다.

⎯ 물의 군주에게 이변이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속성 간 균형이 무너져 불의 군주가 폭주하고, 남방의 밀림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대지의 군주도 깨어난······

거울 저편에서 사달이 난 걸까. 정객의 얼굴 위로 파삭, 금이 갔다. 평범한 거울로 화한 연경에는 점주의 얼굴만이 비쳤다.

“남방이 불바다가 돼서? 그게 왜? ······설마 다화련이 괴로워 몸부림이라도 친다는 겐가?”

이때 당시만 해도 다환에는 ‘지진’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태곳적부터 줄곧 잠들어 있던 이 대지는 항시 넉넉하고 고즈넉했으므로.

하나 예고 없이 돌연 찾아든 재해는 모든 걸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인의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례적 공포가 뭍에 적을 둔 생명 일체에 각인되었다.

땅이 흔들리고 일다경도 채 지나지 않아 만물점이 반파됐다. 그러한 지진이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유명경이 필요하다 했지?”

초췌한 낯의 점주가 율해서를 찾았다.

“대신 군주를 감당할 수 있나? 아니, 감당해야만 한다. 현시점에서 일말이라도 가망 있는 건 너뿐이니.”

착잡한 듯 마른세수를 거듭한 점주가 씁쓸히 되물었다.

“그렇지 않나? 수호지신.”

움찔, 율해서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이 땅울림이 언제까지 이어질는지 도통 모르겠어. 하나 분명한 건, 이대로 있다간 다 죽는다는 거야.” 

동물이고 식물이고 할 것 없이. 이 땅에 살아가는 생명이라면, 모두.

“뭐든 좋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발 땅울림을, 군주의 발작을 멈춰다오.”

“······제가 뭐라고. 감히 대지의 군주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잖아!”

덥석. 점주가 율해서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를 수호신이라 여긴다! 산을 옮기고 지형을 바꾼 그날처럼, 부디 한 번만 더 기적을 일으켜다오!”

전례 없는 대지진은 인간 중 가장 어른인 만물점주가 고작 열댓 살 먹은 소년에게 의지하게끔 했다. 그 절박한 얼굴에 대고. 아무개는 할 수만 있다면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말한 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율해서는 삼도천 기슭을 헤매다 왔다고.

“······시도해 보겠습니다만··· 기대는 마세요.”

율해서가 긍정으로 답하자 검게 죽은 점주의 낯에 미미한 화색이 감돌았다. 율해서는 분명히 했다.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도련님은 반드시 살려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내 당장 그 망할 거울을 가져옴세!”

허둥지둥하며 점주가 무너진 건물 사이를 넘나들었다. 

율해서는 너른 마당에 누인 시신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기기묘묘한 화초에 통달한 소년 술사가 시신의 부패를 막기란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해원은 생전과 다를 바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목에 남은 액흔(扼痕)을 제외하고.

“······너도··· 날 용서하지 마.”

마지막 말을 남긴 율해서가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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