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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2)화 (122/138)

122화

율해서는 분주히 움직였다. 약재를 널어놓던 멍석을 가져와 시신을 옮겼다. 물에 적신 견으로 피를 닦아 내고 부릅뜬 눈을 감겨 주었다.

그들의 의복을 정돈하던 율해서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유족은······ 없지.”

함께한 날이 있어 대강이나마 사정을 꿰고 있다.

약초꾼은 조실부모했다. 의원 또한 일찍이 아내를 보내고 산적 무리에 아들과 며느리마저 잃은 후 오갈 데 없는 손녀를 데려왔다.

세 사람 모두 죽음을 알릴 유가족이 없다.

이 무렵, 일가친척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쯤은 흔해 빠진 일이라 딱히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하나 홀로 되뇌는 율해서의 어조는 한없이 공허했다.

시신을 감싼 멍석을 짊어지고 삽을 챙겼다. 약초꾼과 산 곳곳을 누빈 덕에 이 근방은 훤했다. 일전에 보아 둔 곳에 시신과 삽을 내려놓고 남은 두 구의 시신도 옮겨 왔다.

팍, 파악. 고요한 산속에 삽으로 흙을 퍼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율해서는 깊숙이 땅을 팠다. 고된 작업이었으나 단 한 차례도 쉬지 않았다.

제 키를 훌쩍 넘는 구덩이를 연달아 셋이나 파고서야 허리를 폈다. 젖은 이마를 훔쳐 낸 율해서가 나무줄기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땅이 갈라지고 지면에서 뻗어 나온 거무죽죽한 뿌리가 시신을 감싸 안았다. 마치 관처럼. 

산의 지기(地氣)가 응집된 명당은 술사에게도 도움이 된다. 율해서 본인의 신력은 거의 소모하여 없는 것과 마찬가지나, 산의 지기가 스스로 움직였다. 깊게 판 구덩이에 시신을 조심히 내려논 후 도로 흙을 덮었다.

낮에 시작한 작업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에야 끝이 났다.

봉긋한 무덤을 마주 보고 선 율해서가 삽을 지면에 꽂아 세웠다.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아 대지를 어루만지자 그를 중심으로 푸릇한 새싹이 자랐다.

삽으로 한껏 헤집어 짙은 고동빛 속살을 드러낸 땅에 연녹빛 물결이 번졌다. 그 푸르름이 무덤까지 뒤덮었다.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푸새를 틔워 낸 후. 율해서는 묏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소슬한 바람이 젖은 몸을 훑어 으슬으슬 떨리는데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서.

“······죄송합니다.”

마침내 율해서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많이 불안정해서요.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데. 무고한 사람을 해친 걸 알면, 정말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개자식이죠. 율해서는 스스로를 욕하고 비하했다.

“나중에··· 해원이 상태가 호전되면, 꼭 데려와서 직접 사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이었다. 도련님을 ‘해원’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건.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삽자루를 붙들고 간신히 일어섰다. 터덜터덜 내딛는 걸음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힘없는 발을 질질 끌며 가까스로 굴피집을 향해 가던 율해서가 멈칫했다.

인기척이 없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율해서는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붉게 젖은 황혼이 등 뒤로 비쳐 들었다. 앞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위태롭게 일렁였다. 서서히, 문을 열어 젖힌다.

공중에 매달린 발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은 율해서의 곁에 외따로 떨어진 신 한 짝이 굴러다녔다. 굴피집의 엉성한 들보는 한 사람분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끼익, 끼이익⎯ 힘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결코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끔찍한 소리였다.

***

사대귀인, 영화단주는 늘 그렇듯 정원에서 꽃을 가꾸고 있었다.

대륙의 중심,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세상 모든 꽃을 키워 내는 화왕 모란의 정원. 그곳을 모방하여 가지각색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인명보다 화초를 중시한 탓에 뒤에서 남몰래 화광(花狂)단주라 불리는 이다운 행태였다.

늘 그렇듯 정원에 머물며 한창 꽃에 몰두하던 찰나.

“멀쩡한 문은 놔두고··· 누가 감히 내 화원으로 축지했을까.”

겁도 없이.

스산하게 중얼거린 단주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그가 다름 아닌 영화단주인 까닭에. 마치 맹수가 기지개를 켜듯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실례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 그만.”

심기 불편한 단주의 귓가로 미미하게나마 웃음기 머금은 어조가 들려왔다. 영화단주가 휙 고개를 돌렸다. 

“유랑술사?”

고이 가꾼 정원 사잇길 가운데. 삿갓을 쓴 남자를 발견한 단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쳤어? 네가 무슨 정신으로 여길 와?“

“저도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데에 동의합니다만··· 못 올 곳에 온 사람 취급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저는 지금껏 당신이 보낸 감시자들을 손 한번 대지 않고 고이 돌려보냈는데요.”

“그건 네가··· 아니 됐고, 일단 그 존댓말부터 치워 줄래? 소름 돋거든?”

진심으로 뜨악하다는 듯. 영화단주가 팔등을 마구 문질렀다.

“잊은 모양인데, 우리 동갑이야.”

스스럼없이 말 붙이는 모양새에 유랑술사의 눈이 자못 가늘어졌다.

“죄송하지만, 저희 구면인가요?”

기묘한 광경이었다. 영화단주는 그를 익히 아는 듯 살갑게 굴었으나, 유랑술사는 초면인 듯하니.

영화단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 하긴 벌써 이백 년이나 지났으니. 너야 호적에 이름 올릴 때부터 유명인사였고, 난 그저 그런 흔해 빠진 놈이기도 했고.”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신 영화단주가 짧게 털어놓았다.

“율해경. 화양 율씨 효경파 42세손.”

세간에선 사대귀인 영화단주라 불리는 그가,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제 이름을 발음했다.

“아아, 당신이었군요? 화양 율씨를 재건하고 종적을 감췄다 들었는데. 이런 곳에 계셨네요.”

화양 율씨가 무너지고 종주는 실종되었으며 그 부인은 죽었다.

그러나 화양에서 멀리 떨어진 효경파는 비교적 전화(戰火)를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연나라가 망한 후 흩어진 일족을 모아 주도적으로 세가를 재건했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이 남자, 율해경이다.

“보아하니 내가 누군지도 몰랐던 것 같고. 옛이야기로 회포나 풀잡시고 온 건 아닌 듯싶은데.”

“네에, 맞아요. 제 용무는 율해경이 아니라 영화단주 님께 있거든요. 대지의 군주, 다화련을 지척에서 모시는 당신 말이에요.”

자박자박. 너른 꽃밭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좁힌 술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도자역에 대해 아시나요?”

“······.”

“어떤 괴한이 다화련을 자칭하며 도자역을 퍼트렸다더라고요. 당신이라면 모르지 않겠죠, 영화단주.”

영화단주, 율해경은 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에게선 놀람이나 당황보다는,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참담함이 엿보였다.

“그래.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네가 도자역, 그 망할 저주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날.”

오만상을 찌푸린 율해경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뭐가 알고 싶은데? 정말로 다화련이 도자역을 퍼트렸냐고? 맞아. 연나라 황실이 제 몸 위에서 사는 꼴은 못 참아 주겠다더라. 주단 금씨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대지의 군주, 다화련은 이백 년 전에 이미⎯”

“야, 야. 여기까지 와 놓고 새삼 모른 척하지 마.”

유랑술사의 반론을 끊어 낸 율해경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현시점에서 스스로 다화련이라고 칭하는 작자가 누구겠어? 내가 이 나이 먹고도 아직 뒤치다꺼리해 줄 놈이 누구겠냐고!”

“그래. 모른 척하지 말자, 우리.”

두 명의 사대귀인이 아닌, 보다 먼 뒤편에서 들려온 동조의 음성.

제삼자가 끼어든 순간. 율해경의 낯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구겨졌다.

스산한 바람이 감돌고 정원의 꽃내음이 한껏 끼쳐 들었다. 잠시 굳은 듯 있던 유랑술사가 몸을 뒤로 돌렸다. 상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형님.”

공중에 떠오른 색색의 꽃잎이 가벼이 나부꼈다.

바람결에 들썩이는 삿갓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유랑술사는 인사를 돌려주었다.

“······오랜만이네요, 도련님.”

***

율해서는 달리고 또 달렸다. 땅을 디딜 때마다 등에 짊어진, 차게 굳은 시신이 연신 들썩였다.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율해서의 안에서, 그의 눈으로 보는 풍경이 어쩐지 낯익어서. 아무개는 자꾸만 초조해졌다.

풀숲을 내달리고 무성한 덤불을 넘어 빽빽이 들어선 나무 사이로. 마침내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萬物店]

만물점.

현판을 스치듯 일견한 율해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콰앙⎯! 문짝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쉬이 떨어져 나갔다.

“아니, 언 놈이 남의 집 대문을···!”

마침 가게에 머물던 만물점주가 허둥지둥 마루로 나섰다. 하나 버선발에 신을 꿰 보기도 전에, 맹수처럼 들이닥친 인영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저앉은 점주의 면전에서. 한 발로 마루를 딛고 선 소년이 몸을 기울였다.

“당신에게⎯···”

소년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 녀석을 올려다본 점주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유명경··· 이라는 게 있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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