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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1)화 (121/138)

121화

당시 상황을 주도한 건 율해서였다. 한창 잘 자던 중 냅다 찬물 뒤집어쓰고 일어났더니 ‘넌 한 달 뒤에 죽는다’ 따위의 소릴 들으면. 누구든 어안이 벙벙할 테지.

하물며 날이 갈수록 뱃가죽 너머로 뿌리가 자라는 게 훤히 보이는데. 그 공포에 어찌 의심이나 한번 해 볼 수 있겠는가. 율해서의 경험과 감각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 아무개조차도 깜빡 속아 버린 참이거늘.

거짓을 말하면 심박이 오른다. 긴장하고 땀 흘리기도 하며, 눈빛이 흐트러지거나 코를 매만지기도 한다.

한데 율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신력이 바닥을 쳐서 술법도 못 쓰는 주제에. 혈혈단신으로 산채를 몇 군데나 들쑤시면서. 그럴싸한 대책은 세워 놓고 대범하게 구는 줄 알았더니, 비장의 무기랍시고 가져온 게 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간을 배 밖에 두고 다니기라도 하나. 어찌 돼먹은 정신머리기에 숨 쉬듯 태연자약하게 거짓부렁을 늘어놓지?

“두목이란 분은 잘 찾아보세요.”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뒤통수라도 맞은 양 멀거니 보던 산적이 의문을 표했다.

“저 빼고 모두 기절이라도 하듯 느닷없이 잠들었습니다. 꽃줄기마냥 손쉽게 목을 딸 수 있었습죠. 한데 번거로운 거짓을 꾸미고 제 발로 관아를 찾게 유도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왜 당신들을 죽여야 합니까. 산적이라서?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이라?”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한탄하듯 연거푸 숨을 내쉰 율해서가 무릎을 폈다.

“일개 술사 나부랭이에게 누굴 징벌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일 하라고 세워 놓은 게 벼슬아치일진대.”

그런 일 해야 할 사람이 부패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율해서가 살짝 덧붙였다.

“요즘은 전후 복구 작업으로 일손이 부족해서 거의 노역형을 받습니다. 가서 형을 받든, 숨어서 화전을 일구든, 알아서들 하세요.”

“이, 이제 와서··· 허면, 우리 산채는 왜 건드린 겁니까? 이리 발을 뺄 거라면···!”

“옆집이 청소를 게을리해서 쓰레기장이 되는 거야 그쪽 사정이죠. 한데 쓰레기가 쌓이고 쌓여서 우리 집 마당까지 넘어오면, 치울 수밖에 없잖아요.”

율해서는 가사노동의 고충을 논하는 주부처럼 토로했다. 청소는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정작 안 하면 바로 티가 나더라고.

아무개는 그의 논리가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다. 단지 쓰레기뿐이면 차라리 다행이게? 쓰레기를 방치해 두면 썩은 오물에 갖은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거늘. 쓰레기가 우리 마당으로 넘치기 훨씬 전부터 날벌레로 몸살을 앓으리라.

“산채로 돌아가거든 잘 전해 주세요. 당신을 고발하거나 멸구하지도 않고 내버려 두는 이유입니다.”

하는 양이 꼭 개미를 퇴치하는 것 같다.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이기보다는, 약을 두고 서식지로 운반하도록 하여 연쇄적으로 퇴치하는.

그나저나 웬 떨거지한테 잡힌 바람에 시간만 낭비했다. 율해서는 그 말을 남기고 즉시 골목을 나섰다. 

오던 때보다도 한층 급한 걸음으로 가는데 전과 달리 거리가 어수선했다. 어쩐 일인가 싶어 보니 나졸이 새로 용모파기를 붙이고 있었다.

율해서는 다시금 의원으로 돌아가 보았다. 의원 어르신과 약초꾼, 손녀까지. 모두 일찌감치 자리를 비웠다.

수배령을 보기 전에 출발했으니 당장은 괜찮겠지. 율해서는 서둘러 고을을 벗어났다.

잰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는데 사람 그림자라곤 코빼기도 뵈질 않았다. 지체한 동안 의원과 약초꾼이 훌쩍 앞서가 버린 모양이다. 해원에게는 의원님보다 먼저 오겠다 했는데. 아무래도 지키지 못할 성싶었다.

오르막길 저편에 너와로 이은 지붕이 보였다. 산채에서 거짓부렁을 늘어놓을 때도 이리 초조하지 않았건만. 조급증이 난 듯 오르막길을 성큼 뛰어넘던 율해서가 불현듯 걸음을 늦췄다.

어째서··· 기척이 하나밖에 없지?

마루 아래 놓인 신은 세 쌍. 하나는 해원의 것으로 남은 둘은 의원과 약초꾼의 것이다.

집안에 사람이 셋일진대. 어찌 인기척이라곤 하나뿐인가.

소년의 발목을 잡은 불길함이 아무개에게로 전해진 그때. 또 다른 신이 보였다.

가지런히 놓인 세 쌍의 신과 달리 한 짝만 남아 멀찍이서 나동그라진 꽃신. 아무개는 꽃신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의원 어르신의 손녀.

천천히. 무거운 추라도 달린 듯 느지막이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이를 악물고 문을 열어젖혔다.

사방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혀, 형님···”

깨지고 널브러진 세간. 그 너머로 세 구의 시신이 언뜻 보였다.

“형님, 이, 이 사람들이··· 저희를 속이고, 밀고하려고···! 그래서··· 어, 어쩔 수 없이···.”

해원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횡설수설했다. 공포에 잠식된 녀석은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부, 분명 둘이어야 하는데··· 뒤에 따라붙은 기척이···!”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떠오른 즉시 마구잡이로 내뱉는 형국이었으나, 아무개는 이해할 것 같았다.

형님이 사라지고 홀로 남아 불안한 중에 약초꾼이 의원을 데려왔다. 여기까진 형님께 미리 전해 들은 바가 있으니 힘겨우나마 참고 감내할 수 있었다.

몰래 뒤쫓아온 손녀를 눈치채기 전까지는.

“혀, 형님···.”

피 칠갑을 한 해원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기어 왔다. 차마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마루에서 굳은 듯 멈춰 선 형님을 향해. 몇 번이고 휘청이고 넘어지며.

“주, 죽이려고 한 건, 아니, 아니었는데··· 저, 저도 모르게, 그만···.”

약초꾼과 의원은 단둘이서 방문할 작정이었겠지. 율해서의 비밀을 지켜 주고 위험한 냄새가 나는 곳에 손녀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하나 실상을 모르는 손녀는 저만 따돌리는 행태가 미심쩍고 불만스러웠을 터다. 심지어 흠모하던 술사님과 관계된 듯하니 오죽했을까.

하여 몰래 뒤를 밟았고 이는 불안하기 짝이 없던 해원에게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아무개는, 율해서는 알고 있다. 수배령은 저들이 떠난 이후 고을에 당도했다. 율씨 형제의 행태가 다소 수상쩍다 해도 그뿐. 차후 귀갓길에서 용모파기를 보고 변심할지언정, 지금 예서 만큼은 딴생각을 품을 까닭이 없다.

즉. 이 상황은 과민해진 해원이 오해로 빚은 불의의 사고였다.

“제가··· 사, 사람을··· 죽여 버렸어요. 어, 어쩌죠? 아무리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도··· 주, 죽이는 건··· 안 되는데···.”

해원은 그 사실을 몰랐다.

만약, 녀석이 진상을 알게 된다면⎯···

“······죄송합니다.”

털썩. 무릎 꿇은 율해서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제가 부족하여··· 부주의한 탓에, 이 같은 참상을 겪게 했습니다.”

그가 사죄하는 상대는 누굴까.

도련님?

죽은 세 사람?

“······형님···?”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불안한 듯 바라봤다. 잠시간 묵념한 율해서는 해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자리를 옮기죠.”

율해서는 얼마 남지 않은 축지부를 소모하여 즉시 이동했다.

약초꾼의 허름한 너와집만도 못한, 작은 굴피집이었다. 일전에 약초꾼을 도와 산을 타면서 발견한 곳이었다.

율해서는 너저분한 굴피집에 도련님을 모셨다.

“······죄송해요.”

잔뜩 눌러쓴 삿갓 끄트머리를 구겨 쥐며 해원이 어물어물 사죄했다.

“제가 너무 못나서··· 저 때문에 형님이 고생하시는데, 저는, 저는··· 자꾸 형님을 원망하고 싶어져서···.”

“하세요.”

율해서는 덤덤히 답했다.

“도련님은 절 원망할 이유도, 자격도 충분합니다. 원망하세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그 대답이 줄곧 억누른 감정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해원이 젖은 목소리로 토로했다.

“형님께선 화양을 바로 떠나지 않은 걸 후회한다셨지만, 저는··· 곳간을 연 걸 후회해요.”

율해서가 처음 교전에 개입한 벌로 갇혔던 날. 그 일을 거론한 것이다.

“전란이 벌어질 땐 가장 먼저 도망친 황제가··· 종전 후 복귀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술사 탄압이라니··· 심지어 형님이 계신 우리 가문을 본보기로 토사구팽하고··· 이래서 선조들께서 관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셨나 봐요.”

도와줘 봤자 배신만 당하니까.

“알아요. 형님 탓은 아니죠. 외환(外患)을 물리치는 게 어찌 잘못이겠어요?” 

저도 알아요. 아는데······ 

“하필 형님이어야 했을까요?”

되묻는 음성에 물기가 한층 선명히 맺혔다.

“다른 술사들이라고 상황을 모르지 않잖아요. 다 아는데도 전력을 보존했던 건, 크고 먼 세상보다 작고 가까운 가족을 지키고자 함이었죠.”

삿갓이 설핏 들쳐 올랐다.

“형님은 가족을 생각해 보셨어요? 아니, 그 전에. 화양 율씨를 가족으로 여기긴 하셨어요?”

그늘진 삿갓 아래. 해원의 시선이 율해서를 향했다.

“제게는 형님이 가족이었는데··· 형님은 제 가족이었던 적이 있긴 한가요?”

율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원망을 감내했다.

“살아계셨으면서. 어째서 화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형님이 살아계신 줄 알면, 함부로 굴지 못했을 텐데···!”

확실히. 수호지신의 생존 사실이 일찌감치 알려졌다면, 이렇듯 본보기 삼아 대놓고 짓밟진 못했겠지.

반면 황실의 경계는 더욱 심해졌으리라. 죽은 사람이니 맘 편히 영웅 취급해 주는 거지. 생환 사실을 알았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명을 깎아내렸을 터.

거기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지. 수호지신이 비술사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꼴이 된 게 밝혀졌다면··· 몸을 회복하기 전에 죽이려 들었으리라.

결국 율해서가 전력을 온전히 회복 못 하는 한, 도긴개긴이다.

“어처구니가 없죠?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님이 무사히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기뻐야 마땅한데. 도리어 원망이 들다니······.”

해원이 재차 고개를 떨궜다.

가문이 무너지고 일가친척은 물론 모친마저 돌아가셨다. 심지어 수배당해 전국 각지로 용모파기가 널리 퍼지고 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 해도 절망적일 상황.

“자꾸 형님을 탓하려는 제가 싫어요. ···끔찍해.”

한데 녀석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형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요. ······혼자 있게 해 주세요.”

해원이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삿갓에 가려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굳은 듯 머물던 율해서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굴피집을 나선 율해서는 즉시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녀석의 시선을 따라 전방을 본 아무개는 바로 깨달았다. 약초꾼의 너와집으로 가는 길이다.

“쓸모없는 것.”

나직이 읊조리는, 작은 음성.

“배은망덕하기도 하지.”

홀로 외는 말마디가 묘하게 익숙했다. 전에 어디서 들어 본 걸까. 기억을 곱씹던 아무개는 너와집에 다다르고서야 떠올렸다. 

죽기 전, 부인이 율해서를 꾸짖으며 한 말이다.

탁— 문을 열고 들어간 율해서는 피로 젖은 참혹한 내부를 마주하고 속삭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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