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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0)화 (120/138)

120화

“산채에 들른다 하시고 감감무소식이라 걱정했는데,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하던 일도 팽개치고 마중 나온 약초꾼이 해원을 발견하고 눈을 끔뻑였다.

“술사님 일행이세요?”

“죄송하지만, 당분간 도련··· 이분을 여기서 모셔도 될까요?”

술사님이 ‘이분’이라 존칭하는 상대. 약초꾼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세요. 몸도 성치 않아 보이는데 어서 들어오세요.”

해원을 부축하며 너와집에 들어선 율해서는 그의 지정 자리나 다름없던 모퉁이에 도련님을 앉혔다.

털을 바짝 세운 들짐승처럼 신경이 곤두선 해원이 두 손으로 삿갓을 푹 눌러썼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절박한 손짓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약초꾼을 따로 불러낸 율해서가 집 안에선 들리지 않도록 멀찍이 거리를 두고서 운을 뗐다.

“일전에 뵌 의원님을 모셔 올 수 있을까요? 도련··· 저분이 근래 고초를 겪었거든요. 혹 잘못되기라도 할까 염려되네요.”

“걱정 마세요. 어르신은 술사님이 부르면 바로 달려오실 거예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사정이 있어 도··· 저분이 얼굴을 드러내선 안 됩니다. 의원님을 모시는 것도 비밀리에 해야 해요.”

“얼굴을 가리고 진료받으면 되겠죠? 어르신께도 말씀드려서 다른 이목을 피하도록 조심할게요.”

“감사합니다. 불쑥 찾아와서 실례만 끼치네요.”

겨우 한숨 돌린 듯 피로한 기색을 한 율해서가 마른세수를 했다. 고심이 깊은 듯하여 주저하던 약초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다지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저는 믿으셔도 됩니다!”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가락 사이로. 율해서의 눈동자가 약초꾼을 향했다. 그는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실은 술사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산중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으니까요. 의원 어르신을 모셔 오기 전에 홍의를 다른 옷으로 갈아입혀 드린 것도 저고요.”

약초꾼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술사님이 누굴 데려오시든 상관없습니다. 설령 다환을 침범한 이북의 오랑캐라 해도요! 저 같은 필부한텐 말 못 할 깊은 사정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의원 어르신도 마찬가지라고. 약초꾼이 덧붙였다.

“수면향 농도를 조절하느라 어르신과 상의하셨잖아요? 산채를 정리한 게 술사님인 줄 아시고 엄청 고마워하셨어요! 실은 어르신 아드님이 산적 때문에··· 흠, 흠. 하여간 산적을 무진 증오하시거든요.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셨는데, 술사님이 훌쩍 사라져서 아쉬워하셨어요.”

약초꾼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라고.

“그러니까, 저희는 믿으셔도 돼요. 정말로요.”

한껏 진지한 소릴 늘어놓은 약초꾼은 새삼 민망했던 건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럼 저, 저는 이만··· 의원 어르신을 부르러 갈게요!”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약초꾼이 허둥지둥 산길을 내려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율해서가 너와집으로 돌아갔다.

“도련님.”

벽에 기대어 앉은 해원이 무릎을 그러안은 채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집주인이 의원을 부르러 갔습니다. 제게 은혜를 입었다 여기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약초꾼이 정체를 안다 고백한 순간.

율해서의 손끝에 날 선 기감이 맺혔다. 즉시 갈무리한 탓에 약초꾼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무개는 알 수 있었다.

혹 그들의 대화가 자칫 일말이라도 어긋났다면, 아마도 약초꾼은···

“형님······ 저 버리셔도 돼요.”

형님은 도망 다닐 필요 없잖으냐고. 자기만 없으면 편히 지내실 수 있지 않냐고. 해원이 갈라진 음색으로 토로했다.

“허튼소리.”

율해서가 짧게 일축했으나, 해원은 멈추지 않았다.

“허튼소리가 아니라··· 형님이 후회하실까 봐 그러죠.”

“후회라면 진작 하고 있었습니다.”

움찔, 해원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율해서가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덧붙였다.

“얼굴 확인한다고 괜히 시간만 지체했어요. 그때 바로 떠났어야 했는데.”

파국을 맞이한 시점에서 한시라도 빨리 화양을 벗어나야 했다. 해원이 보지 못하게.

결국은 전해 들을 테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건너건너 전해 듣는 것은 충격이 다르잖은가.

“······형님이 후회하는 게··· 그거예요?”

한데 확인하듯 되묻는 해원의 어투가 묘했다. 따로 기대한 바가 있었던 듯. 꼭 실망이라도 한 마냥.

아무개가 느낀 바를 율해서라고 모를 리 없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입술을 달싹이던 율해서는 결국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예서 쉬고 계세요.”

“어, 어디 가세요?”

“근처를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자길 버려도 된다더니. 막상 떨어지려 하자 해원은 몹시 불안해했다. 오른손 엄지손톱은 심하게 물어뜯겨 보는 것만으로도 아플 지경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율해서가 삿갓을 가볍게 두드렸다. 머리를 대신해 쓰다듬듯이.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의원님이 방문하기 전에 돌아올 거예요. 혹 의원님이 저보다 먼저 오셔도 얼굴은 꼭 숨기세요. 미리 언질해 두었으니 그쪽에서도 양해해 줄 겁니다.”

발바닥에 아교라도 바른 것 같다. 율해서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내디뎠다.

율해서는 기척을 죽인 채 산을 내려갔다. 그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도중에 약초꾼을 제쳤으나, 상대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약초꾼보다 먼저 고을에 당도한 율해서는 여러 점포를 오가며 분위기를 살폈다. 주된 화제는 근방 산채들이 하룻밤 새 와해되었다는 얘기였다. 화양에서 벌어진 사달을 거론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수배령이 이곳까진 아직 다다르지 못한 듯싶었다.

그 후엔 의원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손녀가 할아버지를 도와 환자를 보살피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약초꾼이 뒷문으로 살금살금 들어왔다. 먼저 발견한 손녀가 인사하려 했으나, 약초꾼이 손을 마구 내저으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왜 그래?”

“쉿, 쉿! 어르신께 긴히 드릴 말이 있어.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돼.”

외딴곳으로 불러내 사정을 설명하자 의원은 흔쾌히 수락했다. 기감을 넓혀 대화를 엿들은 율해서가 희미하게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철두철미하달지, 의심병이 짙다 할지.

약초꾼의 호소는 율해서에게 온전한 신뢰를 끌어내지 못했다. 해원에게는 안심해도 된다 했으나, 정작 본인은 이렇게 직접 확인하고서야 의심을 거두었으니.

조용히 짐을 꾸리는 세 사람을 뒤로한 채 율해서는 의원에서 벗어났다.

곧장 귀가할 작정으로 사붓이 걸음을 옮기던 율해서가 돌연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요란한 발소리가 울리고 뒤따라 낯선 사내가 헐레벌떡 골목에 들어섰다. 막다른 길이었다.

놀란 사내가 화등잔만 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찰나.

“뭡니까.”

그의 뒤편, 골목 입구에서 율해서가 나타났다.

사내가 질겁하며 뒤돌았다. 막다른 벽과 율해서 사이에 갇힌 꼴이었다.

“제 뒤를 밟았죠?”

“그, 그게···.”

당혹하여 발을 동동 굴리던 사내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납죽 엎드렸다.

“사, 산채에서 당신을 봤습니다! 모두 잠든 사이에 두목님께 무언가 먹이셨죠!”

수면향의 효과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 사내는 약이 잘 듣지 않는 체질인가 보다.

“그날부로 두목님이 느닷없이 부두목께 자리를 넘기고 사라지셨습니다. 두목님을 한창 찾던 중에 우연히 당신이 보여서, 혹시나 하고···.”

율해서는 이백 리 내의 모든 산채에 같은 일을 벌였으나, 대처는 서로 상이했다.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며 버티던 중 식인화가 목덜미까지 뿌리를 박자 목숨을 부지하려 관아로 달려갔다. 또 어느 누군가는 이렇듯,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사내가 찾는 두목은 수하들에게 상당히 신임을 받았던 듯싶었다. 갑자기 실종됐는데도 아랫놈들이 열심히 찾아다니다니.

그래 봤자 산적이지만.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추적자가 아니다. 율해서는 그대로 돌아섰다. 산뜻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으나, 실상은 혼자 있을 해원에게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이었으리라.

그를 얼떨떨하게 올려다보던 산적이 네 발로 허겁지겁 기어 왔다. 바짓단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심산이 빤하여 율해서는 서둘러 몸을 뺐다.

“저희 두목님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울 듯 일그러진 얼굴로 절박하게 묻는 사내에게. 율해서는 선선히 답해 주었다.

“섭취 시 한 달 내로 사망에 이르는 독을 먹이고, 살고 싶거든 관에 자수하라 했습니다. 원님께 해독약을 드렸다고요.”

정확히는 독이 아니라 식인화였지만. 그리 자세한 사정을 털어놀 필요는 없지.

“그, 그런··· 두목님이 시한부가 된 겁니까?! 저희 두목님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코 관에 굽힐 분이 아닙니다!”

그놈들은 항상 가진 놈들 편이라고요! 두목은 뒷돈 몇 푼 받고 거짓 판결한 작자 탓에 가족을 잃었단 말입니다! 우리 두목이 나고 자란 고향도 등지고 예까지 어찌 왔는데···!

저보다 훨씬 큰 어른이 채신머리없이 길바닥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린다. 절로 비어져 나오는 한숨을 억누른 율해서가 무릎을 굽혔다. 시선이 한층 가까워지자 산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거짓말입니다.”

“······네?”

“한 달 내로 죽는 거. 거짓말이라고요.”

보기에는 좀 그래도 몸에 해가 되는 건 아니라고. 율해서가 첨언했다.

순간 아무개는 제 기억을 의심했다.

식인화의 일종이라던 침수초(侵壽草) 씨앗. 뿌리가 뱃가죽 너머로 혈관처럼 거뭇거뭇 비치는데 그 모양새가 참으로 악랄하더랬다. 해독제 없이 제거하려거든 복부를 생으로 도려내야 할 판이었는데.

그게 다 거짓부렁이라고?

이거 미친놈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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