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율해서는 답답한 가면으로 시종일관 얼굴을 감추고도 모자라 일족의 비전 술법을 은폐하느라 전심전력으로 싸우지도 못했다.
누구는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고자, 출신을 숨기느라 개고생할 동안. 종주라는 놈은 술자리에서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못 하고 함부로 나불거렸단 건가.
“······종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모, 모르겠어요.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으셔서···.”
부, 분명 괜찮다고 하셨는데··· 걱정 말라고, 다 잘될 거라고 하셨는데···
해원이 횡설수설했다. 화양 율씨가 무력이 뛰어난 일족은 아니라 하나, 그래 봬도 오대세가의 일익일진대 어찌 이리 속수무책인가 했더니. 종주란 놈이 호언장담만 늘어놓다 정작 사달이 나자 도주한 모양이다.
무능한 지도자의 표본이다. 제 한 몸 건사하겠답시고 가솔을 죄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꼴이잖은가.
결국 마지막까지 가문을 지킨 이는 종주가 아닌 그 부인이었다.
사방이 불바다인 까닭에 화양 술사들은 본신 전력의 반절도 채 쓰지 못했다. 진형이 무너지고 대전 앞까지 줄줄이 밀려났다. 서로 면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부인과 침입자 간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리 어수선한 데서 뵙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부인.”
주단의 술사들 가운데 한 청년이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부인은 서릿발처럼 스산하게 노려봤다.
“금자욱.”
“종주님께선 공사다망하시어 예까지 미처 들를 겨를이 없으셨습니다. 하여 아버님을 대신해 제가 직접 왔으니 너무 무례하다 책하진 말아 주십시오.”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금자욱 저놈이 현 주단 금씨의 종손인 모양이다.
“어리석구나.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고 그 후에는 어찌할 셈이냐. 석씨, 염씨, 하씨 모두 잠자코 당해 준다 하더냐? 운 좋게 오대세가 중 넷을 멸문시킨다 한들 마찬가지. 그리되고도 너희 금씨만은 멀쩡할 성싶으냐?!”
“죄인을 포박하라!”
주단의 술사들을 선봉에 세우고 관군이 들이닥쳤다. 술사를 상대하는 건 같은 술사에게 맡기고 실리를 챙긴 셈이다.
술사와 관군이 손잡았다. ‘정사(政事)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을 대며 북방의 침략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던 과거가 심히 우스워졌다.
“이리 오너라!”
부인은 두 팔 벌려 적을 맞이했다.
“더, 더 들어오거라. 아직도 뒤에 남았느냐? 이리 늑장을 부려서야 어디 죄인을 잡을 수 있겠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대범하고 호기로운 기세였다. 한데 왜일까. 묘한 불안감이 아무개를 잠식했다.
마찬가지였을까. 율해서가 옷깃 새로 대강 쑤셔 넣은 축지부를 꺼내 들었다. 마당의 합동진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발할 뿐이다.
저건 뭐 하는 술법이기에 적이 지척에 들이닥치고도 발현하지 않는 걸까. 짧은 의문이 뇌리를 스친 순간.
“크아악!”
진법을 유지하던 술사 중 하나가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목을 그었다. 자결한 것이다.
연달아 한 사람씩. 차례차례 돌아가며 피를 흩뿌렸다. 뻔뻔한 낯으로 무례를 운운하던 금자욱의 낯이 굳었다.
한발 앞서 떠난 가솔들을 시선으로나마 배웅한 부인이 최후의 순간, 단도를 높이 쳐들었다.
“감히 이 화양에 발 들인 걸 후회하게 해 주마!”
즉시 율해서는 반사적으로 해원의 눈을 가렸다. 검날이 목을 꿰뚫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피를 한껏 머금은 진법이 요동쳤다. 아니, 지면이 들썩였다.
시꺼먼 덩굴이 땅 아래서 솟구쳤다.
“이, 이게 뭐야!?”
몇 아름은 될 법한 굵은 덩굴이 부인과 술사들의 시신을 감아올렸다. 살과 근육에 뿌리 박고 피를 흠씬 빨아들여 붉디붉은 꽃을 피운다. 아무개는 저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식인화.
저들은, 궁지에 몰린 화양의 술사들은, 그들 자신을 제물로 바쳐 식인화를 불러냈다.
“전부 다 비켜!”
“이, 일단 도망을··· 으악!”
소환된 식인화는 기존에 율해서가 쓰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끊임없이 뿌리를 뻗고 덩굴을 휘둘렀다. 한번 감긴 덩굴은 잘라내도 소용없었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은 죽지도 않고 별개의 생명인 양, 살갗을 파고들었다.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 식인화는 순식간에 대전을 뒤덮고 마당을 넘어 정문 계단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식인에 취한 꽃은 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에 타는 것보다 증식하는 속도가 월등히 앞섰다. 분명 식물임에도 미쳐 날뛰는 모양새가 사냥감을 포식하는 맹수를 연상케 했다.
식인화의 덩굴이 해일처럼 퍼지고 관군이 전멸했다. 주단 술사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대지가 암녹빛 덩굴에 뒤덮였다.
전면에 나선 금자욱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녹음에 파묻혀 비명 하는 놈의 목구멍을 화분 삼아 새빨간 혈화가 입 밖으로 봉오리를 틔웠다.
마침내 율해서가 축지부를 사용했다. 시야가 뒤집히고 배다른 형제는 나란히 사라졌다.
해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예 넋을 놓은 것 같았다.
늘상 재잘거리던 입은 굳게 닫히고 천진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사소한 것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소스라쳤으며, 작은 일에도 최악을 가정하고 매양 두려워했다.
몸도 성치 않았다. 한낮에도 오한이 든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입술은 보랏빛을 띠었다. 먹는 족족 게워 내니 고운 얼굴이 핼쑥해지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부쩍 두드린 탓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가만있다가도 종종 숨이 막힌다며 질식할 듯해서 애간장을 태웠다.
“용모파기가 붙었습니다. 이쪽은 돌아가야겠어요.”
해원에게 삿갓을 씌워 주며 율해서가 뒤로 물러났다.
해원은 불안스레 눈을 굴리며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릴 적부터 습관이라 해원의 오른손 엄지손톱은 왼손의 반절밖에 안 되었다. 어느 정도 자라고부터는 자제해 왔으나,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자 나쁜 습관이 도진 듯싶었다.
어찌나 씹어 댔는지. 엄지손톱이 너덜너덜하다 못해 피가 비쳤다. 막으려는 듯 손 들던 율해서가 도중에 멈췄다. 내버려 두기로 한 모양이다.
큼직한 자재를 짊어진 일꾼의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길 양쪽으로 비켜 주었다. 개미처럼 줄지은 일꾼들이 향한 곳은 공사터였다. 붉은 기와에 순백색 현판. 수호지신을 모시는 사원을 짓는 중이다.
율해서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해원을 이끌고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고을 외곽에 다다를 즈음. 땅- 따앙⎯! 벼락같은 소리가 울렸다. 부쩍 예민해진 해원이 대번에 질겁했다.
“혀, 형님··· 누가 저희를 발견한 게···.”
“진정하세요. 석수(石手)입니다.”
율해서는 자지러지는 해원의 어깨를 붙들고 거듭 안심시켰다.
너른 마당에서 석공이 한창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끌에 망치를 두드릴 때마다 요란한 소음이 번졌다.
마당에는 이미 완성된 석상이 여럿 있었는데, 자세만 다를 뿐 하나같이 같은 외관이었다. 홍의백면.
“······여기도 저기도··· 온통 형님이네요.”
해원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모든 사람이 형님을 찬미해요.”
돈이 썩어나는 의뢰인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느 석상은 잠자리 날개처럼 반투명하고 윤기 나는 노방 원단으로 홍의를 지어 입혔다. 또 어떤 석상은 붉은 산호석으로 홍의를 재현했다. 그들 모두 하얀 석재로 정교하게 세공한 가면을 얼굴에 덧씌웠다.
공허한 눈길로 석상을 물끄러미 보던 해원이 돌연 질문했다.
“······이제 만족하세요?”
찰나의 순간, 아무개는 무언가 어긋나 버린 것을 직감했다. 배다른 형제의 우애가 비틀리는 전조.
그를 흉내 낸 석상보다도 굳어 버린 율해서가 해원을 일견했다. 뒤늦게 말실수를 자각한 해원의 낯이 파리했다.
“아, 아니··· 실언! 실언이었어요. ······잊어 주세요.”
죄송해요, 하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덧붙인 해원이 고개를 떨궜다. 녀석이 기침했다.
콜록, 콜록··· 기침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무섭도록 이어지는 기침이 버거운 나머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도련님?”
율해서가 덩달아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자 해원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일 테지만, 아무개가 보기에도 녀석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각혈할 듯 기침해 대니 지나가던 행인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쫓기는 신세라 이리 괴로워하는데도 형편을 봐주기가 어려웠다.
아랫입술을 사리문 율해서가 해원을 부축해 일으켰다.
“조금만 참으세요. 의원을···.”
“무슨, 쿨럭··· 의원, 이요?”
거칠거칠한 기침 사이로 실소가 아프게 섞여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용모파기가··· 널리 퍼졌을 텐데······ 대체, 어느 의원, 이 저를··· 봐 주겠어요?”
기침하면서도 해원은 킥킥 쉬어 빠진 웃음을 흘렸다. 실성한 사람인 양.
그런 해원을 부축하며 율해서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화양 술사들의 동귀어진으로 주단 금씨 적장자가 죽고 관군이 몰살당했다.
주단 금씨야 술사들 간의 분쟁이라 일축할 수 있겠으나, 관군은 사정이 달랐다. 국가의 녹을 받는 자들이 공무를 수행하던 중 살해당했다. 이를 가만두고 볼 위정자가 어디 있으랴.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화양 율씨 종주와 그 후계를 찾는 수배령이 전국 각지에 속속들이 퍼지고 있었다.
“······의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율해서가 입을 열었다.
“전에 신세 진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이라면··· 아마 괜찮을 겁니다.”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에 들어선 율해서가 축지부를 사용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아무개에게도 제법 익숙한 전경이었다. 궁벽한 산골 약초꾼의 너와집.
“···? 술사님?”
마당에서 약재를 정리하던 약초꾼이 고개 들었다. 율해서를 발견한 그의 순박한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