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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18)화 (118/138)

118화

촤아악⎯

면전에 찬물을 쏟아붓자 산적 두목이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중에 무언가 입안으로 대뜸 쑤셔 들어와 무심코 꿀꺽 삼킨 산적은 뒤늦게 율해서를 발견했다.

“웬 놈이냐!”

“당신이 먹은 건 침수초(侵壽草) 씨앗입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화의 일종이죠.”

“무, 무슨 소릴···!”

“그대로 두면 만개하기까지 최소 한 달은 걸립니다. 꽃이 필 무렵이면 비료가 된 인간은 이미 죽었겠지만.”

두목이 뭐라 하든 율해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사무적이면서도 묘하게 건성인 어투로.

“꽃의 생장을 늦추려거든 특별히 배합한 환약을 섭취해야 합니다. 제조법은 고을 원님께 전해드렸어요. 살고 싶거든 죄를 고하고 약을 받으세요.”

“헛소리를 줄기차게도 하는구나! 이놈들은 뭣들 하고 있어? 요 막돼먹은 애송이를 아무도 막지 않은 게냐?!”

두목이 수하들에게 버럭 성을 내자 율해서가 한 보 뒤로 물러섰다. 소년에게 가리어진 산채의 상황이 두목에게 낱낱이 드러났다.

함께 어울려 퍼마시던 간부와 잡일 하는 놈들, 보초까지 모두. 죽은 듯 맨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광경. 두목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주, 죽, 죽었···?”

“수면향을 썼습니다. 늦어도 두 시진 내에는 모두 일어날 거예요.”

율해서는 찬물을 담아 온 바가지를 휙 내던졌다.

“토해도 소용없습니다. 침수초는 위액을 흡수하는 즉시 뿌리 내리니까요. 강제로 제거하려거든 복부를 도려내야 할 겁니다.”

허겁지겁 웃옷을 들친 두목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의 뱃가죽에 벌써부터 검게 뻗은 뿌리의 형상이 비쳤던 것이다.

“무, 무슨 속셈이냐? 나 하나 잡는다고 무에 달라질 성싶으냐? 내, 내가 사라지면, 다른 놈들이···!”

“다른 놈들이 산채를 흡수해서 세력을 불리겠죠? 지금 이대로도 관군이 상대하기 벅차다며 내버려 두는 형국인데. 예서 규모를 더 키웠다간 아예 겁을 집어먹고 달아날 거고요?”

“······어, 어어?”

두목이 하려던 말을 뺏어 버린 율해서가 실례, 하고 무성의하게 사과했다.

“다들 똑같은 소릴 하는 바람에 그만 외워 버렸네요. 지겨우니 이 얘긴 그만하죠.”

“무어라···?”

“근방 이백 리 내의 산채는 전부 돌았어요. 당신이 마지막입니다.”

창졸간에 변고를 당한 두목이 떨리는 손으로 삿대질하며 횡설수설했다.

“서, 설마 단독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게냐?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술사라도 되는 게야?”

율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도적이 허탈한 듯 뇌까렸다.

“요즘 세상에 술사란 놈이 겁도 없이 원님을 만나? 네놈도 멸문당하고 싶으냐?”

“······무슨 소립니까?”

단순 협박이라기엔 멸문 운운하는 모양새가 의미심장했다. 율해서가 되묻자 두목이 흥분하여 광소했다.

“하하하! 제집이 풍비박산 나는 줄도 모르고 예서 놀아나는 꼴이라니! 우습구나, 우스워! 나라님이 배은망덕한 술사 놈들 씨를 말리겠다지 않았느냐! 듣자 하니 우선 본보기로 삼은 게··· 화양 율씨라던가?”

율해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바닥 난 신력을 억지로 긁어모은 녀석이 즉각 축지했다. 앞서 산채를 돌며 신력을 얼마간 소모한 차였다. 그보다 수십 배는 먼 거리를 단숨에 축지하려 들자 거센 압박이 전신을 짜부라뜨릴 기세로 짓눌렀다. 내장이 터져나간 듯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율해서는 멈추지 않았다.

산과 들이 한데 엉기고 뒤틀린 천지가 제자리를 찾아갈 즈음. 매캐한 연기가 비강을 넘어 폐부를 찔렀다. 밭은기침을 토해 낸 율해서가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서 고개를 들었다.

불바다였다.

화양 율씨는 꽃의 왕 모란을 모시는 일족으로, 그들 본관은 온갖 기화요초가 난만하며 그윽한 운치를 풍기었다.

그 경치를 전연 찾아볼 수 없었다.

타닥, 타닥··· 불붙은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졌다. 캄캄한 밤하늘을 가르며 불화살이 혜성처럼 날아들었다. 어둠을 밝히는 붉은 화마. 아무개는 그 의도를 쉬이 읽어냈다.

화초의 생장을 촉진하는 율씨의 비전 술법은 화염에 취약하다.

미미하게나마 간신히 회복한 신력을 방금 축지술에 모조리 쏟아부은 율해서가 휘청였다. 주저앉기 직전, 굽어진 무릎을 짚고 간신히 지탱한 율해서가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매 호흡이 버거웠다.

율해서는 비틀걸음으로 불바다를 헤치며 나아갔다. 익숙하고도 낯선 길을 지나자 대전 앞 너른 마당에 모인 술사들이 보였다. 합동진을 구성하던 그들 중 하나가 율해서를 발견했다.

“형님!”

율해원이었다. 짤막한 부름에 그 자리의 모두가 율해서를 돌아봤다.

쏟아지는 시선의 무게. 아무개는 가능하다면 비웃음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대놓고 무시하고 면박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구원자라도 되는 양 애타는 눈길을 보내시니 원.

“형님, 잘 오셨어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저희랑 같이⎯”

부리나케 다가온 해원이 율해서의 팔을 잡아끌다 말고 주춤했다.

타오르는 불빛으로도 숨길 수 없는 창백한 낯. 거칠게 들썩이는 호흡. 무엇보다도··· 비술사와 다를 바 없는, 신력의 고갈.

“형님? 이게 대체···”

“늦었구나.”

그때 본부인이 나타났다.

제 아들과 남편의 아들을 나란히 훑은 부인이 소맷자락을 떨치며 뒤돌았다.

“따라오너라.”

앞장선 부인은 너른 대전을 지나쳐 깊숙이 들어갔다. 인적 드문 구석에 멈춰 선 부인이 율해서를 서늘히 직시했다.

“쓸모없는 것.”

“······.”

“배은망덕하기도 하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부인이 율해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화마가 집어삼킨 정경이 눈에 선했다.

“똑똑히 보거라. 이게 네놈이 저지른 짓의 결과다.”

그 음성이 귓가에 섬뜩하게 울렸다.

“명목상 우리 가문의 죄는 지도 제작 및 유출이다. 내란 혐의를 뒤집어썼지.”

축지술을 쓰려거든 지맥을 읽고, 제 위치를 알고, 목적한 지점과 거리 및 방향을 정확히 해야 한다. 하여 다수의 세가에서 필수적으로 지도를 보유했다.

지도 제작은 국법으로 금지되었으나, 이 같은 술사들의 생리를 알기에 암묵적으로 눈감아 주던 관행이었다. 이제 와 예고도 없이 대뜸 문제 삼는 건 실상 꼬투리 잡기에 지나지 않았다.

“허면 진정한 죄목은 무엇인 줄 아느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실.

“네놈이다.”

“······.”

“네놈이 한껏 날뛰어 준 덕분에 다환 전역에서 술사의 무력이 화두에 올랐다. 선조들께서 세속의 권력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온 내력이 단숨에 무너졌지. 어찌 흡족하더냐? 수호지신이라는 세간의 칭송이 우쭐하더냐?”

“어머니, 그건···.”

“넌 가만히 있거라!”

해원이 도중에 만류하려 했으나, 부인은 단칼에 잘라 냈다. 무리한 축지의 여파로 식은땀 흘리는 율해서에게. 부인이 거듭 질책했다.

“어리석은 네놈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내리마. 권력의 성질은 독점이다. 그 어떤 권력자도 제힘을 나누길 원치 않아. 하물며 통제를 벗어난 힘? 단지 위협에 불과하다!”

용약진주자신위(勇略震主者身危), 이공개천하자불상(而功蓋天下者不賞)이라.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군주를 떨게 하는 자는 위태롭고, 공로로 천하를 뒤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하니.

어리석은 역사가 반복되는 가운데 섬뜩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술사들이 모인 대전 쪽이었다.

부인은 소리의 근원지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율해서의 가슴팍에 던지듯 몇 가지를 들이밀었다. 묵직한 전낭과 부적 너덧 장이었다.

“해원이를 데리고 도망쳐라. 네놈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아우만은 반드시 살려라!”

“어머니, 싫어요! 저도 함께 남아서···”

“축지부에 내 신력을 담아 놓았다. 네놈이 그 꼴로도 능히 사용할 수 있을 터. 전낭은 안감에 전표를 숨겨 놓았다. 금전 이천 냥 어치니 급할 때···”

촉박한 상황 속. 서둘러 이르던 부인이 돌연 멈칫했다.

“···잊어라. 전표는 금강전장에서 발급한 것이니.”

금강전장은 주단 금씨가 운영하는 상회였다. 이 땅을 거쳐 간 왕조 여럿이 흥망성쇠를 거듭할 때도 굳건히 역사를 이어 온 오대세가 중 일익. 그들의 전표를 부인은 무용하다 평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해원이 싫다고 울부짖었으나, 부인은 애써 외면했다. 남몰래 율해서의 손에 차디찬 날붙이를 쥐여 주며.

“어찌해도 사는 게 지옥이라면··· 차라리 편히 쉬도록 해다오.”

율해서에게만 간신히 들리도록 작은 속삭임이었다.

아무개는 내심 당혹했다. 얼음으로 빚어진 양 소스라치게 차갑고 그만큼 단단했던 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가녀린 어조였기에.

하나 잠시 잠깐 내비친 연약함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여느 때처럼 냉랭한 얼굴로 돌아선 부인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대전으로 나아갔다. 해원이 눈물 젖은 얼굴로 뒤쫓으려 했으나, 율해서가 잡아 세웠다.

“형님, 이, 이거 놔주세요. 저는 안 가요. 도망 안 갈 거예요···.”

“저도 안 갑니다.”

부인이 떠넘긴 것들을 갈무리한 율해서가 해원의 손을 잡고 손가락 사이로 얽어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따라오세요.”

율해서는 기척을 죽이고 좁은 길과 담벼락, 화마에 휩싸인 정원을 넘었다. 뒤에서 연신 훌쩍이는 울먹임이 들려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다른 곳은, 대전과 앞마당은 물론 정문에서 계단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높은 지대였다.

몸을 낮춘 율해서는 숨죽인 채 술사들의 혈투를 주시했다.

“······형님···?”

쉿, 하고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율해서가 작게 속삭였다.

“눈물 닦으세요.”

대문을 검게 태운 불길이 현판으로 옮겨붙었다. 끼이익 비명을 내지르며 현판이 기울었다.

“갈 때 가더라도 얼굴은 확인해 둬야지 않습니까.”

“어, 얼굴이라니요?”

꼬리에 불붙은 현판이 계단으로 곤두박질쳤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들썩이는 해원의 어깨를 팔 안으로 끌어당기며. 율해서가 나직이 읊조렸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들. 얼굴이요.”

지극히 삭막하고, 극도로 살벌한 어조.

해원은 눈물을 후두둑 떨구며 형님을 올려다보았다. 딸꾹질이라도 하듯 어깨가 자꾸만 들썩였지만, 최대한 울음을 삼켜 냈다.

아무개는 직감했다. 율해서가 중얼거린 것이 단지 빈말로 끝나진 않으리라고.

녀석은 산을 옮기고 지형을 뒤바꾸는 무시무시한 놈이잖은가. 지금 일시적으로 신력이 고갈되었으나, 언젠가 회복되면······

“주단 금씨?”

쓰러진 대문을 밟고 들어선 침입자들. 율해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황실에 밉보였다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주단 금씨가···.”

“저, 저쪽에, 붙었대요··· 주단, 금, 씨는··· 재능이 부족한, 가솔, 들, 에게··· 관직이나, 상업, 을··· 장려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아무개의 악몽 속. 주둔지 막사에서 태자가 주재하던 회의에도 주단 금씨 출신이 있었더랬다.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든 약삭빠르게 줄 타는 놈은 있기 마련. 주단 금씨는 술사들이 대대적으로 탄압받을 기미가 보이자 황권에 붙은 것이다.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율해서가 짧게 탄식했다. 멀찍이서 금씨와 싸우던 화양의 술사가 분통을 터트렸다.

“네놈들! 율해서가 있을 땐 납작 기었던 주제에!”

“율해서? 아아, 홍의백면?”

키득거리고 웃은 주단의 술사가 눈을 번뜩였다.

“그놈은 죽었잖아? 다 지난 옛일을 이제 와 들먹이면 어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들이 홍의백면의 정체를 어찌 알았지?

“그··· 형님의 위명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니, 세가 모임에서··· 아버지께서 술김에 그만······ 그, 그래도 술사들 사이에서나 말이 좀 돌았지. 비술사 민간인들은 몰라요.”

개판이네.

해원이 중언부언하는 소릴 들으며 아무개는 결론 내렸다. 이 집안은 황실이나 주단 금씨가 아니었어도 망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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