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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17)화 (117/138)

117화

온몸이 불덩이 같다. 펄펄 끓는 열기로 몽롱한 중에 간혹 흐리게나마 의식이 돌아오면, 늘 손녀와 약초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분 깨어나셨다며? 왜 아직도 잠만 자는데!”

“의원 어르신이 설명해 주셨잖아. 긴장이 풀린 탓에 그간 쌓인 피로로 몸살 난 거라고.”

손녀가 까랑까랑하게 들볶았으나 약초꾼은 으레 그렇듯 적당히 흘려넘겼다.

율해서의 이마 위로 젖은 수건이 올라왔다. 시원한 느낌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나도 환자님 눈 뜬 모습 보고 싶다구. 치사하게 너만······ 뭐야? 너 팔이 왜 이래. 다쳤어?”

“어어, 별거 아니야. 그냥 굴렀어.”

“으이구. 조심 좀 하지! 얼마나 굴렀길래 이리 멍투성이람. 너도 같이 누워 있어! 환자가 환자를 보고 있었네······”

손녀의 핀잔이 점차 아득해졌다. 혼곤한 의식이 깊은 암흑으로 가라앉았다.

몸을 닦아 주거나 마른 입술을 축이는 등. 돌보는 손길이 느껴질 적마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다가도 도로 까무룩해지기 일쑤였다. 몇 날 며칠이 지난 건지 혹은 고작 몇 시진에 불과한지. 감감한 시간이 흐른 끝에.

율해서가 깨어났다.

일전에 무뢰배의 악의를 감지하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날과 달랐다. 율해서는 종전 이래 가장 맑은 정신으로 눈떴다. 여전히 신력은 바닥을 치고 제대로 된 술법도 사용할 수 없었지만.

“허억···!”

때마침 방문한 손녀가 문지방을 넘다 말고 율해서와 마주쳤다.

애타게 바라마지 않던 눈 뜬 환자님을 영접한 손녀는 가슴을 냅다 움켜쥐고는 헉헉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이럴 때가···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손녀는 부리나케 너와집을 뛰쳐나가 의원을 모셔 왔다. 의원이 진맥하고 몸을 보할 탕약을 처방해 주었다.

“고비는 넘겼소이다.”

할아버지 등 뒤에 숨어 율해서를 빠끔 훔쳐보던 손녀와 곁에서 대기하던 약초꾼까지.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줄곧 사경을 헤매느라 몰랐을 테지만, 저 아해가 쓰러진 자네를 발견하고 나를 불렀소. 생명의 은인이니 인사하시게.”

생명의 은인, 약초꾼이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의원은 예 남아서 환자님을 돌보겠다 고집하는 손녀를 질질 끌고 갔다. 한창때의 남정네가 둘이나 있는데 어디 감히! 하고 조부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손녀는, 두 눈 부릅뜨고 끝까지 율해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미남을 향한 맹목이 가히 상상 이상이다.

너와집에 단둘이 남게 되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몸을 일으키려던 율해서의 시야가 아찔하게 빙글 돌았다. 반사적으로 벽을 짚고 선 율해서는 남은 손으로 지끈거리는 눈가를 덮었다.

“더 누워 계세요. 아직 몸이 불편하시잖아요.”

눈가를 덮은 손 틈새로 눈동자를 움직이자 약초꾼의 순박한 웃음이 언뜻 비쳤다.

“저는 모시는 부모도 없으니 예서 얼마든 머무셔도 됩니다. 좁고 허름하지만 비를 피할 지붕은 있으니까요. 아, 물론 돌아갈 곳이 따로 있다면···”

“없습니다. 돌아갈 곳.”

율해서의 입매가 자조적으로 비틀렸다.

“제 발로 걷어차고 나와서요.”

“아··· 그러시구나.”

벽을 짚어 가며 율해서가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던 모양새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눈에 띄게 반듯해졌다. 문가에 있던 약초꾼이 얼결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딜 가시려고요?”

“찝찝해서 씻으러 갑니다.”

문을 나서던 율해서가 언뜻 뒤를 돌아봤다.

“생명의 은인이라 하셨습니까?”

“그,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그냥, 쓰러져 계시길래 모신 것뿐인데···.”

“······은혜를 갚을 때까지는 여기 있겠습니다.” 

가진 건 몸뚱어리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어디 쓸 데가 있겠죠.

냉소적으로 덧붙인 율해서가 너와집을 나섰다.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근처 계곡으로 곧장 향하기에 약초꾼은 무척 놀라워했다.

두 소년은 허름한 너와집에서 함께 살았다.

약초꾼이 일을 가르쳐 주려 했으나 율해서는 화왕의 직계 제자였다. 어지간한 초목은 죄다 꿰고 있던 탓에 외려 율해서가 약초꾼을 가르치는 형국이 되었다.

약초꾼의 성화로 율해서는 조금 더 말을 편히 했고, 손녀는 매일같이 너와집을 드나들었다. 종종 의원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손녀를 잡으러 오곤 했다.

놀라우리만치 평온한 나날이었다.

율해서는 산을 오가며 지력을 훑고 근방의 식생과 분포를 정리했다. 글을 모르는 약초꾼을 위해 면포에 지도로 그려 주던 율해서가 산릉선을 가리켰다.

“이 근방의 풍수가 좋아 약초가 많이 자랄 거예요. 어찌 이곳으로는 걸음 하지 않는 겁니까?”

“그쪽에 큰 산채가 있어요. 전에 술사님께서 쫓아낸 작자도 거기 소속이에요.”

“······제가 산적을 쫓아냈다고요?”

“아, 기억 못 하시는구나. 신경 쓰지 마세요. 그때 깨어나자마자 도로 쓰러지셨거든요. 기억 안 나실 만도 해요.”

하여간 그쪽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며, 약초꾼이 신신당부했다.

이렇듯 속세와 유리된 벽촌의 산골이었으나. 조금만 벗어나면 번잡한 홍진이 물밀듯 쏟아졌다. 율해서는 살얼음처럼 위태로운 평온 위에 서 있었다.

하나 이때의 율해서는 아무개가 봐 온 것 중 제일로 심신이 안정되었다. 신력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조잡한 술법조차 쓸 수 없는 형국이었으나 뭇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평범한 비술사로 지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으니.

어쩌면, 별일이 없었다면··· 이후로도 율해서는 줄곧 예서 머물렀을는지도 모르겠다.

“꼬맹이~ 살아 있냐? 보호비 받으러 왔다.”

약초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산적이 방문했다.

지난번 손모가지가 꺾인 놈이 수치를 알고 침묵한 건지. 이번에 수금하러 온 녀석은 율해서에 대해 전연 모르는 낌새였다. 낯선 얼굴을 발견한 산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라, 넌 웬 놈이냐? 여긴 약초꾼 꼬맹이 하나만 살 텐데.”

“잠시 신세 지고 있습니다.”

“그으래? 어쨌든 잘 됐구나. 보호비는 머릿수대로 받거든. 딱 두 배면 되겠어.”

옆구리에 광주리를 끼고 있던 율해서가 산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보호비라 하셨는데, 무엇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겁니까?”

“무어,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다가? 망할 북방 오랑캐 놈들이라거나.”

“그들은 종전 협약이 체결된 후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크흠, 흠. 다른 산적에게서 가산을 지켜 주기도 하지.”

“당신도 산적 아닌가요?”

“거, 어린놈이 어데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우린 산적이 아니라 자경단이야, 자경단. 잔말 말고 보호비나 내놔라!”

껄렁한 걸음으로 들어선 산적이 마당에 펴놓고 말리던 약재를 발로 차며 위협했다. 율해서는 한층 서늘한 시선으로 산적이 하는 양을 주시했다.

그 태연한 반응이 맘에 차지 않은 걸까. 산적이 눈을 부라리며 성큼 다가왔다.

“새끼가, 지금 야렸냐? 눈매가 삐딱하다?”

“제 눈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어쭈. 그래서 잘못이 없다, 이거냐?”

산적이 검지를 세워 율해서의 머리를 툭툭, 언짢게 밀어낼 즈음.

“헉···!”

“수, 술사님!”

때마침 귀가한 약초꾼과 손녀가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산적은 ‘술사’라는 부름에 움찔하며 손을 움츠렸으나, 얕보일까 봐 부러 언성을 높였다.

“어쩐지 모가지가 뻣뻣하다 했더니만, 술사였냐? 근데. 그래서 뭐? 술사 나리께선 비술사한테 손쓰면 안 된다면서?”

하이고, 이걸 어쩌나~ 빈정거린 산적이 약재를 말리던 광주리 하나를 주워 들고 율해서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손녀와 약초꾼의 낯이 파랗게 질렸다.

“이래도 얌전히 참으셔야지, 술사 나리는?”

머리와 어깨에 덜 마른 약초가 덕지덕지 붙은 율해서가. 얼어붙은 소년 소녀를 흘깃하며 입 열었다.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어엉? 무슨 오해?”

퍽- 발목을 걷어차자 산적이 악! 소리 지르며 고꾸라졌다.

굽어지는 허리 아래로 무릎을 세워 올리자 산적의 복부에 정확히 박혀 들었다. 일순 호흡마저 멎은 산적이 끅끅대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술사가 비술사에게 손써서 안 된다 함은, 술법에 한해서입니다.”

즉, 술법만 안 쓰면 상관없다는 뜻이죠.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율해서가 눈물 콧물을 질질 쏟아 내는 산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목숨 빚을 져 본 건 처음이라··· 어찌 갚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이제 좀 감을 잡았어요.”

산적의 머리채를 잡아 든 율해서가 손녀와 약초꾼을 돌아봤다.

“이놈들을 박멸하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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