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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16)화 (116/138)

116화

손녀는 매일같이 율해서를 보러 왔고 종종 의원도 함께했다. 약초꾼은 비슷한 연배의 손녀와 매번 투닥거렸으나, 의원에게는 어르신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셨다.

어느 날엔 비가 왔다. 무성한 나뭇잎을 뚫고 비쳐 든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더니 어깨부터 차츰 젖어 들었다.

약초꾼이 서둘러 외의(外衣)를 덮어 주었다. 하나 율해서의 몸은 덩굴에 엉켜 나무 둥치와 지면에 묶여 있었다. 짚으로 만든 우의를 둘러 줄 수도 없고. 이불처럼 덮어씌워도 비를 온전히 막아 낼 수는 없다.

그때 젖은 땅을 찰박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약초꾼이 놀라 외쳤다.

“너···!”

“비켜 봐. 우리 환자분이 비 맞게 둘 순 없어.”

손녀가 가까이 오자 뺨을 적시던 빗줄기가 사그라들었다. 율해서의 머리 위에 우산이라도 받쳐 준 모양이다.

“제정신이야? 비가 이리 오는데 겁도 없이 산에 올라?!”

“그럼 어쩌라고! 걱정되는데!”

“너 정말···.”

한숨을 쉰 약초꾼이 우산을 뺏어 들었다. 무슨 짓이냐고 빽 소리 지르는 손녀를 약초꾼이 덤덤히 타일렀다.

“이건 내가 들고 있을 테니까, 넌 다시 내려가··· 아니다. 빗길은 위험해. 집에 들어가 있어.”

“웃기지 마. 내 멋대로 저지른 일을 왜 네가 감당하는데?”

“그야······.”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문 약초꾼이 이내 타협했다.

“너 혼자 해 봐야 얼마나 버티겠어? 둘이서 교대하자.”

결국 그들은 반 시진씩 번갈아 가며 우산을 받쳐 주기로 했다. 손녀 먼저 너와집으로 들여보내고 홀로 남은 약초꾼은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말로는 둘이 번갈아 교대한다지만, 아무개가 느끼기에 약초꾼이 손녀보다 배는 오래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좌우지간 종일토록 우산 들고 빗속에 있던 두 사람은 고뿔에 걸렸다. 소년 소녀의 기행은 의원의 호통으로 막을 내렸다.

한껏 야단을 맞았음에도 손녀는 기죽지 않고 꾸준히 방문했다.

“어서 환자님이 눈 뜨셨으면 좋겠어. 지금도 이리 잘생겼는데. 눈까지 뜨면 얼마나 멋질까?”

율해서의 얼굴에 푹 빠진 손녀가 불만스러웠던 듯. 약초꾼이 괜히 트집을 잡았다.

“너무 기대하진 마.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모르잖아?”

“넌 또 무슨 헛소리니?”

“잠든 지금도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잖아. 눈 뜨면 인상이 엄청 날카로울 것 같은데?”

“날카로우면 어때서? 난 싸늘한 냉미남도 좋아.”

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약초꾼이 조용히 물러났다.

두 소년 소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 순간, 아무개는 율해서의 몸에 미약하나마 신력이 돌아온 걸 느꼈다. 텅 빈 그릇 밑바닥을 살짝 적신 수준이었으나, 그릇이 아예 깨져 나간 건 아니었으니 안도할 만했다.

“꼬마야, 이리 나와 봐라.”

외부의 자극도 좀 더 선명하고 즉각적으로 와 닿았다. 덕분에 아무개는 약초꾼의 너와집에 들이닥친 낯선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무슨 일인데요? 상납금 받아 간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대꾸하는 약초꾼에게서 선명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상납금이라. 산적인지 도적인지 모를 무뢰한이 흠흠, 헛기침했다.

“너도 알다시피 요새 사는 게 좀 팍팍해야 말이지. 보호비를 올려받기로 했다.”

“또요? 거기서 더?”

“녀석아. 너 말고도 다 같은 사정이니 잔말 말아라.”

약초꾼이 보란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도 어지간하면 좋게좋게 드리고 싶은데요, 참말로 더는 힘들어요.”

“많이 힘드냐?”

“당연하죠! 벼룩의 간을 꺼내려 하시니, 원.”

“그럼 됐다. 어째 다들 짠 것처럼 똑같은 소릴 하냐.”

아무개는 의구심이 들었다. 보호비 명목의 상납금을 수거하러 온 무뢰배가 저리 순순히 물러날 리 없는데.

“느이 집 한번 뒤져 보자. 벼룩의 간보다 괜찮은 게 나올 때마다 한 대씩이다.”

“······!”

허름한 너와집을 이 잡듯 뒤지는지 우당탕!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저러다 집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염려될 지경이었다.

“하, 고놈 영악하기도 하지. 괜찮은 건 진즉 빼돌렸구만?”

살림을 죄 뒤집어엎고도 그럴싸한 걸 못 찾은 듯싶었다. 짤랑이는 소리가 가볍기 그지없으니.

치안이 나쁜 동네의 요령이다. 그럴듯한 전낭에 부피만 적당히 채워 두고는, 건달 따위에게 걸리면 대신 넘겨주는 거다. 진정 귀중한 보화는 보다 깊은 속에 숨겨 두고.

한데 약초꾼이 그럴 정신머리가 있었을까 싶다. 털어갈 것도 없을 만치 가난한 거 아냐?

“어디 보자, 요 근처에 괜찮은 게 있을랑가?”

무뢰배는 아쉬운 듯 너와집 인근을 둘러보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아무개에게도 들렸다.

“······! 안 돼요! 그쪽은···!”

약초꾼이 급히 만류하자 무뢰배가 호탕하게 웃었다.

“호오라. 예다가 괜찮은 걸 숨겨뒀구먼? 이거 놔 봐라! 괘씸죄로 열 대 추가다.”

하나 자신만만하게 넘겨짚은 무뢰배가 발견한 것은, 덩굴과 풀잎에 휩싸인 소년 술사였다.

“이, 이게 뭣이냐? ···설마 시체?!”

움찔. 율해서의 손끝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그 작은 변화를 보지 못한 무뢰배가 놀랍다는 듯 입을 놀렸다.

“이야, 약초 꼬맹이 너. 다시 봤다? 사람을 죽여 놓고 뒤처리도 안 하고 이리 방치해 놔?”

“무슨 말씀이세요! 안 죽였고, 안 죽었어요! 저 사람, 살아 있단 말이에요!”

“나 원, 대관절 어느 산 사람 몸에 풀떼기가 자란다느냐? 나랑 장난하자는 게야?”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 산적이 약초꾼을 잡아들기라도 한 걸까. 놓아 달라는 소년의 외침이 들렸다.

“어린놈이 벌써 살인의 맛을 보고. 이거 위험한 자식이었네? 설마 나도 죽일 셈이었냐? 어디 칼이라도 숨겨 놓은 거 아니야?”

부욱, 찌이익— 찢기는 옷자락의 비명이 귓가에 선했다. 무뢰배는 몸수색을 빌미로 약초꾼의 낡은 옷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았다.

“흠. 칼은 없네. 혹시라도 준비해 놨으면 그걸로 네놈 배때기를 쑤셔 줄까 했는데··· 자, 그럼. 아까 말한 열 대. 맞아야지?”

퍽, 퍼억, 거침없는 구타가 이어졌다.

앞서 너와집을 뒤져 보호비 명목으로 부족하나마 수금도 했으면서. 단지 기분상의 문제로. 그의 심기를 거스른 괘씸죄였다.

“어휴, 무슨 애새끼가 신음 한 번 안 지르냐. 기분 더럽게.”

열 대를 채우고도 모자라 덤으로 두어 번 더 걷어찬 산적이 툴툴거렸다. 쿨럭, 약초꾼이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그나저나 이 시체. 딱 봐도 때깔이 고운데··· 뭐 쓸 만한 건 없더냐?”

율해서의 행색을 살핀 무뢰배가 입맛을 다셨다. 놈의 기척이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 무렵 하늘은 맑고 태양이 지상을 환히 비추어 눈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주홍빛이 스며들었다. 무뢰배의 거친 호흡이 지척에 다다를 즈음. 주홍빛 눈꺼풀 위로 그늘이 졌다. 무뢰배가 손을 뻗은 것이다.

“어느 댁 도령이신데 요런 산골짝서 죽었다냐. 살아 있어야 몸값 비싸게 받을 수 있는데. 무어, 시신도 나쁘지 않지만···!”

거칠한 손으로 시체 얼굴을 주무르던 무뢰배가 흠칫 굳었다. 시신이 제 손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율해서가 눈 떴다.

악의를 감지한 소년이 무의식중에 반응했다. 율해서는 제 손에 잡힌 굵직한 손목을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으드득, 뼈마디가 섬뜩하게 으스러졌다.

“으아아아악!”

산적이 비명을 질렀다.

율해서가 일어서고 그의 전신을 휘감은 풀뿌리와 덩굴이 투둑, 끊어졌다. 기괴한 방향으로 덜렁거리는 무뢰배의 손목을 등 뒤로 꺾고 발목을 걸자 상대가 고꾸라졌다.

“사,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좀 전까지 약초꾼을 흠씬 두들겨 패던 무뢰배가 금세 태도를 달리했다.

무심결에 상대를 제압한 율해서는 지척에서 다 큰 남자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아직 덜 깨어나 둔중한 머리가 울렸다.

쿠웅—! 엎어진 무뢰배의 면전에 율해서의 발이 찍혔다. 지면이 움푹 팼다.

“······시끄러워.”

남은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와 눈가, 관자놀이를 감싼 율해서가 낮게 중얼거렸다.

무뢰배는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다. 놈의 바지춤이 젖어 들고 지린내가 물씬 풍겼다. 율해서는 그가 제압한 무뢰배를 흐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민족··· 은 아니고.”

붙잡은 손목으로 미약한 신력을 주입해 전신을 훑는다.

“술사··· 도 아니고.”

자신의 적이 될 만한 두 집단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자. 이를 확인한 율해서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산적은 끅끅대며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덜렁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그를 율해서는 가만 내버려 뒀다.

아무개가 보기에 율해서는 지금 막 깨어나 상황 파악이 덜 된 건 물론, 사고력도 다소 저하된 상태였다.

하나 기세만은 찌를 듯 날카로웠다. 여즉 철과 혈의 비린내로 가득한 전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바짝 날 선 그의 기감에 또 다른 인기척이 포착됐다.

그대로 선 율해서가 눈동자만 굴려 상대를 확인했다. 너덜너덜 넝마를 걸친 약초꾼 소년이다. 어느 모로 봐도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은.

“······전쟁은, 어찌 됐습니까?”

정신이 들자마자 전시 상황부터 확인한다. 약초꾼은 의아한 듯 무슨 전쟁··· 하고 반문했다.

“혹 이북의 오랑캐를 말씀하는 거라면, 종전 협약이 체결됐습니다. 전쟁은 끝났어요.”

마지막 말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끝났다, 전쟁이.

“······! 이, 이봐요!”

일순 긴장이 풀렸다. 야생 짐승처럼 날것의 독기를 품고 꼿꼿이 선 몸이 한순간 허물어지고. 율해서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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