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七. 동행
“아···.”
황망히 손을 빼냈다. 아무개는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하얗게 바랜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멀어져야 해.
도자역 환자를 도우면 병이 옮는다. 하나 술사는 개의치 않으리라. 모든 위험을 도외시하고 기어이 제게 손 내밀 터였다.
아무개는 바로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 술사와 멀리 떨어져야 했다. 그에게 도자역을 옮길 수는 없다. 절대로.
“···⎯!”
뒤돌아선 아무개는, 그러나 미처 발을 떼 보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축지로 단숨에 앞지른 술사가 가로막고 선 것이다.
“어디 가시려고요?”
그가 아무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덥석 들려 안긴 아무개가 발버둥 치자 쉬- 하고 아이를 어르듯 했다.
“얌전히 계세요. 상처가 벌어지면 안 되잖아요.”
“놔, 놔줘···.”
“놓아주면? 또 도망가려고요?”
“술사님, 제발······”
이러다 당신까지 도자역 걸리면 어떡해?!
속으로 비명 하는 아무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건지.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두 손 가득 흉신을 조심스레 끌어안은 술사가 사당 문을 걷어차 열었다.
요에 아무개를 눕히고 손수 신을 벗겨 준 후. 꿈장수의 베개를 가져와 머릿밑에 대 준 그가 다정히 말했다.
“피곤하죠? 제가 밤새 괴롭혔잖아요.”
아무개의 머리맡에 자리한 술사는 불안하게 요동치는 흉신의 눈을 손으로 덮어 주었다. 시야가 검게 물들고. 자장가처럼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에 상냥히 와 닿았다.
“괜찮아요. 염려할 것 없어요. 어차피 도자역은 손보려 했고,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에요.”
머뭇머뭇하던 아무개는 이불 밖으로 손을 빼내어 제 눈을 덮은 그의 위에 살며시 포갰다.
“······술사님··· 어쩌려고···?”
“도자역을 퍼트린 게 다화련이라면서요? 담판을 지어야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가 사대귀인이라 불리는, 범인의 상식과 한계를 뛰어넘은 대단한 위인이라곤 하나 상대는 모든 대지의 근원 되는 신령이자 군주였다. 차원이 다른 존재란 말이다.
“······무모한 짓 하지 마···.”
“그럼요. 저라고 무작정 군주님을 들쑤실 작정은 아녜요. 우선 추종자부터 캐 봐야죠.”
“추, 종자···?”
“영화단주가 있잖아요.”
유랑술사, 만물점주, 수호지신과 함께 사대귀인이라 불리는, 영화단주.
오대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력 단체, 영화단의 주인. 대지의 군주를 지척에서 받들어 모시는 자.
“아무개 님은 몸도 성치 않으니 쉬고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못 쉴 것 같은데.”
불안해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다. 연신 꼼지락대는 아무개를 보다 못한 술사가 향로를 내왔다. 향에 불을 붙이자 기묘한 내음이 코끝에 감돌았다.
“수면향이에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 저를 믿어 주세요.”
수면향의 효과가 좋은 건지, 밤새 혹사한 몸이 피로했던 건지. 번잡한 맘과 달리 아무개는 차츰 나른해졌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를 안심시키길 우선하는 상대 때문일는지도.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도자역··· 걸려서.”
“아무개 님 탓이 아니잖아요.”
밤새 몸을 섞을 때만 해도 멀쩡했으니. 도자역 환자를 돕거나 부주의하여 옮은 게 아니다.
패왕 함수린, 주단 금씨 종주가 그러했듯. 아무개가 역병의 발원이 된 것이다.
“아니··· 내 탓이야. ······내가 운이 나빠서 그래.”
어쩌다 흉신에게 ‘불운’이라는 태생적 속성이 부여됐을까.
아무개의 본질은 원혼이다. 수하에게 배신당한 장군, 허름한 산기슭 초가삼간에서 쫓겨난 주민, 자식이 죄다 부역에 끌려간 부모, 성벽을 쌓다 매질 당한 촌부, 아씨를 대신해 팔려 간 몸종, 남아로 분한 거지 꼬마, 멸시받던 백정, 목 잘린 귀장군, 등 떠밀려 책봉 당한 태자, 한이 차고 넘쳐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령.
그들 모두 불운했다.
운이 나빠 비천한 신분을 타고났으며, 운이 나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운이 나빠 시대를 잘못 만났다.
비천한 신분이라 희생되고 가난하여 이용당했다. 가진 재능은 난세에 뿌리내릴 땅이 없어 꽃 피우지 못했다.
운은 절대적이라 할 순 없으나, 거의 모든 것이었다. 불행이란 무릇 제힘으론 어찌할 도리가 없어 비롯하므로.
“술사님, 나는······”
당신 앞에선 늘 작아질 수밖에 없다.
살생이 기꺼운 내가. 세상을 증오하고 멸절하고픈 내가.
이 땅을 지켜 온 당신을 연모하는 까닭에.
“내가 고르는 건··· 늘 최악의 선택이야.”
자아를 형성한 최초의 순간, 흉신은 강자가 되고자 했다. 더는 희생당하고 싶지 않아서. 한 많은 생을 감내하기 싫어서.
하여 만물점주가 수집한 원혼 가운데 일신의 무력이 단연 출중한 몸을 택했다. 그것이 귀장군, 백운이다.
하나 귀장군은 수급이 잘렸으므로 새 머리를 골라야 했다. 항아리에 담긴 원혼 중 누구보다 사리에 밝고 총명한,
태자의 것을.
“다른 얼굴이랑 몸을 이어 붙이느라··· 둘 다 본모습에서 조금씩 달라졌지만, 어쨌든··· 이 머리는 태자야.”
연나라 최후의 황태자. 혈맥을 타고 흐르는 저주, 도자역의 희생자.
“도자역은 계승되니까··· 그래서 아닐까?”
이외에는 새삼 아무개가 도자역에 걸릴 연유가 없다.
태자의 얼굴을 한 게 이리 귀결될 줄이야. 이놈의 불운은 그칠 줄 모르고 자꾸만 엄습한다.
술사는 자잘하게 금이 간 아무개의 손을, 검지에 끼인 반지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귀장군과 혼합된 육신에 도자역이 옮을 지경이라면, 연나라 황실 혈통은 씨가 말랐겠네요. 구족이 멸하고도 남았겠어요.”
“······나, 이상하지?”
수면향 탓일까.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 아무개는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소릴 입에 담았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여서는··· 온전한 내 거라곤, 하나도 없어···.”
수천수만의 원혼. 그들 기억의 교차점에서 태어난 흉신.
이름조차 특정할 수 없어 아무개라 불리는.
“아무개 님.”
나의 재앙이 당신에게도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내 존재가 당신에게 해가 되진 않을까.
당신을 만난 건 내 생에 다시 없을 행운이지만, 과연 이 끝도 그러할까. 나의 불운이 그리되도록 놓아둘까.
“돌아오면, 같이 이름 지을까요?”
“······내 이름?”
“꼭 이름이 아니어도 좋아요. 아무개가 아니라, 당신만을 부르는 호칭이 있으면 해요.”
제겐 더 이상 ‘아무개’가 아니니까요.
흉신의 의식이 멀어졌다. 더는 아무개가 아니라니··· 그 말은 술사가 한 걸까, 몽롱한 머리가 지어낸 망상일까.
······부디 전자였으면.
***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허, 왜 이리 소란이야.”
“빨리 와 보세요! 환자가 움직였어요!”
“전에도 그리 난장을 부리고선 착각이었잖느냐? 호들갑 떨지 말아라.”
“아이, 참. 이번엔 정말이라니까요···.”
노인과 손녀가 떠드는 말소리가 언뜻 들렸다.
여긴 꿈일까, 현실일까?
미처 판단할 새도 없이 도로 암전이다.
“······할아버지! 화, 환자가 없어졌어요!”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걸까. 멀리서 손녀가 내지르는 비명이 아득히 전해졌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코끝에 묻어나는 파릇한 풀 내음.
아무개는 직감했다. 바깥이구나.
“차, 찾았다!”
반색하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울렸다.
“할아버지, 여기예요! 여기 환자가 있어요!”
전신이 사후경직된 시신인 양 뻣뻣했다. 손목에는 무언가 단단히 감겨 있다. 피부에 얕게 뿌리내린 모양이 덩굴식물인 듯싶었다.
인제 보니 손목뿐 아니다. 발목부터 종아리를 타고 턱 언저리까지. 정체 모를 덩굴이 온몸에 친친 감겨 있었다.
한데도 갑갑하거나 불쾌하진 않았다. 덩굴이 흡수한 지력(地力)을 몸으로 전해 주는 형국이니 외려 안온했다. 나무 둥치에 기대앉은 전신에서 풀꽃향이 은은했다.
“세상에, 이게 뭐람? 덩굴이 환자를 잡아먹고 있어요! 떼 줘야 하지 않아요?”
“내버려 둬라.”
호들갑 떠는 손녀와 달리 노인은 침착하게 진단했다.
“이자는 술사이니라. 우리네로선 가늠키 어려운 방법으로 회복하는 중일 게야.”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던 지난날.
북방에 절벽을 일으킨 후 다시 한번, 아무개는 율해서의 꿈을 꾸었다.
이 무렵 율해서는 동물보다 식물에 가까웠다. 한 자리에 뿌리내린 듯 꼼짝도 않았으며 먹고 배설하는 행위조차 없었다.
살살이꽃과 피살이꽃, 뼈살이꽃 덕분에 껍데기는 온전했으나 속은 텅 비었다. 술사의 근간인 신력이 고갈된 탓이다.
율해서가 정말 살아 있긴 한 건지. 아무개마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손녀가 얼굴 가까이 대고 손 흔들거나 크게 소리쳐도 무용했다. 청각, 시각, 촉각, 후각까지. 소년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이 없었다. 혼백이 빠져나가 육신만 남은 듯이.
그렇게 몇 날 며칠이 흘렀다.
손녀는 지치지도 않고 매일같이 율해서를 보러 왔다. 그간 아무개도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다.
소녀의 조부는 의원이며 이곳은 약초꾼이 머무는 너와집이었다. 율해서를 찾은 것은 어린 약초꾼으로, 깊은 산중에 쓰러진 걸 발견해 의원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또 왔어?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
약초꾼이 빈정거렸으나 손녀는 전연 개의치 않았다. 다만 꿈꾸듯 몽롱한 어조로 종알거렸다.
“이것 좀 봐. 어쩜 이리 잘생겼다니?”
그러곤 힐끔 약초꾼을 돌아보는 듯하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모자라면 마음 씀씀이라도 고와야지. 주둥아릴 그리 놀리면, 누가 너한테 시집가겠니?”
“너, 너 같은 말괄량이는 내 쪽에서 사절이거든?!”
“어머나, 얘 좀 봐. 내 언제 너한테 시집이라도 간댔니? 웬 김칫국이람.”
흥, 코웃음 치며 손녀는 재차 율해서를 들여다봤다. 어찌나 열렬한지. 눈 감은 중에도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약초꾼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넌 무슨 애가 남자 얼굴을 그리 따지냐? 얼마 전까지는 권학을 졸졸 따라다니더니.”
“내가 어리석었어. 지금껏 권학이 최고 미남인 줄 알았지 뭐야?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지. 이 환자님을 보고 나니 권학은 마른오징어 같더라.”
그동안 내 눈에 뭔가 씌었던 것 같아. 손녀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난 개안해 버렸어. 내 인생은 이 환자님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뉠 거야. 아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율해서가 그렇게 잘생겼나?
알 수 없었다. 아무개는 율해서의 안에서 그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으니. 사람 눈이 생겨 먹기가 제 얼굴 직접 보는 게 원체 불가능하잖은가.
면경을 쓰면 된다지만, 아무개의 꿈속 율해서는 수면에조차 얼굴을 비춰 본 적 없었다.
“······맘대로 해라.”
약초꾼이 불퉁하게 뇌까리더니 쾅, 문이 거세게 닫혔다. 심통 난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