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14)화 (114/138)

114화

***

아무개는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잠은 진작에 깼다만, 술사님이 저와 같은 꿈을 꿨다 생각하니 도저히 태연할 자신이 없었다.

당초 목적했던 도자역의 내막은 알아냈으나, 부끄러운 옛일이 낱낱이 까발려졌잖은가. 술사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는지. 초조하다 못해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아무개 님.”

사락,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이 다정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도자역을 해결할 방도가 떠올랐어요. 그전에, 아무개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손길에 용기를 얻은 아무개가 슬그머니 실눈을 떠 보았다.

술사의 형체가 어렴풋한 윤곽으로 아른거렸다.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잠들었던 그가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운해에서 후배님들이 그랬죠. 제게 모종의 제약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오해했다고요.”

기억난다. 소영과 재효가 얼토당토않은 추측을 할 만큼, 술사는 도통 화내지 않았다. 그를 죽여 제물로 삼겠다는 이들에게조차.

“맞아요. 저는 자신에게 제약을 걸었어요.”

눈이 번쩍 뜨였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거창한 건 아녜요. 몇 가지 감정을 죽이기로 했죠.”

“······왜?”

아무개는 이불 속에서 술사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돌연한 불안감에 무심코 한 행동이다.

“이백 년 전, 역사상 유례없는 재해가 온 땅을 휩쓸었어요. 다환에선 대지진이 일어나고, 남부 대륙은 울창한 밀림이 모래사막으로 화했죠. 국경 너머 이북에는 혹한이 찾아왔어요. 북방의 대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지금껏 사람이 살 수 없는 동토로 남았죠. 그 이유를 아세요?”

알 리가 없다. 아무개가 작게 도리질 치자 술사가 나직이 답했다.

“물의 군주. 혹한의 대제가 분노해서예요.”

이따금 뭇 신령들은 본 권역에서 신기와 같은 권능을 발휘한다. 신령의 상황과 감정, 기분 여하에 따라 해당 지역의 기상 환경이 급변하기도 한다.

하물며 혹한의 대제는 물의 군주라 불리는 대신령이다. 그의 분노를 직면한 영지에 어떤 파국이 닥칠는지···

“일국의 황후를 사모한 혹한의 대제는, 보답받지 못한 연정에 심히 노여워했다지요. 군주의 진노는 혹한이 되어 북부 전역을 눈과 얼음으로 뒤덮어 버렸어요.”

아무개를 가만 보던 술사가 문득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겨우 한 개체의 감정 여하로 다른 모두가 위험을 짊어지는 건··· 몹시 불합리하잖아요,”

율해서의 꿈으로 접한 물의 군주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순수했다. 그의 진노를 상상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아무개 님이 절 많이 좋아해 주시는 건 알겠어요.”

흉신은 직감했다. 이제껏 술사가 한 말은 모두 거절을 위한 준비였음을.

“아무개 님 탓이 아니에요. 싫은 것도 아녜요. 단지··· 제가,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을 나눌 여건이 못 돼요.”

아무개의 위로 고개를 기울인 그가 낮게 속삭였다.

“제 마음은 안 돼요. 대신 다른 건 뭐든 드릴게요.”

결국 거절인가.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대단히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시작은 충동이되, 끝은 죄를 고백하는 심정이었으니.

나 따위가 감히 당신께 추잡한 음심을 품었다고, 주의하라는 경고 조에 가까웠다. 마음을 받아 주길 기대하며 고백한 게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술사의 답이 놀라웠다. 뭐든 주겠다니. 대체 무얼 요구할 줄 알고 그런 위험한 소릴 함부로 주워섬기는가?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쉽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술사의 색 옅은 눈이 나붓이 내리깔렸다.

“제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그런데도 곧장 말씀드리지 못한 까닭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무개 님이 상처받을까 염려되더라고요.”

그 입가에 쓴웃음이 재차 감돌았다.

“아무래도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에요.”

슬픔을 넘어 울컥하는 심정에 아무개는 가슴이 아렸다.

대체 왜 내 걱정을 해? 술사님은 자기 마음은 돌보지 않아?

감정을 나눌 여건이 안 된다고? 혹한의 대제는 무슨 상관이야. 어째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감정을 죽이는데.

그에게 감히 이런 기분을 느끼리라곤 짐작도 못 했다. 먼지 한 톨 앉을까,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애지중지하던 보물을. 정작 그 당사자가 함부로 다루는 꼴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내가 아무리 아끼고 보듬어 봤자, 당신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술사님.”

이를 사리물었다. 터질 듯한 노기를 애써 억누른 아무개가 말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 내뱉었다.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내가 원한 건, 술사님뿐이야. ······그러니 뭐든 주겠다면⎯”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무개의 손에 끌려온 술사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충돌 직전, 아슬아슬한 선에서 멈춘 두 얼굴이 바짝 붙었다.

“당신을 줘.”

흉신은 생에 첫 사유의 순간을 기억했다.

「정녕 네게 남은 게 원한뿐이더냐?」

「세상이 너에게 웃음 한 자락 내어 주지 않았더냐? 작고 서투른 호의 한 줌 받아 본 기억이 없느냐!」

황제의 포효는 짙은 심연의 기저까지 다다랐다. 그 통렬한 불호령은 증오에 물든 원혼들이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호의를 떠올리게 했다.

무수한 기억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찰나의 순간 넘쳐난 생전의 회상은 짧고 덧없으나, 그 규모는 심대했다.

쇄도하는 기억의 파도에 휩쓸린 원혼들이 무력하게 표류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다단한 회고의 홍수. 그 속에 파묻혀 익사하기 직전, 수천수만의 원혼은 이어진 기억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삿갓 아래 미소 띤 얼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든, 궁벽한 산골 초가든, 허물어진 다리 밑의 거적이든. 어디든 상관 않고 홀연히 나타나, 아무 대가 없이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술사.

각자의 불행을 안고 절규하던 원혼이 단 하나, 한 사람의 기억을 공유했다. 세상을 향해 증오와 원망만 표출하던 그들이 언젠가 받은 작은 호의를 떠올렸다.

그 기억의 교차점에서, 아무개는 태어났다.

“마음은 안 된다고 했지? 그럼··· 마음 빼고 전부 다 줘.”

내게 있어 당신은, 단순한 연모의 상대가 아니다. 나를 탄생시킨 존재. 나의 신.

나의 세상.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그의 숨결이 입가에 여리게 와 닿았다. 지척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아무개는, 고개를 기울이며 수중에 쥔 옷깃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닿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서로를 직시하며 짧게 입술을 겹친 아무개가 말했다.

“전에 말했지? 나의 ‘좋아해’가··· 어떤 의미인지.”

손잡고, 포옹하고, 입 맞추고 싶다고. 내가 말한 ‘좋아해’는 그런 뜻이라고.

“······그 정도로 만족해요?”

마찬가지로 입술을 붙인 채 술사가 물었다. 아무개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

“설마.”

그럴 리가.

옷깃을 바투 잡았다. 깊이 포갠 입술을 열고 혀끝으로 상대를 덧그렸다. 여전한 눈으로 아무개를 응시하던 술사가 순순히 입을 벌려 주었다.

바라던 대로 됐건만, 아무개는 짜증이 치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날 패대기치고 도륙 내야지! 색골 자식이 감히 뉘한테 수작질이냐고 화내란 말이야. 왜 이리 순순히 굴어.

참, 감정을 죽인다고 했던가? 그래서 내게 줄 마음이 없다고.

머리끝까지 열이 차올랐다. 분노인지 흥분인지 모를 열기가 이성을 달궜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원혼들이 속삭였다.

⎯ 멈추지 마. 망설이지 마.

그의 입안으로 사납게 침입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이 시끄럽게 아우성쳤다.

⎯ 마음 따위가 무슨 상관이람. 볼 수도,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걸.

⎯ 그 외엔 모두 주겠다잖아. 전부 네 거야.

깊이 묻어 둔 흉신의 욕망을. 원혼들이 들쑤셨다.

그들은 아무개의 정신을 무너트리고자 밤낮없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미세한 빈틈도 끈덕지게 파헤치건만, 이리 대놓고 흔들려서야. 아주 잡아드시라고 넙죽 내놓은 꼴이었다. 원혼들은 흉신이 술사 앞에서 노상 억누르던 사나운 본성을 손쉽게 끄집어냈다.

옷깃을 쥔 손을 미끄러트려 매듭진 고름을 당겼다. 옷고름이 풀리고 저고리가 벌어졌다.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얇은 속적삼 너머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개 님.”

젖은 입술이 떨어진 찰나. 술사의 손등이 아무개의 볼을 가볍게 훑었다.

“화났어요?”

그가 손끝으로 아무개의 눈매를 어루만졌다. 공막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흑백이 뒤바뀐 흉신의 역안이 술사를 주시한다.

“왜 이리 골이 나셨을까, 응?”

꿀을 바른 듯 달큰한 음색이 조곤조곤 어르고 달랜다.

술사는 흉신을 품에 안고 일어나 앉은 다리 위에 올렸다. 그가 등허리를 토닥이며 검지에 낀 반지를 살살 어루만져 주자 뇌리에 울리던 원혼의 아우성이 뚝 끊겼다. 흉신의 광포한 기세가 차츰 가라앉았다.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날 선 기운이 누그러지자 도로 음울한 낯이 된 아무개가 작게 웅얼거렸다.

“······미안해.”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이마에 술사의 어깨가 닿았다.

“잘못했어, 술사님···.”

무얼요? 하고 되묻는 그에게. 아무개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술사님한테··· 못되게 굴었어.”

“저런, 그랬어요?”

술사는 남의 일인 양, 덤덤히 받아넘겼다.

만물점주가 수집한 원혼은 저들을 억압하는 흉신의 사나운 기질을 부추기고, 의식을 흐트러뜨리고자 했다. 세상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그들은, 아무개의 세상마저 망가트리려 했다.

그렇겐 안 되지. 절대로.

“한데 아무개 님.”

머리맡에서 술사가 작게 속살거렸다.

“섰어요?”

흠칫, 몸이 떨렸다.

아무개는 서둘러 허리를 빼려 했으나, 그곳엔 술사의 팔이 감겨 있었다. 도망치려거든 그 손을 떼어 내야 하는데. 아무개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어찌 그의 손을 밀어낼 수 있겠는가.

“하고 싶어요?”

나긋이 묻는 어조에 등줄기가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끔찍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아무개는 허둥지둥하며 헤벌어진 술사의 앞섬을 양손에 쥐었다. 손안이 희게 질리도록 꽈악 움켜잡자 술사가 낮게 웃었다.

“왜 이리 긴장했어요.”

“······술사님··· 나 싫어하지 마···.”

“안 싫어해요. 벌써 잊었어요?”

그의 한 손이 아무개의 허리를 감아 안고, 남은 손은 상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당신은 저를 달라 했고, 저는 그러겠다 하였는데.”

술사가 닿은 곳마다 감전된 듯 저릿저릿했다.

“말해 봐요. 하고 싶어요?”

아무개는 울상을 지었다.

이럴까 봐 경고한 건데. 자꾸만 이리 다정한 듯 헤프게 굴면, 눈 딱 감고 모른 척 넘어가 버리고 싶잖은가.

나는, 나는 참으려고 했는데.

“······하고 싶어.”

당신이 부추긴 거야.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앞으로 넘어왔다. 귓바퀴서부터 얼굴선을 덧그리듯, 손등으로 어루만진 그가 아무개의 턱을 받쳐 들었다.

검게 물든 공막 속. 하얀 홍채가 술사를 마주 봤다. 확실히 인간의 것은 아닌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가 아래 섶을 턱짓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만져드릴까요, 빨아드릴까요?”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아무개의 하반신이 작게 들썩였다.

흥분이 짙어질수록 애써 억누른 난폭한 본성이 언뜻언뜻 비쳤다. 술사의 너른 등을 두 팔로 감아 옥죈 흉신이. 그의 귓가에 대고 섬뜩한 어조로 명했다.

“박아 줘.”

아무개는 눈을 떴다. 흰자위 가운데 홍채와 동공의 경계가 불분명한 검은 눈이 천장을 멀거니 응시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미미하다. 무심코 이맛살을 찌푸린 낯이 빈 옆자리를 확인하고 한층 더 일그러졌다.

술사님이 없다.

손에 잡힌 옷가지를 대강 걸친 아무개가 사당을 나섰다. 서두르던 중 문틀에 손등이 부딪쳐도 아랑곳 않았다.

다행히 술사는 멀리 가지 않았다. 그는 홍의당 인근 비석에 술법을 걸고 있었다. 아무개가 나오자 비석에 손 올린 그가 고개만 뒤로했다.

“깼어요? 피곤할 텐데. 더 누워 있지 않고요.”

으레 그렇듯 태연하게 말 붙이던 술사는 아무개가 걸친 웃옷에 눈길을 주었다. 아무개는 자각이 없는 듯했으나, 그건 술사의 창의였다.

“술사님··· 뭐해?”

“······비술사도 축지할 수 있도록 손보는 중이에요. 전에 후배님들께 소개한 비석 기억하세요?”

아무개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시범을 보인답시고 나섰다가 운해로 축지하고, 오대세가인 하씨네와 깊게 얽혔더랬지.

“여기에 같은 효능을 부여할 거예요. 미리 손써 둘 테니 아무개 님 필요할 때 사용하세요.”

축지술을 양껏 쓸 수 있는 비석이라. 딱히 필요하진 않으나,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얼 한다는 자체가 맘을 누그러뜨렸다.

눈 뜨자마자 텅 빈 옆자리에 가라앉던 기분이 노곤노곤해졌다.

“···내가 축지술을 쓸 만큼, 먼 곳에··· 갈 일이 있을까?”

“흐음, 앞일은 어찌 될지 모르잖아요? 혹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용무가 생길 수도 있고요.”

“······모르겠어.”

아무개의 관심사는 술사님뿐이다. 그가 부재한 사이 특별한 용무가 생긴다면, 이 또한 술사와 관련된 것이리라.

“술사님 없으면··· 술사님 찾으러 갈 때나 쓰지 않을까···?”

솔직히 털어놓자 술사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술사가 손짓했다. 홀린 듯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비석에서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사방팔방 뻗어 나간 빛의 선과 소금처럼 흩뿌려진 점들. 개중 하나가 유달리 붉게 빛났다.

“이게 저예요.”

“······어?”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빛무리 가운데. 홀로 붉게 물은 점 하나.

“제 위치가 표시되게 했어요.”

사용법은 간단하다. 비석에 새겨진 술법을 발동한 후, 원하는 거점을 고르면 끝.

즉, 붉은 점을 택하면 언제든 술사의 곁으로 축지할 수 있었다.

“손 주실래요? 아무개 님 신력을 각인해야 해서요.”

이전에도 소영, 재효와 함께 신력을 각인한 적 있다. 거기에 술사의 행방을 표시하는 술법을 추가했으니, 이는 오직 아무개만 쓸 수 있도록 재각인하는 것이다.

술사의 손 위로 아무개가 제 것을 포개었다. 마주 잡은 손을 비석에 가져다 댄 술사가 우뚝, 멈췄다. 매양 곱게 휜 눈매에 웃음기가 씻은 듯 가셨다.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었다. 왜 그러지, 하고 고개 돌린 아무개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벌어졌다.

사당을 나서며 부딪힌 손등. 그 손등에 거미줄처럼 자잘한 금이 갔다.

마치··· 도자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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