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원귀가 아무개라 명명되고부터 황제는 흉신에게 걸핏하면 자질구레한 얘길 늘어놓았다. 점주가 한사코 말려도 듣지 않았다.
「죽기 전에 발악하는 심정으로 토해 낸 감정적 호소가 먹혀들지 않았나? 우리네처럼 칠정(七情)을 지닌 존재일세.」
요컨대 측은지심을 자극해 흉신의 살의를 억누르자는 계획이렷다.
‘아무개’는 내심 혀를 찼다. 어째 자꾸 귀찮게 들러붙더라니, 이런 속셈이었나? 쓸데없는 짓을.
“내 어머니는 가녀린 분이시지.”
점주가 만류하길 포기한 어느 늦은 밤. 잠에서 깬 그가 뒷간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가택 밖으로 걸음 하기조차 꺼리셨어. 고운 섬섬옥수에 수저보다 무거운 건 들어 본 적도 없을 테지.”
목륜의에 앉은 황제가 흉신을 두고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그새 제법 익숙해진 광경임에도 점주는 무심코 몸을 숨겼다.
“그리 가냘픈 분이 어쩌다 아버님과 연을 맺으셨나, 아직도 의문이라네. 물과 기름처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성정이신데.”
과거 아무개는 황제가 뭐라 지껄이든 귓등으로 흘려넘겼다.
반면 지금의 아무개는 함 장군 댁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딸이 자결하자 예비 사위부터 죽이려 들던 장군과, 딸의 진단만 듣고도 혼절한 부인. 부부의 기질이 참으로 판이했다.
“내 어릴 적, 검을 쥐려 하자 어머니께서 한사코 반대하셨더랬지. 시대가 하 수선하니 아들은 어쩔 수 없다손 쳐도, 딸아이는 곱게 기르길 원하셨다네.”
어린 함수린은 고집이 대단했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호위무사에게 기대는 꼴은 못 견디는 성정이었고.
“결국 자식을 못 이긴 당신께서 포기하셨다만, 속 많이 끓으셨을 게야. 위로만 셋이던 오라버니들이 줄줄이 전사했으니.”
그런 시대였다. 어쩔 수 없다. 모두 같은 고통을 견디고 산다. 나만 특별히 불행한 게 아니다.
거듭 되뇌고 삭이며 힘겹게 버틴 나날이 쌓여 고운 눈가에 주름이 졌다.
“오라비들 자리를 대신하던 어느 날, 급보가 왔네. 어머니께서 임신하셨다더군.”
어이가 없었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황제가 실소를 흘렸다.
“나이 자실 대로 자신 어른들이 늘그막에 어인 사고인가. 내 애가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연치에 동생이라니? 가당치 않다 여기면서도 일단은 축하해드렸지.”
손톱처럼 얇은 초승달이 뜬 밤. 황제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꼭 오늘 같은 밤이었다. 영 싱숭생숭해서 그런가. 잠이 오질 않아 밤바람이나 쐬러 나왔는데, 선객이 있는 게야. 하얀 소복 차림의 어머니가 연못을 뚫어져라 보고 계셨네. 꼭, 당장이라도 몸을 던질 듯이.”
심장이 철렁했지. 당시의 기억을 복기하듯 황제가 지그시 눈 감았다.
“어찌 이러시냐고, 차게 식은 손을 맞잡고 여쭸어. 어머니께서 그러더군. 어차피 또 죽을 자식이라면, 애초에 낳지 않는 게 아이에게도 좋지 않겠냐고.”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냈다. 이 험한 세상에 또 아이를 내보내기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날 맹세했네. 동생은 나와 오라비들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리라고. 일찍이 당신께서 바랐던 대로, 마냥 곱게 자랄 수 있도록. 그런 세상을 만들어드리겠다고. 하니 마음을 편히 하고 몸조리만 신경 쓰시라고.”
아무개는 설경 속의 외침을 떠올렸다. 참혹한 시대를 종결시키겠다던 황제의 결심은, 어린 혈육을 위해서였다지. 목표를 이루고자 쉴 새 없이 달리다 보니 정작 그 동생은 즉위식에서 처음 만나 봤다고.
과거 아무개는 황제가 뭐라든 걸리적거릴 따름이었다. 거슬리면 죽인다 윽박질러도 어차피 도자역 환자라 곧 죽는다며 겁대가리를 상실했기에 더 그랬다.
반면 만물점주는 황제의 곡절이 자못 깊이 와닿은 듯했다.
그는 가족을 되살리려 저승 차사를 속였고, 평생에 걸쳐 그 죗값을 치러 온 자였다. 황제의 가정사를 예사로 치부할 수 없었으리라.
점주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황제가 돌아가고도 한참을, 어두운 밤 그늘 속에 남아 있었다.
“커헉···!”
점주가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기둥에 처박힌 몸이 절로 신음을 토해 냈다.
하나 고통을 달랠 겨를조차 없었다. 점주를 날려 버린 흑기가 남은 아이를 노렸다. 겁을 집어먹고 울먹이는 아이의 바지춤이 젖어 들었다. 도망칠 엄두도 나지 않는 듯이.
“아무개 이놈! 어찌 이러는 게야!?”
⎯ 키아아아아악!
귀곡성이 고막을 찌를 듯 아프게 울렸다. 전신이 가위에 눌린 듯 옴짝달싹 못 하고 옥죄였다.
흉신의 홍채가 하얗게 빛이 바래고 공막은 검게 물들었다. 천지십경도의 마지막 장에서 처음 형상을 갖춘 당시처럼, 원귀의 역안에 살의가 깃들었다.
심연 같은 어둠이 흉포하게 넘실거렸다. 새카맣게 뻗어 나온 손들이 아이를 향해 기어갔다.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질끈 눈 감았다. 바로 그때.
휙⎯!
한 자루의 단도가 흉신에게 날아들었다. 검은 파도에 표류된 양 초점 없는 눈으로 비틀거리던 흉신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미간으로 날아드는 단도를 정확히 잡아챘다.
“정신 차려라! 너희 술사님이 이 꼴을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구나!”
멀리 목륜의에 앉아 단도를 던진 황제가 일갈했다. 삿갓을 쓰고 양손엔 네모나게 자른 종이를 움켜쥔, 어이없는 꼬락서니였다.
한데 그 같잖은 꼴에 흉신이 움찔, 했다.
저 때 당시 아무개는 정신이 혼미하여 황제가 뭐라는지 알아먹지도 못했다. 대신 현재의 아무개가 과거 자신이 날뛰는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만물점주의 눈을 통해.
지금쯤 술사님도 같은 꿈을 꾸고 있으려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리라는 황제의 일갈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아무개에게 통렬히 와닿았다.
“얘야, 어서 돌아가거라.”
점주는 흉신이 멈춘 틈을 타 아이를 재촉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서신을 내팽개친 심부름꾼 아이가 부리나케 달음박질쳤다.
사냥감이 벗어나려 들자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아이가 대문을 넘어서고, 간발의 차로 뒤처진 어둠이 결계에 부딪혔다.
물결치듯 넘실거리는 어둠에서 수십 쌍의 손이 뻗어 나와 결계를 내리쳤다. 검은 손에 후드려 맞은 결계가 웅-웅- 크게 진동했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심부름꾼 아이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생채기 난 손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 무렵, 흉신이 정신을 차렸다.
검게 변한 공막이 흰자위를 되찾았다. 까만 눈동자가 주위를 휘 둘러봤다.
난장판이다.
흉신은 안개처럼 짙게 드리운 어둠을 거둬들이려 했다. 하나 잔뜩 흥분한 기운은 쉽사리 제어되지 않았다. 도리어 억제하려는 흉신에게 날을 세웠다.
결계를 부술 듯 두들기던 손이 방향을 바꿨다. 그 손들이 일제히 흉신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손이 해일처럼 밀려와 덮쳐든 찰나, 황제의 단도를 역수로 쥔 흉신이 길게 횡을 그었다.
키아아악⎯! 끔찍한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반으로 갈라진 어둠의 기세가 한껏 수그러들었다.
폭주를 멈춘 암흑이 흉신의 발치로 돌아왔다. 상황이 진정되자 황제가 목륜의 바퀴를 굴리며 다가왔다.
“그간 조용히 잘 지내는가 싶더니. 어찌 이리 날뛴 것이냐?”
“······잘 때는 건드리지 마.”
심부름꾼 아이가 만물점에 방문했다. 점주를 기다리며 마당을 서성이던 아이는, 하필 흉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연기처럼 검게 일렁이는 기운이 신기했던 탓일까. 주위를 어슬렁대던 아이가 호기심에 살짝 손을 대고 말았다.
“···죽기 싫으면.”
친절하게 경고해 준 흉신이 휙 돌아서 가 버렸다. 아무개는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잠에 들면 ‘아무개’의 의식이 흐려진다. 그 틈을 노린 원혼들이 육신의 주도권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이날은 며칠간 깨어 있던 아무개가 잠시 졸던 중, 심부름꾼 아이가 원혼을 자극해 벌어진 사고였다.
“점주. 아이는 무사히 돌아갔는가?”
황제는 아이의 안전부터 확인했다. 점주는 아이가 내던진 서찰을 옷깃 사이로 밀어 넣었다.
“네. 겉보기론 다친 데 없이 멀쩡했습니다. 많이 놀랐을 테지만, 잘 추스르길 바라야죠.”
“다행이군. 한데 그 아이는 어인 일로 예까지 온 건가?”
“아마 심부름일 겁니다. 간혹 제게 용건이 생기면, 인근 마을에서 연락을 넣곤 합니다.”
황제를 들여보낸 점주는 홀로 남아 서안을 펼쳤다. 공포에 질린 아이가 필사적으로 움켜쥔 탓에 구깃구깃했다.
[폐하를 위해 유명경이 필요합니다.]
짧은 문장. 서신과 함께 구겨진 단 한 줄의 글귀가 점주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아무개는 그의 당혹감을 십분 이해했다.
첫째로, 상대가 황제의 위치를 어찌 알았느냐는 점이다.
황궁에서부터 뒤를 밟았거나, 점주를 감시했거나.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못한 가정이었다.
둘째로, 상대가 요구한 기물이 문제다. 유명경(幽明鏡). 저승과 이승을 비추는 거울.
그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근원.
점주는 부엌으로 달려가 서신을 아궁이에 던져 넣었다. 불쏘시개로 깊숙이 밀어 넣자 불씨가 서신에 옮겨붙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엌을 벗어났다.
그대로 무시할 줄 알았건만. 부쩍 안절부절못하던 점주는 한 시진도 참지 못했다. 집안으로 들어간 그는 부옇게 먼지 쌓인 궤짝을 열어 허름한 목함을 꺼냈다.
점주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붉은 비단으로 감싼 거울이 담겨 있었다.
그저 들여다보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운 듯, 점주가 황급히 목함을 닫았다. 녹슨 걸쇠가 잔뜩 삐걱댔다.
“헉, 허억···.”
점주는 궤짝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가만있는데도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한참 뒤. 북받친 호흡을 겨우 가라앉힌 점주가 보자기로 목함을 대강 싸맸다. 만물점을 벗어난 그는 산 아랫마을에서도 구석진 외곽, 오래 묵은 비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선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이번에는 아무개도 놀랐다. 선객의 얼굴이 부쩍 낯익었던 탓이다.
양 의원. 함 장군 댁 막내 아씨의 약혼자.
그가 결연한 얼굴로 점주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