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목륜의를 완성한 점주는 재빨리 황제를 부축해 앉혔다. 마당을 한 바퀴 빙 둘러보기도 했다.
“어떠신지요. 이 정도면 꽤 쓸 만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나쁘지 않아.”
그때 점주의 가슴팍에서 푸른빛이 깜빡였다. 북방의 난쟁이 장인이 제작한 귀물, 연경(連鏡)이었다.
“뭐야, 왜 이리 늦어?”
거울 안에 다른 얼굴이 비치자마자 점주는 대뜸 타박부터 했다. 천지십경도에서 보낸 시간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탓이다.
⎯ 죄송합니다. 아무리 저라도 주단 금씨 종가에 잠입하기는 까다로워서.
“주단 금씨? 거긴 왜?”
⎯ 한때 금가에서 도자역을 심도 있게 연구한 적 있잖습니까? 혹 요긴한 기록이라도 남아 있을까 싶어 가 봤습니다. 한데······
말끝을 흐리던 상대는 그 자신도 믿기 어렵다는 듯 덧붙였다.
⎯ 놀랍게도, 종주가 도자역 환자였습니다.
연경을 움켜쥔 손에 힘줄이 섰다.
이어지는 보고는 다소 충격적일 법했으나, 앞서 소영과 재효에게 전해 들은 아무개는 대개 아는 것들이었다.
“도자역에 걸린 환자를 도우면, 도운 사람한테 병이 옮는다고? 대관절 ‘도움’의 기준이 무언데? 누굴 시켜서 한 다리 건너 도우면, 그것도 걸리나? 일방적으로 돕는 게 아니라, 거래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득을 보게 하면? 그것도 도움의 일종인가?”
⎯ 죄송합니다만, 저도 거기까진···.
“그래, 그렇겠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수준인 ‘도움’의 기준을 명확히 알아보겠답시고 멀쩡한 사람을 도자역 환자한테 밀어 넣을 순 없는 노릇이니··· 고생했다. 조금만 더 수고해 다오.”
연락이 끊기고 면경에 도로 점주의 얼굴이 비쳤다. 본의 아니게 지척에서 함께 들은 황제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도자역이 어찌 옮는가 알아내고서도, 가문의 위신을 지키고자 은폐한 겐가? 고작 그런 이유로! 무수한 백성의 고통을 모른 척하다니···!”
황제가 분개했으나, 아무개는 냉소했다.
주단 금씨는 셀 수 없이 많은 거지를 희생시켜 연구한 족속이다. 고작 모른 척하는 정도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리 있나. 어림도 없지.
“내 황궁에 있었다면, 당장 주단으로 쳐들어갔을 것을!”
하나 작금 황제는 제 발로 걸을 수도 없는 신세라. 점주는 한숨만 내쉬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때 되면 제가 폐하를 대신해 낱낱이 고발하겠습니다. 도자역과 금씨 놈들이 저지른 파렴치한 짓거리까지 전부 말입니다.”
“그래. 일단 지금은···.”
황제의 시선이 역귀를 향했다.
“저것부터 해결해야겠지.”
황제는 점주의 도움 없이 홀로 목륜의를 끌었다. 깨지고 부서진 손으로 바퀴를 밀자 의자가 천천히 나아갔다. 그 끝에 다다른 것은, 원귀가 자리한 나무 둥치였다.
“삿된 것아. 예서 뭘 하는 게냐?”
아무리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지만, 면전에 대놓고 삿되다니. 참으로 거침없는 행보다.
점주가 기겁하며 황제를 뒤쫓았다. 다행히도 원귀는 누가 뭐라 지껄이든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네가 가만있으니 우리야 좋다만, 어인 영문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원귀는 귀먹은 농인처럼 먼 산만 내다봤다.
안 그래도 창백한 낯에 석상인 양 꿈쩍도 않으니 통 산 것 같지가 않았다. 다만 그 몸을 타고 흐른 흑기가 물결 따라 흔들리는 지느러미인 양 거듭 너울댔다.
“말 좀 해 보거라. 원혼 덩어리일 적엔 귀청 떨어지도록 비명을 지르더니. 삿된 신령으로 거듭나고부턴 어찌 입을 꾹 다물고 있누?”
황제의 거침없는 도발에 점주의 새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를 너무 무시하진 말거라. 이래 봬도 네겐 부모나 다름없지 않으냐? 내 간곡한 호소가 너의 심금을 울려 태어난···!”
촤아악⎯! 지면에서 일렁이던 어둠이 돌연 솟구치며 황제를 낚아챘다.
검은 손들이 황제를 높이 잡아 들었다. 기세에 눌린 목륜의가 무참히 부서졌다. 빠져나온 의자 바퀴가 데구르르 나동그라졌다.
심연의 어둠 속에서 피어난 손들이 황제를 나무 위까지 들어 올렸다. 여전히 먼 산만 멀거니 보던 원귀가 처음으로 입 열었다.
“닥쳐.”
“······.”
“나를 만든 건······ 네가 아니야.”
휙, 검은 손들이 황제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공중에서 추락하는 몸을 점주가 허둥지둥 받아 냈다. 황제는 도자역에 걸렸다. 발목만 삐끗해도 치명상인 판국에 저 높이서 떨어졌다간, 그야말로 산산조각 날 터였다.
물론, 원귀는 황제가 어찌 되든 신경도 않겠지만.
“쿨럭···!”
목을 잡혔던 황제는 뒤늦게 막힌 숨을 토해 내며 연거푸 기침했다. 점주의 몸이 안도감으로 잘게 떨렸다.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하나 그리 당하고서도 황제는 겁도 없이 원귀에게 말을 붙였다.
“네가 태어날 적에 함께한 이가 누구더냐. 나와 점주 둘뿐이었다. 우리가 아니면, 대관절 누가 너를 만들었단 게야?”
점주는 황제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빌었다.
그만하자고, 위험하니 제발 돌아가자고. 어차피 저 원귀는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으리라고.
“······술사님.”
한데 예상을 깨고, 원귀가 응답했다.
“술사님이··· 떠올라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당장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치 살벌했건만. 술사님, 하는 짧은 부름에 원귀의 날 선 기도가 확연히 누그러졌다.
이때다 싶었던가. 황제가 조금 더 캐물었다.
“술사? 이 땅에 술사가 어디 한둘이더냐. 네가 말하는 술사가 누구냐?”
“······하얀 부적에, 삿갓··· 을 쓰고···”
기억을 곱씹듯 느리게 이어지는 묘사에 점주가 경악했다.
“유랑술사?!”
언성이 과했다.
점주는 제 목소리에 지레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고개를 돌린 원귀가 점주를 응시했다.
“술사님··· 알아?”
“당연히 알긴 안다만···.”
무심코 답하던 점주의 뇌리에 퍼뜩 잔꾀가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지낸 사기꾼의 특성이 속살거렸다.
“함께 사대귀인이라 엮이는 사이이니만큼, 뭇사람들보단 잘 알지. 무어, 네놈이 살생을 금하고 얌전히 지낸다면야. 내 아는 걸 말해 줄지도···?”
점주가 은근히 여지를 남겼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어째 저놈의 원귀가 유랑술사에게 호의적인 듯하니. 한번 이용해 볼 심산인 게다.
하나 원귀도 만만찮았다. 점주의 수작질을 간파한 원귀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살생을 참기보다 네 살점을 저미는 쪽이 빠를 것 같은데···. 손가락부터 하나씩 자르다 보면, 알아서 술술 불겠지.”
“크흠, 흠. 그래, 유랑술사의 무어가 궁금하더냐? 내 아는 선에서 얼마든지 알려 주마!”
태세 전환이 수준급이었다. 심각하게 듣던 황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릴 만큼.
점주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으나,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원귀는 여전히 날을 세우고 언제든 거슬리면 죽인다는 심산을 대놓고 드러냈지만, 아예 없는 취급은 면했잖은가.
“네놈 의중은 모르겠다만, 계속 예 머물 셈이거들랑 호칭부터 정하자꾸나. 계속 원귀니 흉신이니 삿된 것이니 할 수는 없잖느냐.”
점주는 부러 말귀를 돌렸다. 지금 당장 유랑술사에 대해 몽땅 알려 줘선 안 된다. 서서히, 조금씩, 미끼처럼 써먹어야지.
황제와 미리 입을 맞춰 두기도 했다. 놈의 호칭이나마 그럴싸한 걸로 붙여 보는 게 어떠냐고. 혹 아는가? 착하다 착하다 하면 정말로 착해질는지.
“이름이 있느냐?”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원귀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입 열었다.
“금복이.”
“금복? 고놈 참, 보기와 달리 복이 넘치는 이름자가···.”
“각쇠. 애금. 만덕이. 삼보. 언년이. 신경승. 엄수광. 영길이. 순자. 장수. 백운······.”
줄줄줄 한도 끝도 없는 이름자에 점주가 멈칫했다. 뭔 놈의 이름이 그리 많누, 하던 그가 뒤늦게 깨달았다.
흉신은 본디 수천수만의 원혼 덩어리였다.
즉, 원귀가 읊는 것은 원혼들이 살아생전 불리던 이름이다.
“돼, 됐다, 됐어! 그만해라, 이놈아!”
듣다 못한 점주가 원귀를 막았다.
“이러다 도성부터 예까지 이름으로 줄을 세우겠다! 알아먹었으니 그만해라. 거 뭐냐, 대충··· 아무개. 아무개로 퉁치자.”
생전 이름을 쓰지 말라 할 수는 없잖은가. 멀쩡히 잘 있는 이름을 너무 많답시고 새로 붙여 줄 수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임기응변으로 내지른 점주는, 막상 아무개는 좀 그런가? 걱정스러운 듯 눈치를 살폈다. 그가 슬그머니 발을 빼려 들었다.
“싫으냐? 맘에 안 들면 됐다. 적당히 그럴듯한 이름으로···.”
“아니.”
원귀가 무심히 대꾸했다.
“맞아. ······응. 난 아무개야.”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혼의 집합. 콕 집어 무어라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노비와 백정, 거지와 부호, 정승에서 황족까지. 남녀노소 상하 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언제든 그리될 수 있는.
즉, 아무개였다.
아무개는 점주의 눈으로 과거 자신을 마주했다.
실은 천지십경도 마지막 장, 설경에서 그들이 나눈 이야기를 전부 들었더랬다. 황제가 제 정체를 물었고, 점주는 답했다. 재앙이라고.
아무개는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는 재앙을 부르는 흉신이구나.
오랜 시간 저를 가둔 항아리에서 벗어나 자아를 형성한 후. 처음으로 확립한 정체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