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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08)화 (108/138)

108화

“염병. 저것들은 지치지도 않나.”

시냇물을 떠다 마신 점주가 소매로 젖은 턱을 닦았다. 옷가지에 붙은 흙먼지가 입에 들어간 바람에 우엑 퉷퉷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황제가 육포 조각을 던져 주었다. 점주는 울적하게 육포를 물었다. 그간 원혼에 쫓기느라 따로 식사할 여력이 없었다. 황제의 건량으로 허기만 속이길 몇 날. 입에서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잠시 눈 좀 붙이게.”

점주는 고개를 끄덕일 기운도 없어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눈을 감자 몽롱한 정신이 금세 까무룩해졌다. 수면과 각성의 경계 어드메에서. 점주는 깬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위태로운 휴식을 취했다.

항아리의 원혼을 피해 도망 다닌 지 몇 날 며칠이 지났으려나. 그들이 들어선 병풍 속 세상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변화가 없어 시간의 흐름을 가늠키 어려웠다.

“폐하께서도 쉬시죠.”

양 뺨을 찰싹 때리며 점주가 일어났다.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쪽잠을 잤다. 황제가 쉬는 동안엔 그가 경계를 서야 했다.

점주가 하품하며 입을 쩍 벌리던 중이었다. 건너편 풀숲이 흔들리는 모양에 점주가 혼비백산했다. 곧 토끼가 뛰어나왔다.

“어우, 깜짝이야!”

안도한 점주가 새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만 봐도 놀라기 마련. 이젠 풀숲에 뛰노는 토끼에도 벌벌 떠는 꼴이 되고 말았다.

“쯧, 그래 봤자 그림인 주제에. 쓸데없이 생생해서는.”

점주는 그의 과민함을 남 탓으로 돌렸으나, 아무개도 조금은 동의했다. 묵월당의 화폭 속 세계는 실제와 다를 바 없이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만일 해가 뜨고 지기까지 했다면, 공간과 공간을 잇는 축지술의 다른 형태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유랑술사가 저자도 사원 내에 온천을 연결했듯이.

천지십경도는 산수도이니만큼 토끼나 사슴 따위가 종종 눈에 띄었다. 만약 묵월당이 인물화를 그렸다면 어땠을까.

화폭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을까?

“왜 벌써···.”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얼마 쉬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일어나느냐 묻던 찰나, 황제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하는 동작에 점주가 불안한 기색으로 두리번거렸다.

싸아아⎯ 불길한 바람이 다가왔다. 공기 중에 섞여 든, 먼지처럼 작은 입자를 피해 옷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재 가루 같은 그것은 원혼이 집어삼킨 세상의 흔적이었다.

“······온다.”

지친 육신이 긴장으로 굳었다.

어디냐. 어디에 있지? 점주는 필사적으로 원혼을 찾으려 했다.

싸우기 위함이 아니다. 한낱 인간이 맞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이토록 집중하는 까닭은 도주하려 함이다.

애초 황제가 목적한 바는 시간을 끄는 것이었으니. 원혼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병풍 속에 가둬 두고자 이리저리 숨바꼭질하듯 버티는 것이다. 그러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을 즈음, 다음 화폭으로 넘어가곤 했다.

한데 눈을 씻고 봐도 원혼이 뵈질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점주가 목소릴 한껏 낮추고서 여쭈었다. 하나 황제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희한하군. 분명 지척에 있을진대.”

황제가 나직이 되뇔 무렵. 머리 위로 너른 그림자가 졌다. 굳은 낯으로 고개를 쳐드는 황제를 따라, 점주도 목을 젖혔다.

새카만 얼굴이 지상을 굽어보았다.

함부로 움켜쥔 종잇장처럼 구겨진 하늘. 잔뜩 우그러져 구깃구깃 접힌 하늘 너머로 거대한 얼굴이 먹구름처럼 드리웠다. 한없이 짙은 어둠이나, 실상 무수한 인영이 한데 엉킨 형상이었다.

거대한 눈동자에서 작은 팔이 비죽 솟아났다. 전후좌우 휙휙 꺾이던 팔목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것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황제와 점주는 서둘러 달음박질했다. 그들 뒤로 하늘에서 불거진 손이 쉼 없이 쏟아졌다.

검은 손이 파바박! 내리꽂히며 천지를 잇는 무수한 선을 그렸다. 화살 비에 쫓기는 것만 같다.

점주는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쇄도한 검은 손이 종아리를, 팔등을, 어깨와 뒷덜미를 아찔하게 스치었다.

으아악···! 공포에 질린 점주가 악을 쓰며 냅다 뛰었다. 병풍의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곳은 새하얀 설원이었다.

황제는 점주를 데리고 눈 내린 나무 아래로 숨었다. 뒤이어 부욱⎯! 종이 찢기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음산한 기운이 온 세상에 덮쳐들었다.

인간을 쫓은 원혼이 설경에 다다랐다.

점주는 숨을 헐떡이며 눈 덮인 가지 사이로 하늘을 올려봤다. 설원 한 귀퉁이에 뜯겨 나간 종잇장처럼 너절한 구멍이 뚫렸다. 제아무리 현실처럼 생생한들, 화폭의 세계란 이다지도 연약했다.

⎯ 아아아아아!

원혼의 울부짖음에 영혼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눈 뜨고 가위라도 눌린 양 경직된 점주의 어깨를 황제가 툭, 두드렸다.

“위에서 감시하니 그늘진 곳으로 피해야겠네. 이번이 마지막일세. 더는 도망갈 곳도 없어.”

“마지막이라뇨, 어인 말씀이십니까?”

“몰랐나? 우리가 지나온 그림이 벌써 아홉 장일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지십경도는 총 열 폭의 화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화폭에 들어서고부터 지나온 그림이 아홉이라 함은···

“여기가 끝이야. 이 설원이 병풍의 마지막 장일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예서 끝장을 봐야 한단 게지.

쌓인 눈을 헤쳐 나가며 황제가 뇌까렸다. 점주는 불안한 심장께를 꾹 내리눌렀다.

그들이 나무 아래로 열심히 숨어 다닌 덕일까. 천공을 포기한 원혼들이 지상에 강림했다.

황제와 점주는 최선을 다했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눈밭은 흔적을 숨기기 어렵고 건량은 다 떨어졌다. 묵월당의 화도 속 세계는 추위마저 실감 나게 재현했다. 점주는 푸릇한 손끝에 연신 입김을 불었다.

하나 그를 진정 괴롭게 함은 추위도 굶주림도 아니었다.

⎯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버려······

⎯ 살려 주세요. 제발···!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원혼의 아우성이. 점차 선명한 형태를 띠는 것이다.

⎯ 원통하구나, 원통해! 이 원통함을 누군들 알아줄까···

⎯ 용서치 않겠다. 네놈들을, 죽어서도 기필코 저주하리라!

울분에 찬 탄식, 구걸하는 애원, 증오 서린 저주까지.

남녀노소 불문. 온갖 절규가 가슴을 수렁처럼 찔러 댔다.

“이보게, 점주.”

황제가 눈을 내리감았다.

“저들 모두가 영혼의 비명인가?”

“그렇습니다.”

“괴로워하는 듯한데. 슬퍼하는 것도 같고.”

“한이 짙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혼들이 아닙니까. 슬프고 괴로운 게 당연지사지요.”

“······그런가.”

황제가 가만히 눈을 떴다. 그 시선이 파랗게 언 점주의 손끝에 닿았다.

“안 되겠군.”

검병에 손을 얹으며 황제가 일어섰다.

“이 몸은 도자역에 걸린 탓인지 감각이 둔해졌어. 덕분에 그다지 추위를 못 느끼네만, 주인장은 다를 테지.”

“그 말씀은···?”

나무 그늘 밖으로. 황제가 걸음을 내디뎠다.

“자네는 물러나 있게. 병풍 밖으로 도망가도 개의치 않을 테니 알아서 잘 건사하게나.”

십 첩 병풍 최후의 장. 마침내 황제는 원혼과 맞서기로 했다.

⎯ 살려 줘···!

⎯ 죽어, 죽어!

⎯ 제발······

원혼은 소리뿐 아니라 형상도 차츰 명확해졌다. 깨진 항아리 틈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그것은 원과 한이 엉긴 덩어리에 불과했으나, 날이 갈수록 뚜렷한 형태를 띠어 갔다.

사지가 붙은 몸체에 머리를 지닌··· 마치, 사람과 같은.

“이리 오너라!”

쥐새끼처럼 기척을 숨기고 호흡조차 신중하던 인간이 돌연 나서서 목청껏 외쳤다. 원혼이 즉각 반응했다.

“짐은 다환을 일통한 천하의 지배자니라!”

원혼이 검게 이룬 형상의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오른 다리는 황제에게 달려들었으나, 왼 다리는 축 늘어져 바닥에 질질 끌렸다. 얼굴은 등 뒤로 꺾여 뒤통수를 내밀고서 걸었다.

신체 각 부위가 서로 다른 주체로 이루어져, 하나의 통일된 체계 없이 뒤죽박죽 섞인 모양새였다.

“이승에 한이 많아 저승으로 떠나질 못하겠느냐? 허면, 이승의 지배자인 이 몸에게 고해 보거라!”

그 일갈이 어떤 울림으로 와닿은 걸까.

사지를 배배 꼬던 원혼이, 형체를 반쯤 무너트리며 달려들었다. 어설프게나마 형태를 띠던 것도 포기하고, 맹목적인 살의만 남긴 채.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잔상을 남겼다.

그에 맞선 황제가 발검했다. 호명(虎鳴)의 기운을 담아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보검, 사인검.

황제의 검이 원혼을 막아 냈다.

채앵-! 원귀가 뱀처럼 쏘아 들고, 황제가 받아쳤다. 명백한 물질로 이뤄진 검이,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오가는 원혼을 상대한 것이다.

“어찌, 이런··· 당치도 않은···?”

점주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훌륭한 장인이 각고의 노력으로 벼려 낸 검이라 한들, 악령을 상대할 적에는 술사의 법기에 비할 수 없다. 그게 상식이다.

하나 황제는 해냈다.

모든 빛을 거부하듯 섬뜩하도록 검은 기운. 그에 가려진 황제의 신영이 보이질 않았다.

“서글픈 세월이었지.”

한데 그 목소리만은 뚜렷이 들렸다.

“난세란 무릇, 평범한 일상이 사치가 되는 시절이 아니더냐.”

챙, 채앵-! 매서운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황제의 음색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었다.

안정된 호흡과 자세. 사방팔방 몰아치는 원혼의 공세를 다 막아 내진 못하나, 치명상은 피한다.

대단한 일전이다. 멀찍이 떨어진 점주의 눈으로도 보였다. 원과 한으로 점철되어 살의만 남은 어둠이, 황제의 검과 맞댈수록 차츰 변모했다.

제멋대로 흩어지고 뒤틀리던 사지가 일정한 형상을 갖춘다. 중구난방 마구잡이식으로 몰아치던 원혼이, 팔등을 세워 검을 막고 하지로 발목을 노린다. 체술을 쓰는 것이다.

황제가 차츰 무너졌다. 찍어 누르는 원혼을 검으로 막았으나, 병든 손이 그 위력을 견디지 못했다.

검을 쥔 엄지와 검지 사이로 쩌적, 금이 갔다. 도자역에 잠식당한 육체는 이리도 나약했다.

그러나 황제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검 너머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지척에서 원혼과 대면했다.

“내 시산혈해를 밟고 나아감은, 슬픔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려 함이니. 난세에 진정 절실한 것은 혼란을 종식시킬 절대적이고 압도적이며 일원화된 폭력이라. 이 함수린이 패도의 길을 택함은 그런 까닭이다.”

수천수만의 원혼이 밀려들었다. 소복이 쌓인 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산하며 흩날렸다. 그들 주위로 수목이 휘청이며 가지가 꺾이고 부러졌다.

“참혹한 시대에 종언을 고하리라 결심한 연유는, 어린 혈육에게 더 나은 세상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콰직! 막대한 압박에 짓눌린 황제의 발이 지면에 파묻혔다. 그 충격으로 발 밑바닥부터 종아리까지 균열이 일었다. 아마 다시는 걸을 수 없을 테지.

“정작 그 애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즉위식이었다. 막사에서 서면으로나 소식을 접했지. ······아이가 글을 배우고 처음 보내 준, 서투른 편지는 내 가장 아끼는 보물이 되었다.”

검고 어두운 암흑이 먹물처럼 일렁이며 검날을 쥐었다. 까드득⎯ 예사 검이라면 진즉 산산이 조각났으리라.

한 손으로 검을 쥔 원혼이. 남은 손을 황제의 목에 가져갔다.

두 다리를 잃고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황제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일갈했다.

“목숨을 건 전장에서조차 서신 한 통에 울고 웃는 것이 사람이거늘. 정녕 네게 남은 것이 원한뿐이더냐? 희로애락의 연속인 삶에서, 기쁘고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었단 말이냐!”

세상을 향해 무한한 악의를 쏟아 내는 귀와 영에게. 이승의 지배자가 하문했다.

진정으로, 이 세계가 오롯이 나쁘기만 한 것이었느냐고.

“세상이 너에게 웃음 한 자락 내어 주지 않았더냐? 작고 서투른 호의 한 줌 받아 본 기억이 없느냐!”

살아서 도망치라는 명을 어긴 점주가 그들을 향해 냅다 달렸다. 하나 지나치게 서두른 탓인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눈밭을 데굴데굴 구른 점주가 동백나무에 퍽, 부딪혔다.

붉은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개중 한 송이가 혈투의 중심지, 원혼과 황제의 틈 사이로 살랑살랑 낙화했다.

짙은 암흑이 일순 사그라들었다. 새카만 기운이 가지고 그 안에 숨겨진 말간 낯이 드러났다.

기존의 어설픈 모양새가 아닌, 완연한 사람의 얼굴. 유일하게 이질적인 부분은, 들짐승처럼 상반된 하얀 홍채와 어두운 공막이었다.

기묘한 역안이 동백의 낙화를 눈으로 좇았다. 먹물처럼 새까만 흔적 한 줄기가 눈가에서 뺨을 타고 흘렀다. 검게 물든 공막에 색이 빠지듯 희어졌다. 홍채 또한 예사로 그러하듯, 검은빛을 품었다.

귀곡성이 사그라들었다. 음산한 흑기도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원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한 명의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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