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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07)화 (107/138)

107화

“하고많은 날 중에 하필 오늘 사달이 났군그래.”

황제가 푸념하자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점주가 실은 위험하게 된 지 오래였다며 구시렁거렸다.

“부적으로 땜질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진작 한계였습죠. 이게 다, 원혼이 가득 차서 항아리가 넘치도록 코빼기도 뵈질 않은 저승 차사 놈 탓입니다.”

항아리를 부적으로 도배하다시피 해도 차사는 오지 않았다. 넘치는 원혼을 견디지 못하고 그릇이 깨질 때까지.

“내 이 방면으론 문외한이나, 자네의 결계부라는 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성싶은데?”

원혼이 결계를 내려칠 때마다 쿵, 쿵, 북이 치는 듯했다. 덩달아 들보가 흔들리고 기와가 들썩였다. 불길한 징조에 둘러싸이고서도, 황제는 위안거리를 찾아냈다.

“원혼이 우리 쪽으로 모여든 건 불행 중 다행이군. 혹여나 저들이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간···.”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황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점주. 저것을 처리할 방도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도대체 왜 이리된 건지······.

만물점주가 괴로이 탄식했다. 그간의 노고가 일순 물거품으로 전락한 죄인이 절망했다.

“나를 잊은 겐가? 아니면, 저승 것들은 이승의 세월이 그저 찰나에 불과한 게요?”

점주는 기약 없는 형을 내린 차사를 원망했다. 정작 그의 절규를 들어야 할 차사는 예 없고 일면식이나 한 황제뿐이었으나.

“정신 차려.”

피와 살로 일국을 세운 패왕은, 좌절을 용납지 않았다.

“비탄은 나중에. 지금은 슬픔도 사치다.”

황제는 옹송그린 점주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저들을 처리할 방도를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둠에 휩싸인 원혼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황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우리 중 저들을 처리할 가망이 그나마 있는 건 점주 자네야. 방도만 찾아내. 실행은 내가 할 테니.”

울든, 실성하든, 식음을 전폐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다만 그전에 해결책을 찾으라고.

쿵, 쿠궁, 쾅!

벽을 두드리는 타격이 한층 더 강해졌다. 금이 가고 어긋난 천장에서 먼지 같은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대들보가 휘청이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일촉즉발이다.

“불가합니다.”

점주는 허망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세간에선 사대귀인이니 뭐니 하지만··· 저는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승 차사의 심술로 명줄이 좀 길어졌을 뿐입죠. 제게 무슨 힘이 있어 저 많은 원귀를 진혼하오리까?”

츳, 혀를 찬 황제가 멱살을 풀어 주었다. 털썩 주저앉는 점주를 뒤로한 황제가 문밖의 원혼 덩어리를 향해 섰다.

“저들이 널리 세상 밖으로 퍼져 나갔다간··· 얼마나 참혹할는지. 짐작도 안 가.”

함수린은 여전했다. 도자역에 걸리고도 제 죽음보다 후세에 미칠 영향을 괘념했듯, 당면한 위험에도 일신의 안위보다는 원혼이 끼칠 피해를 염려했다.

그에 감화라도 된 걸까. 점주가 머쓱한 손길로 구겨진 옷깃을 털어 냈다.

“산에도 결계를 쳐 뒀으니 당분간은 벗어나지 못할 겝니다.”

“그건 다행이로고. 하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지.”

“예. 결계도 만능은 아니고 항아리의 원혼들은······.”

콰아앙!

“······제 결계 정도는, 얼마든지 부술 수 있을 성싶으니 말입죠.”

황제는 언제든 발검할 수 있게끔 검병에 손을 걸쳐 두고 유심히 살펴봤다.

“이리 보니 저 원혼이란 것들은 죄 따로 노는군?”

시꺼먼 손자국이 결계에 덕지덕지 붙었다. 황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화력을 집중시켜 일점 돌파하면 진작 결계를 부수고도 남았을 듯한데. 중구난방에 마구잡이로 달려드니 위력이 분산됐어.”

“당연하지 않습니까? 언뜻 한 무리로 보이나, 저들은 모두 제각각의 원혼입니다. 훈련받은 군대도 아닐뿐더러 동료애도 없을 텐데. 단합이 잘되면 오히려 이상하죠.”

“우릴 쫓을 땐 합심해서 달려들었잖은가.”

“원령이란 게 다 그렇습죠. 산 자를 해코지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하나같이 제멋대로인 주제에, 사람 해칠 때만큼은 일치단결하는 모양입죠.”

“나 원, 저들을 밖으로 내돌려선 아니 된다는 결심만 확고해졌어.”

나직이 탄식한 황제가 점주에게 명했다.

“자네는 연경으로 밖에 상황을 알리게. 누구든 좋으니 이 사달을 해결할 능력자가 있거든 뫼시고, 만일을 대비해 인근 주민은 피난시키세.”

점주가 허둥지둥 연경을 꺼내 들었다. 정객(偵客)에게 상황을 전하자 황제는 다음 임무를 맡겼다.

“자네는 만물점의 주인이지. 일신의 공력은 미약할지언정, 그대가 수집한 귀물은 다를 게야. 그렇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허면 지금부터 여기 곳간채의 귀물 중 원령을 상대할 법한 걸 찾게. 우리 둘로는 원귀를 당해 내지 못한다 해도, 해결사가 당도할 때까지 시간은 벌어야지 않겠나.”

황제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자 점주도 슬슬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평생에 걸쳐 일군 노력이 한순간 무너진 바람에 다소 어리숙하게 굴었으나, 그는 저승 차사마저 속여 낸 진성 사기꾼이었다. 잔꾀가 많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벌떡 일어선 점주가 곳간채를 들쑤셨다. 곧 그가 발치에 다양한 귀물을 줄지어 놓았다. 점주는 상앗빛 피리를 가리켰다.

“이 피리는 한때 백해도의 지배자였던 사령술사가 장자의 다리뼈로 만들었습니다. 백해도에 출몰한 이변을 저지하고자···.”

“짧게 하지.”

“···피리 소리로 혼을 조종합니다.”

점주는 여러 귀물의 효능을 설명했으나, 황제는 맘에 차지 않는 듯 묵묵히 검병만 매만졌다. 점주는 까다로운 고객을 둔 장사치인 양 굽신굽신했다.

“저건 무언가?”

구석진 벽에 기대어 놓은 것을 가리켜 묻자 점주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비단보를 풀자 병풍이 나왔다.

“이 병풍에는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길게 말해 보게.”

“옛날 연나라에 묵월당이라는 화백이 있었습니다. 화훼(花卉)를 그리면 나비가 날아와 앉고, 초충(草蟲)을 그리면 새가 쪼아 먹는다는,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른 화공이었죠.”

나날이 양명(揚名)하던 묵월당에게 어느 날 비보가 날아든다.

“자식이 낙마 사고로 앉은뱅이가 되었답디다. 무(武)에 재능을 보이고 심심찮게 사냥을 나가던 치라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죠. 실의에 빠진 자식 놈이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 생활을 했다 하더이다.”

그 무렵은 묵월당에게도, 그의 재능을 사모하던 이들에게도 암흑기였다.

묵월당은 붓을 놓고 성심을 다해 자녀를 보살폈으나 무용했다. 묵월당의 재물은 그의 아이를 하루 열두 시진 내내 보필할 장정을 부리고, 남여든 가마든 대령해 어디라도 보내 줄 수 있었다.

하나 제 발로 걸을 수 없게 된 앉은뱅이는 방구석에 몸을 누이고 천장 들보의 나뭇결만 하릴없이 세었다.

“그렇다 한들 마냥 손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묵월당은 당대 가장 명망 높은 화공이었고, 높으신 나리들이 주문한 화도의 납기일을 미루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오래도록 붓을 놓았던 묵월당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동리 뒷산을 올랐다. 본격적으로 붓을 놀리기 전, 습작을 해 볼 셈이었다.

아들이 자주 오르던 뒷산에서, 묵월당은 산수화를 그렸다. 실로 간만에 그려 낸 도화는 화공의 맘에 차지 않았다. 묵월당은 자조하며 귀택했고, 늘 그랬듯 자녀의 거처로 들어섰다.

“아들은 화도를 보여 달라 했습니다. 묵월당은 조잡한 낙서가 썩 내키지 않았으나, 칩거한 아들이 드물게 청하니 마냥 기꺼웠지요.”

아버지가 화폭에 담은 뒷산을 찬찬히 살피던 아들은 눈물 흘렸다.

“여기 수풀에서 처음 토끼를 잡았고, 저 계곡에선 동리 벗과 멱을 감고··· 아들놈이 화폭에 담긴 추억을 풀며 오열했답디다.”

다음 날. 아들은 부친이 고용한 장정에 업혀 마당으로 나왔다. 반년 만의 외출이었다.

“그 후 묵월당은 동리 온갖 곳을 그려다 바쳤습니다. 더 나아가 이웃 고을, 먼 친지네 해안 마을까지. 산수화만 줄기차게 그려댔습죠.”

마침내 화공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게 된다.

“네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마. 하여 묵월당은 다환에 소문난 명소를 탐방하며 일대 경관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천지십경도(天地十景圖).

“이 열 점의 그림을 병풍으로 제작해 아들놈 방에 모셔 뒀더랍니다.”

“내력은 잘 알았네만, 지금 필요한 건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작이 아닐세. 얼마나 잘 그렸기에 세상을 담았다는지 모르겠으나, 원혼을 상대할 귀물로는···.”

“아뇨! 과장된 칭송이 아닙니다. 천지십경도에는 참으로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어찌나 급한지. 점주는 황제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언성을 높였다. 황제는 이것 봐라? 하듯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계속하라고 턱짓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점주는 차곡차곡 접힌 병풍의 한 폭을 열었다.

기암절벽이 까마득히 치솟은 산머리에 하얀 눈이, 그 아래 지면으론 연록빛 봄꽃이 펼쳐졌다. 막눈으로도 형용키 어려운 경외감이 느껴지는 화폭의 선경. 그곳으로 만물점주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물에 잠기듯, 화도 속으로 스윽 들어갔다. 열 손가락에 손목, 팔뚝까지. 그는 보란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농담으로 자아낸 수묵화. 그 안에서 먹으로 형태를 잡은 손마디가 화폭의 일부인 양 자유로이 노닐었다.

“어찌 이런 일이···!”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에 황제가 탄성을 터트렸다.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렸다.

“겨우 쓸 만한 걸 찾았군. 어떤가, 점주. 이 병풍에 원귀를 가둘 수 있겠나?”

“화도 속 세상에선 원귀들을 능히 담아낼 수 있습니다만, 이 병풍은 구마용이 아닙니다. 봉인할 수가 없어요. 애초에 원귀들이 순순히 병풍으로 들어갈는지···.”

콰앙! 우르르⎯

쉼 없이 결계를 두드리던 원혼들이 기어이 곳간채 귀퉁이를 부숴 버렸다. 무너진 벽 너머로 휑한 바람이 들이차고 마른 흙먼지가 두 사람을 덮쳤다. 황제는 팔등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외쳤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군. 따라오게!”

“사면초가 신세에 어딜 가시려고···!?”

투덜거리던 점주는 재차 멱살을 잡혔다. 번쩍 들어 올려진 점주와 달리 기우뚱 쓰러진 병풍이 바닥에 활짝 펴졌다. 황제가 손 놓는 즉시 병풍 속으로 내다 꽂힐 상황.

“서, 설마?”

허공에 뜬 발을 허둥대던 점주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황제는 한계에 다다른 듯 아슬아슬한 결계 너머로 원귀를 흘깃 곁눈질했다.

“순순히 오지 않겠다면, 유인이라도 해야지.”

“저, 저를 미끼 삼아 원귀를 병풍으로 끌어들일 심산입니까?!”

“너무 억울해하진 말게. 나도 함께할 테니.”

황제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점주는 황제의 팔목을 붙들며 다급히 매달렸다.

“무리, 무립니다! 원귀들이 순순히 따라온다는 보장이 어딨습니까?!”

“허면 자네에겐 호재로군. 원귀가 결계 밖으로 흩어질 때까지 병풍에 숨어 있으면 되잖은가.”

콰광- 챙그랑!

기어이 결계가 부서졌다. 황제가 손을 털자 점주는 허망하게 병풍 속으로 떨어졌다. 폭이 긴 화도 속, 봄꽃이 만발한 언덕으로 점주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황제 또한 병풍에 발을 내디뎠다. 부서진 결계 틈으로 원혼이 덮쳐들었으나, 이미 황제는 병풍 속으로 건너간 후였다. 원과 한으로 점철된 새카만 어둠이 그들을 따라 병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키이이이⎯ 크아아아악!

수천수만의 음색이 뒤틀린 귀곡성을 내지르며 거세게 몰아쳤다. 거대한 암흑이 병풍을 찢어발길 듯 사납게 회오리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원혼이 휩쓸고 지나간 곳간채에 끔찍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병풍 속, 기암절벽과 봄꽃이 어우러진 그림이 먹물을 쏟은 듯 까맣게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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