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담담하게 암시하는 죽음이 못내 안타까운 듯. 점주의 입매가 굳었다.
“저 길을 따라가시면 북동쪽에 가파른 지형이 있습니다. 절벽이라기엔 부족할지 모르오나, 매년 낙사하는 사람이 나온답디다.”
“좋군. 고맙네.”
돌아선 황제가 차츰 멀어졌다. 심경이 복잡해서일까, 점주는 작아지는 등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그의 시야를 공유한 아무개는 영 꺼림칙했다.
아무개는 알고 있었던 탓이다. 점주와 황제의 연은 예서 끝나지 않는다. 이럴 리 없는데. 뭔가, 무언가 더 있어야······
덜컹-
마당을 가로지르던 황제. 뒷모습을 응시하던 점주. 그의 안에 깃든 아무개까지. 모두가 소리의 근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덜컹, 덜컹. 덜그럭 덜컥-
수레에 실은 항아리가 요동쳤다. 점주의 눈동자가 항아리만큼이나 위태롭게 흔들렸다.
덜커덕, 덜컹! 덜컥- 덜컥. 덜그럭, 덜컹- 덜컹!
수레마저 덩달아 들썩이리만큼 진동이 커졌다. 심상찮은 기색에 황제가 검병을 쥐며 경계했다.
“아, 안 돼···.”
만물점주가 신음처럼 연거푸 되뇌었다. 안 돼, 아니 된다. 이럴 순 없어···!
덜컹! 덜커덕, 쿵- 쿵! 콰앙!
몸부림치는 항아리의 격렬한 동세에 수레가 삐걱, 휘청였다. 뻣뻣이 굳어 있던 점주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우지끈! 수레바퀴가 빠졌다. 빛바랜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항아리가 튕기듯 떨어져 나가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이. 아무개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물러서!”
와장창-!
신속히 접근한 황제가 점주를 막았다. 실성한 듯 항아리를 향해 달려드는 점주의 멱살을 잡아챈 황제가 내던지듯 밀어냈다.
깨진 항아리 틈새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 키이이익!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 캬아아아아!
검은 기운이 먹물처럼 번졌다. 짙은 기운에 잠식된 대지가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뿌옇게 죽었다.
흑암의 기세에 뒤덮인 묘목이 생기를 잃고 바짝 메말랐다. 고사한 묘목이 부스러져 가루처럼 흩어졌다.
저것에 닿는 순간, 필시 좋은 꼴은 못 보리라.
“뭣 하고 있어! 당장 일어나!”
황제는 깨진 항아리만 멀거니 응시하는 점주를 붙들었다. 줄 달린 꼭두각시인 양 잡고 흔드는 대로 휘청이는 그 몰골에 황제가 주먹을 쥐었다.
퍼억!
관자놀이에 묵직한 타격이 꽂혔다. 점주의 얼굴이 휙, 꺾였다.
“정신 차려!”
황제가 일갈했다.
“살고 싶으면 도망쳐! 어디 갈 만한 곳은 있나?”
“······도망?”
살고 싶으면··· 황제의 말을 곱씹듯 중언부언하던 점주가 머뭇머뭇 덧붙였다.
“뒷마당 덧문··· 곳간채.”
황제는 즉시 점주를 질질 끌고 내달렸다. 이를 눈치챈 듯 한창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이 몰려갔다.
저택을 돌아 뒷마당에 다다르자 줄지은 담벼락 새로 조그마한 덧문이 보였다. 한 사람이라는 짐을 끼고서도 황제는 순식간에 마당을 가로질러 덧문에 당도했다.
처마에 매달린 거미와 안뜰의 수목, 비죽비죽 제멋대로 자란 잡초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먼지로 화한 흑기(黑氣)가 두 사람을 뒤쫓았다.
작은 항아리에서 화수분 마냥 끊임없이 짓쳐 든 흑기가 고택의 기와지붕을 넘어 솟구쳤다. 문짝을 걷어차 부신 황제가 덧문을 넘어선 순간, 암흑이 하늘을 뒤덮고 해일처럼 쇄도했다.
“이런···!”
부서진 문짝을 딛고 선 황제가 거듭 속도를 높였다. 점주의 발이 흙바닥에 질질 끌리며 두 줄기 선을 그렸다.
쏟아진 흑기가 바위를 조우한 파도처럼, 담벼락에 부딪혀 가로막혔다. 하나 곧 부서진 덧문 새를 스멀스멀 비집고 나왔다. 땅에 그어진 두 줄의 선을 흑암이 집어삼켰다.
일촉즉발의 상황. 한창 달음박질치는 와중에 곳간채를 걸어 잠든 자물쇠가 보였다. 단단한 문은 일전의 덧문처럼 발로 차서 어찌해 볼 수준이 아니었다.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점주! 열쇠는 어디 있나?”
“···열쇠?”
“곳간채 열쇠 말일세!”
“아마··· 본채에 있을······.”
텄군.
본채는 검고 음산한 기운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이제 와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난관을 어찌 돌파하려나, 아무개는 무심히 관조했다.
“하는 수 없군. 배상은 자네 목숨값으로 갈음하세.”
“무슨···!?”
황제가 둘러멘 점주를 팽개쳤다. 투호처럼 내던지자 살이 올라 다소 둔중한 점주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황제는 보다 빨랐다. 지면이 움푹 패도록 발을 디딘 신형이 튕기듯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으아아아⎯!”
점주의 비명을 귓등으로 흘린 황제가 발검했다.
검신이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다. 굳게 닫힌 문이 사선으로 절단 나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 키아아아아악!
남녀노소 수천수만의 음색이 뒤섞인 귀곡성. 가위라도 눌린 듯, 점주의 몸이 절로 굳었다.
지척에 다다른 암흑이 한 줄기로 화해 사냥감을 뒤쫓았다. 황제는 곳간채로 뛰어드는 동시에 팔을 뻗어 추락하는 점주를 받아 냈다.
두 인영이 한데 얽혀 데굴데굴 굴렀다. 그들은 곳간채 내벽에 부딪히고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간발의 차로 두 사람을 놓친 어둠이 분한 듯 허공을 두드렸다. 쿵! 쿠궁! 공중을 내리치는데도 타격음이 울렸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이.
“······결계입니다.”
벽에 찧은 무릎을 감싸 쥔 점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위험한 것들 투성이라 결계부(結界符)를 붙여놨습니다. 악의를 가진 것들은 출입할 수 없도록.”
한숨 돌린 황제가 주위를 둘러봤다. 해묵은 먼지로 가득한 곳간채는 원목으로 짜인 장에 정체 모를 기물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것뿐이다.
“대체 저건 무언가?”
황제가 어둠을 모아 뭉쳐 놓은 듯한 흑기를 가리켜 물었다. 그러자 잠시 정신을 차린 듯하던 점주의 시야가 재차 흐리게 번졌다. 가히 넋 나간 몰골이다.
답답하다. 아무개였다면 점주의 손가락부터 하나씩 잘라가며 대답을 종용했을 테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차분한 기다림 끝에 점주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어지간한 소국의 왕도 부럽지 않은 대단한 부호가 있었습니다. 대대손손 만석꾼 집안에 상재(商才)를 타고난 사기꾼이라 재물 불리는 솜씨가 탁월했지요.”
멀쩡한 강물을 비싼 돈 주고 팔아넘기고, 닭을 봉이랍시고 속여넘기는 등.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동동 뜰 것 같은 사기꾼이었다.
“진귀한 기물을 수집하는 호화로운 취미를 지녔으나, 가장 귀한 보물은 어렵사리 본 늦둥이 아들이었습니다. 한데 어느 고명한 술사가 가로되, 아이가 길어도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할 거랍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려 내려 무던히 애썼습니다. 치마저고리를 입혀 여아로 분해 기르고, 아들과 같은 사주의 아이를 사들여 친자인 양 바꿔 키우는 등, 속임수도 서슴지 않았지요.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사라서. 늦둥이 아들은 실로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 버렸더랬죠.
“자식 잃은 슬픔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중. 남은 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소문을 하나 접하게 됩니다.”
죽은 이를 되살려내는 귀물, 유명경에 대한 것이었죠.
“타고난 사기꾼은 일생일대의 도박을 저질렀습니다. 저승 차사를 속여 유명경을 빼돌린 게지요.”
뒤늦게 속았음을 알게 된 저승 차사는 대로하여 벌을 내렸다.
“네가 이것저것 모으길 잘한다니, 저승에서 미처 거두지 못한 원혼도 모아 보라 했습죠. 기약 없는 노역형이었습니다. 차사는 사기꾼이 형을 마칠 때까지 저승 문턱에 발도 못 들이게끔 했거든요. ······먼저 간 식구들이 기다리는 저승 말입니다.”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사기꾼에게는 치도곤을 놓는 것보다 영리하고, 잔인한 형벌이었다.
“사기꾼은 죽지도 못하고 전국 방방곡곡의 원혼을 수집해야 했습니다. 차사에게 건네받은, 혼을 담는 항아리를 등에 지고서.”
점주의 긴 사설을 잠자고 듣던 황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혼을 담는 항아리라면, 설마?”
곧장 떠오르는 것이 있다. 조금 전, 깨져 버린 항아리.
“네, 그겁니다.”
점주가 실소를 흘렸다.
“한이 맺혀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혼. 그 혼을 모아 둔 항아리가 깨졌습니다.”
대부호이자 상재에 밝은 사기꾼이며,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사내가 만물점주라 불려 온 세월만 수 세기.
그가 수백 년에 걸쳐 수집한 원혼이 세상 밖에 풀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