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함수린은 귀걸이를 놓고 경대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귓불에 깨진 유리처럼 자글자글한 균열이 일었다.
도자역.
그 이명은 살천병(殺天病)이라.
하늘마저 죽인다는 참혹한 괴질이. 기어이 황제의 목전에 다다랐다.
“하나 패왕이 도자역에 걸렸다는 얘긴 듣지 못했소··· 입니다.”
무심코 중얼거리던 점주가 뒤늦게 어색한 존대를 붙였다. 그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그쪽이 참말로 황제··· 폐하십니까?”
“옥새라도 보여 줘야 믿겠나?”
“오, 옥, 옥새를 가져오셨습니까?”
“설마. 곧 죽을 몸이 옥새를 챙겨서야 쓰나.”
대신이라는 듯, 황제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날이 검집을 벗어나는 소리가 명명했다. 황제는 점주에게 검면이 보이도록 수직으로 곧게 세웠다.
“옥새는 아니지만, 이걸로 증명을 대신하지.”
검면에 수놓인 성좌문. 별자리에 이슬처럼 맺힌 햇살이 반짝였다. 점주가 탄식했다.
“사인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조하여 호명(虎鳴)의 기운을 담아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보검 중의 보검.
첫 출전에서 무사 귀환한 딸에게 부친인 함 장군이 선사한 명검. 저 검은 황제의 증명 그 자체였다.
“병증을 확인한 즉시 도성을 벗어났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수행원도 두지 않았어. 부러 험한 산길을 통해 어디 들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난 적도 없네.”
즉 황제가 예 있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렷다. 하루아침에 황제가 실종된 도성은 한바탕 뒤집혔을 테고.
함수린은 궁을 떠났다. 의원에게 증상을 보이거나, 치료법을 찾으라 명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인적 드문 산길로 홀연히 숨어들었다.
아무개라고 그 진의를 모를 리 없다.
“그날 자결하려 했네.”
황제는 죽을 셈이었다.
“처음엔 부정했지. 이 내가 도자역 따위에 걸렸을 리 없다고. 고집스레 귀걸이를 끼우려다 이리 귓불이 박살 나 버렸네.”
깨지고 부서진 귓불을 황제가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그 후엔 분노했네. 평생 전장을 전전하다 죽을 줄 알았지. 차라리 수급을 베이는 편이 나아. 감히 병마 따위가 나를 막으려 들다니. 용납할 수 없었네.”
사인검을 회수한 황제가 검병에 손을 얹었다. 일련의 행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무어, 어쩌겠나. 수용해야지. 이미 엎질러진 것을 부정하고 화내 봤자 무용할 따름이니. 허면 내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일은 무언가?”
함수린은 치명적인 괴질에 걸린 환자이기 전에 일국의 수장이자 대국의 황제였다.
“알다시피 도자역은 치료 불가하며 그 끝은 필멸이거늘. 확산세마저 어마무시하지. 도자역 환자가 수도 한복판, 국정의 중심인 궐에 나타났네. 심지어 일개 궁인도 아닌 황제일세.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되겠나?”
황제의 입매가 뒤틀렸다.
“난세의 재림일세.”
패왕 함수린이 이룩한 제국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나 다름없다. 이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끔 지탱해 주는 것은 함수린이라는 개인의 초인적인 위엄이라. 언젠가 아이가 홀로 설 날이 올 테지만, 아직은 패왕의 무용과 업적에 기대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함수린은,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불치의 병을 치료해 내라 명하는 대신 잠적했다.
“도성을 벗어나 깊은 산중에 어느 절벽에라도 몸 던질 셈이었네. 육신이 산산이 부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폐하께선 지금 살아서 제 앞에 계십니다만?”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거든.”
불치의 괴질에 걸렸다는 공포.
미치고도 남을 지경이나,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명운조차 극복해 낸 패왕이 아니던가. 그 분노조차 명예롭지 못한 최후에 개탄한 것인즉.
황제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의문했다.
“괴이하지 않나? 도자역은 돌림병일세. 어디서 옮아야 하는데, 구중궁궐에서도 가장 깊은 심처에 거하는 내게 대관절 어느 누가 괴질을 옮겼단 말인가? 설령 옮겼다 한들 징조가 있어야 했네. 어느 고을에서 창궐해 수도에 다다르고, 결국 궐에까지 이르는 경로 말일세.”
말(馬)보다 빠른 말(言)이라지 않나. 역병이 발발했는데 소문이 돌지 않을 리 없고, 궁에서 모를 리 없다.
“이 몸의 괴질은 징조가 없어. 느닷없이, 돌연히 발현했지. 이는 무얼 뜻하는가.”
섬뜩한 예감이 칼날처럼 덜미를 스치었다. 점주의 이마를 타고 흐른 더운 땀방울이 차게 식었다. 추위마저 느껴졌다.
“이 내가, 도자역의 발원일세.”
황제가 진단했다.
“가장 호화롭고 안락한 곳에서, 좋은 것만 먹고 입는 신체 건강한 황제에게, 도자역이 발원되었단 말일세. 이상하지 않나?”
이상했다. 너무, 너무 이상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 자식을 이역만리 떨어트려 놔도 기어코 옮는다던 주단 금씨처럼. 황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영문으로 도자역에 걸렸다.
“자연히 발생한 질병이라기엔 참으로 뜬금없지.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의지가, 무언가의 개입이 느껴져.”
근거 없는 지레짐작이라 여겨도 좋네.
“하나 크고 작은 전장을 전전하며 무수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항상 옳은 선택을 했고, 기어이 살아남은 몸일세. 내 감이 썩 나쁘지 않다는 것만 말해 두겠네.”
“폐하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정황상 미심쩍은 구석이 없진 않으니 말입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이리 긴 얘기를 꺼낸 까닭은 청이 있어서일세. 들어주겠나?”
“······소인은 폐하께서 명하시면 곧이곧대로 따라야 할 몸입니다만.”
“천자고 나발이고 곧 뒤질 작자가 명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점주가 자발적으로 행하길 원하네. 그러니 명이 아닌 청, 부탁일세.”
과격하다 못해 천박해진 황제의 어휘에 점주가 멈칫했다. 하나 돌이켜 보면 패왕은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왔다. 당연 입이 걸걸할 테지.
“나는 곧 죽어. 그건 별로 중요치 않고 개의치도 않아. 하나 도자역이란 희대의 불치병에 의도적 개입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네.”
황제가 굳은 낯으로 선언했다.
“이따위 걸 미래에 물려줄 순 없어.”
일순 점주의 숨통이 턱, 막혔다.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얼마나 걸릴 장담할 수도 없지. 내게 남은 시간은 촉박하거늘.”
“해서 절 찾으신 겁니까? 오래 살았고, 오래 살 테니까?”
“그렇지.”
골치 아픈 한숨을 내쉰 점주가 이내 투덜거렸다.
“그런 일은 유랑술사가 제격이지 않습니까? 전국 방방곡곡을 싸돌아다니며 봉사하고 선행을 베푸는 훌륭한 인격자가 버젓이 있는데. 어찌하여 저 같은 장사치를 찾으셨나이까.”
떠넘기려는 수작이 빤했다. 아무개는 점주 안에 갇힌 제 신세가 아쉬웠다.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자유로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당장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을 것을.
“자네 말속에 답이 있지. 그자는 전국을 떠돌아다녀 만나기 어렵잖은가.”
“저도 잘만 돌아다니는뎁쇼? 백날에 아흔아홉 일은 집을 비웁니다만.”
“비울 집이라도 있는 게 어딘가. 유랑술사는 소재도 뚜렷지 않아.”
“소인은 장사치라 손해 보긴 죽어도 싫습니다. 면전에서는 승낙하는 척해 놓고 황천 가실 날만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명이 아니라 부탁을 했으니. 자네가 들어주기 싫다면, 그뿐일세.”
황제가 덤덤히 수긍하자 오히려 점주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곧 죽으신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네.”
“병이 옮을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은 더 안 만날 작정이시고요?”
“물론. 이 몸과 말 섞는 이는 자네가 마지막일 걸세.”
“허면, 제게 하신 말씀이 사실상 유언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흠?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군.”
“······돌겠네, 증말.”
점주가 혼잣말처럼 짓씹듯 중얼거렸다.
한낱 필부일지언정, 유언이라 함은 발화의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거늘. 하물며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분의 유언이다.
권위와 권력으로 명령을 강요했다면, 차라리 뻔뻔하게 응수했을는지 모른다. 한데 이렇듯 순순하니 외려 점주가 당혹했다.
심지어 일신의 영달을 위함도 아니잖은가. 한 시대를 풍미한 지배자가 후세를 위해 건넨 부탁이란, 가볍게 쳐 낼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후우··· 그래. 까짓것, 어디 한번 해 보죠.”
한숨을 푹푹 쉰 점주가 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축 처진 눈매의 사내가 손바닥만 한 면경에 맺혔다.
점주는 거울에 비친 얼굴 위로 기하학적인 도형과 꼬불거리는 외국의 언어를 써넣었다. 거울 표면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곧이어 낯선 인영이 마주 봐 왔다.
“도자역에 대해 알아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뭐든 찾는 대로 연락해.”
인사도 없이 대뜸 용건을 꺼냈으나, 거울 속 상대는 익숙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염이 듬성듬성한 턱을 매만지며 점주가 덧붙였다.
“보자, 보자. 내 기억이 맞다면, 도자역이 세간에 막 알려진 무렵이 연나라 말이렷다. 대지진 이후 수도서부터 도자역이 창궐한 바람에 손쓸 겨를도 없이 폭삭 망했더랬지. 연나라 도읍지를 수색하는 것도 방법일 게다.”
⎯ 지난번에 명하신 것과 도자역 중 어느 쪽을 우선할까요?
“도자역으로.”
⎯ 네. 그리하겠습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면경이 거듭 출렁이며 도로 점주의 얼굴이 비쳤다. 황제가 신기한 듯 주시했다.
“무엇 하는 물건이기에 소리가 나고 말을 섞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자와 연락할 수 있는 거울입니다. 저어 1)비해대호 너머 난쟁이 장인이 만든 신묘한 귀물이지요. 머시기 미러? 라던가. 외국 말이 어려워서 저는 연경(連鏡)이라 부릅니다.”
“호오. 북방에도 연줄이 있는가?”
“오래 살았으니까요. 다 지나간 시절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이북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혹한이잖습니까. 연락 끊긴 지 어언 이백 년도 더 됐습니다······ 비매품입니다.”
“아쉽게 됐군. 지방 관청에 두루 배치하면 유용하게 쓰일 법한데.”
황제가 미련 넘치는 눈을 하자 점주는 서둘러 연경을 갈무리했다. 옷깃 새로 연경을 집어넣는 손놀림이 상당히 다급했다.
“허면 난 이만 가 보겠네.”
“벌써 가십니까?”
“자네 명줄이 아무리 길다 하나, 역병 환자를 오래 봐서 좋을 게 무어 있겠나. 용건을 마쳤으니 가 봐야지.”
“가실 곳은 있습니까?”
“황천이나 가야지. 인근에 험준한 절벽 있으면 소개나 좀 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