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04)화 (104/138)

104화

六. 몽혼夢魂: 꿈속의 넋

***

지게 끈이 어깨를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나무 작대를 지팡이 삼아 기대다시피 한 아무개가 거친 호흡을 토해 내며 산길을 올랐다. 정확히는, 산길을 걷는 누군가의 의식에 깃들었다.

“헉, 허억···.”

피로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발걸음이 힘겨웠다. 고난에 겨운 산행의 종착지는, 깊은 산중의 오래 묵은 저택이었다.

[만물점萬物店]

낡은 현판 아래 대문에 중년의 여인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무개는 확신했다. 베갯잇이 제 소임을 해냈다고.

이것은 과거의 실존. 아무개는 꿈을 통해 바라던 이와 재회했다. 지금쯤 술사도 같은 광경을 보고 있을 테지.

“운이 좋았군.”

명상하듯 가부좌를 튼 여인이 운을 뗐다.

“백날에 아흔아홉 일은 집을 비운다는 주인장을 고작 사흘 기다려 만났으니.”

복면으로 하관을 가린 그녀가 새까만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렇지 않나? 만물점주.”

주인 없는 가게 앞을 점령한 인영의 물음에 아무개, 아니 만물점주가 중얼거렸다.

“······염병할.”

세간에 소위 사대귀인이라 손꼽히는 위인이 있다.

만물점주, 수호지신, 영화단주, 유랑술사.

개중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닌 만물점주렷다. 셈하는 게 난해하리만치 긴긴 세월. 다환 전역의 갖은 보화를 모아들인 수집가.

만물점의 주인.

“끄응차-”

만물점주는 지게에 싣고 온 항아리를 들어 올렸다. 대체 뭘 넣어야 이리 무거운 겐지. 팔이 끊어지고 어깨가 탈골될 지경이다.

용쓰며 오만상을 찌푸린 점주가 간신히 항아리를 수레로 옮겼다. 항아리가 아닌, 항아리를 동여맨 붉은 포승줄을 쥐다 보니 손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털썩 주저앉은 그에게서 절로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고, 죽겄다.”

배추 열 포기는 너끈히 들어갈 법한 항아리는 노란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옹기의 질박한 흑갈색은 뵈지도 않았다. 시뻘건 포승줄이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고작 항아리 하나 옮기고서 한참을 헉헉대자니 여인이 다가왔다.

“점주. 도와드릴까?”

“내 아무리 막돼먹었어도 생면부지에 대뜸 일을 시킬 정도로 글러 먹진 않았수다.”

“주인장 일이 끝나야 내 용무도 볼 수 있으니 하는 말일세. 항아리 드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하이구, 됐수다! 저게 얼마나 무거운 줄 알고? 내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다가 낑낑대는 거 못 봤소?”

“봤지. 엄살이 가히 수준급이더군.”

어깨 빠질 뻔했던 점주는 엄살 운운에 발끈했다. 뒷골이 당기고 열이 뻗치는 것이 아무개에게도 생생히 느껴졌으나, 점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낼 기력도 없다는 듯이.

“체면 차리느라 사양할 것 없네, 점주. 도와 달라고 부러 힘든 척한 게 아닌가?”

그래도 두 번은 참기 힘든 모양이다. 결국 만물점주가 언성을 높였다.

“내 언제 엄살 부리고 힘든 척했다는 게요!”

“주인장이 항아리를 수레에 내려놓을 적에 소리가 거의 안 나던걸?”

무거운 짐을 내릴수록 그만큼 묵직한 소리가 나기 마련. 한데 점주의 항아리는 토옥, 가볍게 부딪힐 뿐이었다.

“항아리에서 부딪히거나 찰랑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안에 뭔가 들어 있기는 한가? 텅 빈 듯싶은데.”

“헛, 참. 귀도 밝으시네.”

만물점주는 퉁명스레 대꾸했으나, 아무개는 그의 긴장을 여실히 느꼈다.

항아리를 옮기는 도중 생기는 미세한 소음. 무심코 넘길 법한 사소한 차이를 예리하게 짚어 내는 면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허면, 어디 한번 댁이 들어 보시오. 팔 빠져도 내 책임은 아니올시다.”

불퉁하나마 점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인은 보무당당히 수레 앞에 섰다. 그러고는 보란 듯 항아리를 들어······

“······?”

올리지 못했다.

당혹한 여인이 잔뜩 힘을 주어 항아리를 들고자 했다. 하나 그새 뿌리라도 내린 겐지 꿈쩍도 않았다.

“이 무슨, 당치도 않은···.”

“내 뭐라 했소. 못 들 거라 했지?”

점주가 껄껄 웃으며 통박을 줬다. 반개한 눈으로 항아리를 지그시 살피던 여인이 손등으로 톡톡 두드렸다. 텅- 텅- 빈 소리만 울렸다.

“분명 이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데, 어지간한 바윗덩어리보다 무겁군. 이 또한 만물점주의 신비한 수집품인가?”

만물점주. 다환의 보배를 모으는 자.

평범한 수집가가 사대귀인이라 불릴 턱이 있나. 그의 수집품은 하나같이 특별했다.

“반절은 맞췄수다. 그 항아리에 ‘물건’은 들어 있지 않소.”

“물건은? 허면 물건 아닌 다른 것이 들었단 말인가?”

“무어, 거기까진 댁이 알 필요 없고.”

흣차, 일어난 점주가 항아리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이 항아리를 들려거든 요령이 필요하오. 새삼 구차한 사정을 입에 담고 싶진 않으니 잠시 미뤄 두고, 댁의 용건부터 들어 봅시다.”

만물점주가 판을 깔아 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여인이 두 걸음 물러섰다.

“오지 말게. 내게 가까이 와서 좋을 것 하나 없네.”

“또 뭔 이상한 소릴··· 아, 됐수다. 난 물부터 좀 마셔야겠소.”

산길을 오르느라 목이 바짝 말랐더랬다. 저택에 들어간 점주는 벌컥벌컥 목을 축이고 새 잔을 챙겨 나왔다. 간만의 손님에게 한 잔 권했으나 여인은 사양했다. 쩝, 입맛을 다신 점주가 물잔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예까지 어쩐 일로 오셨소? 혹 찾는 물건이라도 있소?”

“물건은 됐네. 난 자네를 만나러 왔어.”

잠시간 숙고한 여인이 나직이 입 열었다.

“듣자 하니 사람 중에는 주인장이 가장 오래 살았다더군. 사대귀인이라며 함께 거론되는 수호지신, 화광대인, 유랑술사조차 주인장에 비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라지.”

“무어, 이 몸이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수다.”

“주인장은 도자역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도자역.

아무개의 꿈이 드디어 시작점에 섰다.

“육체가 도자기처럼 변하는 병이 아니오? 몸이 굳으니 병세가 깊어질수록 거동이 힘겨워지고,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엔 멍들고 피나는 대신 깨지고 부서져 버리지. 아무리 조심한다손 쳐도 자칫 잘못 넘어졌다간 전신이 박살 나 버리는 무시무시한 병마요.”

점주는 남들이 아는 만큼, 딱 알려진 사실을 주워섬겼다.

“도자역에 걸리고 회복했다는 소식은 여태 들어 본 적 없소. 백이면 백 죽어 나가지. 의원은 물론, 수발드는 가족에 이웃까지 죄 옮는 끔찍한 돌림병이올시다. 답이 없어, 답이.”

점주가 낯을 굳혔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이.

“흔히들 돌림병이 퍼진 마을엔 불을 놓는다지만, 도자역은 소용없소. 이것들은 타 죽지도 않아.”

도자역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을꼬···

“···참으로 가마에 넣고 굽는 것 같았더랬지.”

화마에 휩싸인 마을. 검게 타들어 가는 초가집.

그곳에서 삐걱삐걱 기어 나오는, 도자역 환자들.

“마땅한 치료법도 없고, 옮기는 더럽게 잘 옮으니. 어쩔 수 있나? 처분해야지. 멀리서 창, 봉으로 찌르거나 돌팔매로 박살 내서 처리하더이다.”

“잘 아는군. 도자역의 다른 별칭도 혹 아는가?”

“천자도 피해 갈 수 없다 하여 살천병(殺天病)이라고도 하지. 무어, 대놓고 그리 말하는 치는 없다만······ 한데 이런 건 왜 묻는 거요?”

주절주절 잘만 늘어놓던 점주가 뒤늦게 진의를 캐물었다. 여인이 하관을 싸맨 복면을 풀었다.

“놀라지 말게, 주인장.“

스르륵. 흘러내린 천 너머로 드러난 얼굴.

“내가··· 아니, 짐이 바로 천자일세.”

툭, 데구르르⎯

점주의 손에서 떨어진 잔이 미끄러져 굴러갔다. 구르는 잔을 발끝으로 막아 세운 여인, 황제가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쓸어 넘겼다.

산발한 머리를 넘기고 훤히 드러난 귓불. 그 살갗에 금이 가 있었다.

이백여 년간 도탄에 빠진 난세를 종결한 패왕. 함수린.

세간에선 패왕이라 우러렀으나, 실지로는 장성이었다. 적수인 지방 군벌들이 칭왕이니 칭제니 하며 설레발 치는 동안 그보다 더한 영토와 군세를 지니고도 그러했다. 보좌에 오른 것은 근래의 일로, 주위에서 하도 말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즉위식을 치렀다.

그날 밤. 함수린은 본가에서 받은 함을 꺼내었다. 옥으로 만든 귀걸이 한 쌍이 들어 있었다.

패왕의 전신은 크고 작은 흉터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번거롭다며 머리칼도 짧게 쳐 낸 지 오래였다. 분 냄새는커녕 향낭조차 지니지 않은 이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다니.

고도의 모욕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한 이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 준 선물이었다.

사실 함수린은 작고 어여쁜 것을 아꼈다.

어울리지 않아서. 금세 망가져 버리니까. 여러 이유로 티 내지 않았으나, 가족은 가족인 모양이다. 병영에서 종일 구른 측근조차 모르는 내심을 친지가 알아차리다니.

황제는 궁인을 물리고 경대 앞에 앉았다. 어릴 적 귀를 뚫긴 했으나 오랫동안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새 막혔을지도 모르지.

함수린은 옥색 귀걸이를 귀밑에 가져다 대 보았다. 즉위식이랍시고 때 빼고 광낸 덕일까? 흙먼지투성이인 여느 때와 달리 경대에 비친 모양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겸연쩍어하며 귓불에 침을 쑤셔 넣던 찰나.

콰직.

말랑한 귓불에서. 결코 나서는 안 되는 파열음이 섬뜩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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