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머리 위로 벼락이 치는 듯했다. 공황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는 아무개의 모양새에 아차 싶었던가. 술사가 넌지시 덧붙였다.
“으음, 지금이라도 모른 척할까요? 방금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고···.”
당혹감도 옮는 걸까. 답지 않게 경황하여 황망한 소릴 주워섬기던 술사가 말끝을 흐렸다. 이내 억울하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개 님, 딱히 숨기기도 않았잖아요?”
아무개는 제 행실을 돌이켜 보았다. 그랬나? 내가 그리도 티를 냈던가?
첫 만남부터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바현은 술사가 자신을 편애한다 했으나, 기실 아무개야말로 전대미문 비교 불가한 극도의 편애를 했다.
흉신의 세상은 술사와 술사가 아닌 것으로 구분됐다.
아무개가 술사에게 품은 감정은 신앙과 흡사했다. 그가 비판한, 한낱 인간을 숭배하는 머저리가 바로 자신이다.
하나 이번 고백은 사뭇 결이 달랐다. 아무개는 치부를 드러내는 심정으로 거듭 토로했다.
“내가 말한 좋아해는······ 손잡고, 포옹하고··· 입, 맞추는··· 그런 좋아해, 야···.”
울적한 목소리로 어렵사리 호소하자 술사의 낯이 설핏 경직됐다.
그는 아무개의 좋아, 를 단순한 친애의 표현으로 여긴 모양이다. 이제는 깨달았겠지. 연모의 감정임을.
아무개는 후회하면서도 후회 않는 모순에 빠졌다. 차라리 술사가 오해하게끔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저라고 필히 마음을 전하리라 작정한 건 아녔으니. 순간의 충동으로 저질렀을 뿐.
하나 막상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대판 엎지르고 나니 이 길이 옳다 여겨졌다.
자신은 이미 속 시꺼먼 음심을 품었잖은가. 멋모르는 그가 자꾸 응석을 받아 줬다간, 자칫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 술사가 스스로 거리를 두게끔 미리 경고해야 했다.
아무개는 술사에게 미움받는 게 죽음보다 두려웠다. 하나 보다 끔찍한 건, 혹여 자신이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술사에게 티끌만 한 상처라도 줄 바에는, 세상 사람 다 죽이고 그에게 미움받는 편이 났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의 굳은 얼굴에 우울해지는 기분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잠시만요.”
술사가 삿갓을 깊숙이 내리눌러 표정을 숨겼다. 수차례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런··· 감정의 대상이 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해서요.”
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개는 다가올 거절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때 돌연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창가의 휘장이 거칠게 나부꼈다.
흔들리는 휘장 사이로 백지 부적이 가파르게 날아들었다. 술사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가락 새로 부적을 낚아챘다. 아무개는 그것을 단박에 알아봤다.
소환부.
깊게 눌러 쓴 삿갓 아래. 소환부에 적힌 글귀를 빠르게 훑는다. 부적이 술사의 손아귀에 잡혀 구겨졌다.
“미안해요. 지금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해야겠어요.”
“···급한··· 일이야?”
소환부에 무어라 적혀 있기에. 항시 여유롭던 그가 이리 노골적으로 서두른단 말인가.
“후배님들이 연락 주셨어요. 주단 금씨 종주께서 도자역에 걸렸다네요.”
술사는 소환부에 적힌 장소로 단숨에 축지했다. 아무개도 그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나섰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소영의 인사에 술사가 답하는 동안 아무개는 금비설을 눈여겨보았다. 표독스럽던 지난번과 달리 멍하니 넋 놓은 꼴이 적잖이 충격인 듯싶었다.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소영과 재효는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소상히 고했다.
주단 금씨 종가에 건설된 미로. 그곳으로 들어간 부인. 깨진 그릇마냥 전신에 금이 간 종주.
금비설은 어머니와 독대했다.
「주단 금씨의 종주는 대대로 도자역 환우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선대 종주가 사망하면, 즉시 후대에게 옮는다더군요.」
과거 이 역질을 타파해 보고자 선대를 다환 북부로, 후대를 남부 해안 외딴섬에 보내어 평생 만나 볼 수 없도록 떨어트리기도 했었더랬다.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 선대가 고인이 되자마자 후대에게 도자역이 발발했다.
“이상하네요.”
술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사실이라면, 질병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지 않나요?”
역병에 전염되려면 어떤 경로든 환자와 접촉해야 한다.
한데 부인이 임신하자마자 남편과 격리하고, 평생 만나 볼 수 없도록 부모 자식을 이역만리 떨어트려 놓아도 병이 옮는다?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뭐어, 일반적인 역병의 특성도 있긴 해요. 종주님 곁에 시종을 두지 않고 허수아비를 쓰는 것도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함이라네요.”
재효의 언설을 흘려들으며 아무개는 남아로 분한 거지 소녀를 떠올렸다.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어두운 미로 속으로 끌려간, 되바라지고 영악하면서도 어딘가 미련한 구석이 있던.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아무개는 주단 금씨가 거지를 끌어모아 실험한 까닭을 알게 됐다. 종주가 도자역에 걸려서 그랬구나.
“부인께서 종주님 지척에 있었다고요? 부인은 괜찮으신가요?”
“어··· 괜찮을 거야, 아마.”
걱정 어린 술사의 물음에 답한 것은 아무개였다.
“돕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네가 그걸 어찌 알아?!”
한데 재효가 펄쩍 뛰며 법석을 떨었다. 소영도 놀란 얼굴로 떨떠름하게 부연했다.
“주단 금씨에서 세대를 거듭해 조사한 결과, 도자역이 옮는 조건을 알아냈습니다. 이 조건만 지키면 전염되지 않는다 합니다.”
현시대의 다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역병. 병원(病原)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역질.
상한 곳 없이 건강히 잘 지내던 이가 어느 날 돌연 걸리는가 하면, 단 한 명으로 고을이 통째 휩쓸리기도 하고, 한 지붕 아래 수십 해를 살아온 부부가 옮지 않기도 했다. 어인 연유로 발발하고 어떠한 경로로 퍼져 나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변덕스러운 괴질.
유일한 해법은 환자를 격리하는 것뿐. 사실상 치료는 포기하고 전염되지 않도록 막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그 도자역이······
“···옮는 조건은, 도움이랍니다.”
「도자역 환자를 도와주면, 병이 옮습니다. 반면 환자를 무시하고 괴롭히면, 얼마나 오래 붙어 지내든 전염되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악몽을 곱씹어 보았다.
산처럼 쌓인 도자역 시신 틈바구니에서 깨어난 거지 꼬마는 피를 흘렸다. 한데 미로를 탈출하기 직전, 먼저 끌려온 아이를 구해주려 한 후 도자역에 걸렸다.
백정 소년은 또 어떠했던가. 마을 사람 모두 도자역에 걸렸음에도 녀석 홀로 멀쩡했다. 백정이 마을 주민들을 도왔을 리 만무하다. 녀석은 이미 죽은 사체를 훼손할 만큼 증오에 사무쳤으니.
환자를 도우면 옮는 역병이라니. 상식적으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으나, 아무개의 꿈과 옛일을 돌이켜볼 때. 저들의 진술은 제법 일리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다. 도자역이 정말 질병이긴 한 건지, 술사의 말마따나 누군가 악의적으로 만들어 낸 저주가 아닌지. 아무개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종주님께서 돌아가시면, 다음은 금비설 차례예요.”
염재효가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아무리 종주님께서 요양하느라 자리를 비우셨다지만, 직계 자손인 금비설 대우가 너무 형편없었다고요.”
금비설은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내도 인정받지 못했다. 줄곧 한직만 맴돌고, 남들 앞에 내보이기 어려운 구린 일만 떠맡았다. 가문 내에 어느 누구도 어울려 주지 않았던 탓에 어릴 적에는 외부인인 소영과 재효와 놀았더랬다.
“왜 그따위로 구는가 했더니.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금비설에게 정을 줘선 안 된다. 요직을 맡길 필요도 없다.
어차피 도자역에 걸려 죽을 테니.
“본래 문중 어른들께선 금비설에게 무엇도 허가하지 않으셨답니다. 평생 집안에 가둬 놓고, 때가 되면 미로에 집어넣을 계획이었습니다.”
“멋모르는 백치로 고분고분 키우려던 걸 현 종주님이 반대하셨대요. 지금 금비설이 이렇게 바깥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분이 담판 지어서··· 본인이 최대한 버텨 보겠다고······.”
도중에 울컥한 재효는 눈시울을 발갛게 물들이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전대가 사망하는 즉시 후대에게 전염된다. 이를 역으로 보면, 전대가 오래 버틸수록 후대가 자유롭게 살날이 길어진다.
“심각한 중에 죄송하지만··· 도자역은 역병 아니었던가요? 언제부터 주단 금씨의 유전병이 됐죠?”
술사의 의문은 아무개도 내심 품어 온 것이었다. 종주의 자손이 걸리는 병이라면, 혈맥에 전해 내려오는 유전병에 가깝지 않은가? 한데 주단 금씨 외에 도자역이 유전된다는 소린 듣도 보도 못했다.
아, 어쩌면. 다 죽어서 후손을 남기지 못한 걸지도.
주단 금씨 정도의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도자역 환자가 후손을 남길 때까지 생존할 수 있으려나.
“거기까진 부인께서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유전병이라기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요.”
소영과 재효가 번갈아 첨언했다.
“참말로 유전 문제라면, 다른 일가친척 중에도 병자가 나와야지 않겠어요? 한데 꼭 종주님에 장손만, 심지어 대가 끊기면 계승 순위가 높은 순으로 병든대요. 이를테면 종주님 아우라던가?”
“그 때문에 주단 금씨에서 반드시 종주가 후손을 잇도록 한답니다. 도자역이 이어질 다음 대상을 분명히 해야 대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대비라. 결국 종주의 직계 후손을 희생양 삼아 다른 구성원의 안위를 도모하는 것뿐인데. 말은 번지르르하다.
율해서 덕에 화양 율씨가 개판인 건 진즉 알았다만. 금씨도 만만찮게 미쳐 돌아가는 집안이었다.
“도자역이 발발한 기점은 연나라 말기의 도성이었어요.”
술사가 턱을 매만지며 회고했다.
“당시 황제께서 도자역으로 승하하실 즈음, 주단 금씨도 종주님이 지병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셨죠. 이후 주단에선 대대로 종주의 권한이 약화되었는데··· 그 지병이 도자역이라면, 시기상 맞아떨어지네요.”
옆에서 무어라 떠들건 멀거니 넋을 놓은 금비설을 흘깃한 술사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사정은 딱하나, 당장은 뚜렷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네요. 두창처럼 역신이 몰고 오는 질병도 아닌지라.”
없는 역신을 만들어서 퇴치할 수도 없으니 원.
“도자역이 유전인지 역병인지조차 불분명하니. 우선 실체부터 밝혀야 그에 따른 대처도 모색할 것을···.”
술사가 근심하니 아무개도 덩달아 시름에 잠겼다.
문외한인 아무개조차 도자역이란 놈이 다른 역병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것을 알았다. 이를 저지하려거든 술사의 말마따나 실체부터 밝혀야 할 텐데······
“······?”
실체를 아는 사람. 있지 않나?
“···술사님.”
소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부르자 술사가 아무개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만물점주가 알아. ···도자역 실체.”
그에 소영과 재효가 즉각 반응했다.
“진짜? 참말로?!”
“당장 만물점을 찾아가겠습니다.”
간신히 발견한 실마리에 법석을 떠는 그들을 말끔히 무시한 아무개가 술사만 눈에 담고서 덧붙였다.
“근데··· 죽었어. 만물점주.”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어도 이보다는 나으리라. 한껏 흥분했던 재효는 김이 팍 샜다.
“뭐야. 그럼 아무 소용 없··· 댁은 만물점주가 죽었는지 어찌 알아?!”
도중에 깨달은 재효가 비명처럼 외쳤다. 아무개는 이 또한 무시했다.
“만물점주가··· 죽기 전에, 도자역을 조사했어. ······언뜻 들었던 것 같아.”
그때 관심을 기울이고 좀 더 집중했더라면. 지금 당장 술사님께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을.
아무개는 무심했던 과거를 후회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당시의 흉신은 작금에 비할 바 없이 불안정했으니.
생명이 깃든 모든 것이 역겹고 거슬려서. 가만히 내버려 두기조차 버거웠던 시절이다. 그밖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라곤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치만, 그··· 방법이 없지는 않아··· 아마.”
“만물점주께선 돌아가셨다 하지 않았나요?”
“어어··· 맞아, 죽었지. 그치만······ 꿈장수가 준 베개를 쓰면, 알 수 있을지도···?”
“베개에 어인 효능이 있기에···.”
무심코 되묻던 술사가 돌연 멈칫했다.
“꿈을 남에게 알리면 효과가 사라진다 했었죠. 이런 얘기도 하면 안 되려나요?”
“어··· 글쎄?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 그들은 꿈장수의 베개가 지닌 영험함을 거론 않고 묻어 두기로 했다.
아무개는 그래도, 하고 덧붙였다.
“술사님도··· 가능할걸···?”
“제가요?”
“으응··· 죽기 직전의 만물점주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베개를 베고 자면······.”
꿈에서 볼 수 있다.
수백 년 전 영면에 든 수호지신의 일생도 꿈으로 겪었잖은가. 죽은 지 일 년도 채 안 된 만물점주라면 능히 되고도 남음 직했다.
“좋아요. 그럼 돌아가서 함께 오수를 즐겨 볼까요.”
어어?
“같, 이··· 자게?”
“네에. 아무개 님 베개 하나잖아요? 찰싹 달라붙어서 꼭 끌어안고 오손도손 자야죠.”
자장자장 잘 자라고 토닥토닥해드릴게요, 웃음기를 머금고 농담조로 지껄이던 술사였으나. 아무개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자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멈칫 굳었다.
연심을 고백한 이에게 꼭 끌어안고 오손도손 자자니. 무심코 버릇처럼 흘리던 말마디가 전과 다른 의미를 지녔음을 뒤늦게 자각한 게다.
도자역이라는, 이 땅을 공포로 몰아넣은 희대의 역질 탓에 개인적 중대사를 망각해 버렸다.
좀 전까지 멀쩡하던 술사와 아무개가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듯 묘하게 삐걱거렸다. 영문을 모르는 후배들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