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아무개 님.”
다정한 음색에 고개를 들자 입안으로 불쑥 무언가 들어왔다. 무심코 잇새로 물자 진득하고 달큼한 맛이 퍼졌다.
“오늘따라 멍하시네요.”
아무개에게 손수 연분홍빛 다식을 먹여 준 유랑술사가 생긋 웃었다. 그는 별 뜻 없이 한 말일 텐데. 지레 찔린 아무개는 괜히 움찔하며 다식만 우물거렸다.
공방은 평화로웠다. 술사는 얼마 남지 않은 주문서를 마무리했고 아무개는 늘 그렇듯 곁에서 지켜봤다. 술사가 붓을 들었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다식을 꿀꺽 삼킨 아무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떠나?”
“그렇겠죠? 남아서 더 할 일도 없으니까요.”
지루할 정도로 평온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꿈에 관해 털어놓으려면 지금이 적기다.
어제까지만 해도 꿈장수가 사기를 친 건지 만 건지 헷갈렸으나, 오늘 확실해졌다.
이건 명백한 사기다. 수호지신이 목숨 바쳐 긴긴 절벽을 만들어 낸 과정을 원치 않게 알게 됐잖은가. 이런 건 아무개가 원하는 꿈이 아녔다.
꿈장수는 사기를 쳐도 하고많은 꿈 중에 왜 하필이면 수호지신의 것을 가져왔을까, 의아함은 둘째 치고라도. 술사에게 어찌 털어놓을지가 고민됐다.
일단은 가볍게 운이나 띄워 볼까.
“······술사님.”
“네에.”
“수호지신··· 알아?”
서탁에서 눈을 뗀 술사가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아무개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알죠. 연나라 말기의 술사잖아요.”
“······? 신이 아니라?”
“네?”
서로 멀뚱히 보던 중. 술사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신이라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말을 잘못한 것 같다.
그치만 수호지신을 신으로 받드는 지방이 어디 한둘이던가? 아무개는 저가 터무니없이 괴이쩍은 소릴 하진 않았다 여겼다. 꿈속에서 홍의백면의 인생사를 대강이나마 훑으니 ‘이쯤 되면 신으로 모실 법하다’ 싶기도 했고.
율해서의 사상 및 행보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지형을 바꿔 버렸잖은가. 그만한 권능이면 어지간한 대신령도 뒷걸음질 칠 텐데.
“아무개 님.”
탁. 붓 놓는 소리에 아무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개를 향해 몸을 튼 술사가 웃음기를 걷어 내고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아무개는 바짝 얼어붙어 고개만 끄덕였다.
차라리 형틀에 앉아 고문당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긴장으로 어깨를 단단히 굳힌 아무개가 이어질 질문을 기다렸다.
“혹시 칠교 남매분들께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어?
“무슨··· 얘기?”
“궁금하지도 않은 교리를 알려 준다든가, 수호지신 일대기를 줄줄 읊는다든가, 그 외 여러 포교 활동이요.”
교리? 일대기? 포교?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술사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남매분들 모두 독실한 신자거든요. 혹 신앙을 강요당한 걸까 해서요.”
그러니까, 칠교 남매가 수호지신 광신도라는 거지?
놀랍지도 않았다. 방문객 하나 없는 망한 사원을 수호령이랍시고 여즉 지키고 있는데. 능히 짐작할 법했다.
오히려 술사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술사님은··· 수호지신, 안 믿나 봐···?”
“한낱 인간을 신격화하고 숭배해 봤자 결국 파국이죠.”
수호지신이 아닌 유랑술사를 다소 신격화하는 아무개가 뜨끔하며 시무룩하니 웅얼거렸다.
“평범한 사람··· 아니라고 생각해서, 신앙하는 거잖아···?”
“글쎄요.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인지라. ······요즘 인식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그때 상황을 직접 겪어서 그런지 썩 와닿지 않아요.”
술사가 부연했다. 당시 태자 전하께서 수호지신 전도에 힘깨나 쓰셨다고.
소상(塑像), 화상(畫像), 석상(石像) 가릴 것 없이 찍어 내고 호족 및 귀족들 별채를 강탈하다시피 해 사원으로 꾸몄더랬다. 황실에서 앞장서 거국적으로 포교하니 단기간에 급속도로 흥했다.
“전후 복구 작업으로 국력을 총동원하던 와중에 딴짓할 정신머리가 있다니. 지방 유지들 힘 빼놓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어떤 의미로든 놀랍죠.”
사근사근한 어조로 신랄한 평가였다. 술사는 북방의 침략을 막고 국토를 수복한 태자가 진두지휘하여 수호지신을 선전한 것을 좋게 보지 않는 듯싶었다.
“태자는··· 미안해서 그런 게 아닐까···?”
괜히 제 발 저린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태자를 변호해 보았다.
율해서는 다환 술사들이 뒷짐 지고 모른 체할 적에 홀로 국면의 전환을 이끌어 냈잖은가. 그런 구국의 영웅을, 최후의 결전이랍시고 부추겨 죽음에 이르게끔 유도했다. 태자도 당연 부채감을 느꼈겠지.
하나 꿈을 통해 과거를 엿본 아무개와 달리 술사는 진상을 모를 터. 다시 작업에 몰두한 술사가 별스럽지 않게 흘리듯 되물었다.
“태자가 왜 미안해요?”
“그··· 막판에, 북쪽 국경에 절벽······ 만들어 줬잖아.”
막상 태자도 그렇게나 성대한 미친 짓은 예상 못 했을 테지만. 어쨌든 권유한 장본인이잖은가.
술사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놀람이 깃든 그의 눈이 다소 커졌다.
“아무개 님이 어떻게 알아요?”
“······? 뭘···?”
“북부 국경에 절벽. 수호지신이 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은 다들 대지의 군주 다화련이 깨어나면서 저지른 줄 알잖아요.”
헉.
말실수했다. 아무개는 어물쩍 넘기려고 했으나, 웬일로 답지 않게 술사가 끈질겼다.
연이은 채근에 하는 수 없이 눈 딱 감고 흔하디흔한 변명을 들먹였다.
“그··· 들었어. 누구한테···.”
여기서 그 누구가 누구냐고, 아무개 님한테 그런 얘길 들려줄 만큼 가까운 지인이 어디 있냐고, 더 추궁했다면 배 까뒤집고 항복했을 텐데.
다행히 술사는 더 캐묻지 않았다. 한데 어인 영문인지 그의 낯빛이 다소 창백했다.
아무개는 슬금슬금 몸을 사렸다. 무어, 저조차도 꿈에서 보기 전까진 북부 절벽이 다화련의 소행인 줄로 알았더랬다.
시대의 산증인들이 흙에 묻히고 더는 추억하는 이조차 남지 않을 무렵.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 후대에 이르러서는, 조상님이 과장했다 여기고 말을 바꿨겠지.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런 미친 짓을 고작 한 사람이 저질렀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마침 수호지신의 지(地)가 땅을 뜻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술사는 마른세수를 하며 재차 운을 뗐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태자 전하가 미안해서 그랬으리라고 하셨던가요?”
“으응···.”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듯. 홍의백면 수호지신을 영원토록 이 땅에 새기려던 게 아닐까. 공적을 치하하고파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 뭘 어찌할 순 없는 노릇이니. 율해서라면 살았어도 거절했을 테지만.
“태자 전하라면 그럴 법도 하네요. 황제 폐하께선 의견이 달랐던 모양이지만요.”
무슨 소리냐고. 아무개가 고개를 갸웃하자 술사가 덧붙였다.
“수호지신이 적을 둔 가문을 멸문시키려고 했잖아요.”
“···어?”
뭐라고?
“모르셨어요? 현 화양 율씨는 파종회에서 일으켜 세웠어요. 그 당시 종가가 멸문 직전에 이르렀거든요.”
국난을 모르쇠로 일관한 술사들에게 보복한 걸까, 수호지신의 위업으로 새삼 그들의 위험을 실감한 탓일까. 성도로 복귀한 황제는 술사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술사님··· 수호지신이, 화양 율씨인 거··· 알았어?”
“술사라면 다들 알아요. 북부 절벽 건은 모르지만.”
율해서는 신원을 감추고자 가면도 썼는데. 다들 안다고?
“오대세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니만큼, 술법 양식도 잘 알려진 편이에요. 덕분에 교전 방식만으로도 내력을 유추하기 쉽죠.”
율해서는 온갖 기기묘묘한 종자를 생육하고 조종했다. 이는 화양 율씨의 대표적인 술법이었다.
“작정하고 숨기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내부의 훼방은 어찌할 수 없으니까요. 원래 유능한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두려운 법이잖아요?”
율해서는 목숨 바쳐 이 땅을 수호했다. 그 결과 녀석의 가문은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쯤 되면 북부 절벽에서 죽은 게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더러운 꼴 안 보고 갈 수 있으니.
“오래 기다리셨죠? 드디어 끝났어요.”
탁, 탁, 최종 주문서까지 처리한 술사가 작업물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이다음엔 아무개 님 원하는 걸 해 볼까요?”
“······어?”
서안 위에 스르륵 미끄러지듯 엎드린 술사가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나요? 갖고 싶은 것도 좋아요. 뭐든 말해 보세요.”
창가에 드리운 휘장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비쳐 들었다.
바쁜 업무를 끝마치고 한숨 돌리듯 엎드려서는, 저를 보며 곱게 눈을 휘어뜨리자 심장이 발작하듯 날뛰었다.
시도 때도 없고 예고는 더더욱 없는 심장의 소란. 자각은 재해처럼, 사고처럼 불현듯 찾아왔다. 왜 또 이러냐고, 더는 바보처럼 스스로 반문할 필요가 없었다.
“딱히··· 없는데···.”
무심코 가슴에 손을 얹고서 대답을 쥐어 짜냈다. 술사가 가만히 올려봤다.
“욕심이 없으신가. 매번 없다고만 하시네요.”
“그, 그랬나···?”
실은 지금 당장 하고픈 게 생겼다. 입 밖으로 꺼냈다간, 그가 정색하고 경멸할 것들이라 차마 말 못 할 뿐.
“없는데 억지로 지어낼 수는 없죠. 나중에라도 원하는 게 생기거든, 꼭 말해 주셔야 해요?”
“······말하면?”
“들어드려야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뭐든지.”
눈 녹듯 사르르 웃는 얼굴.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재차 널을 뛰었다.
그는 어째서, 오해할 정도로 다정한 말만 하는 걸까?
“······술사님이 나 때문에,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저는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만은 않아서요.”
그랬다. 그가 필요에 따라 철저히 이해타산적으로 구는 사람이었다면, 저가 이리되지도 않았을 테지.
“아무개 님도 슬슬 보상받을 때가 됐고요.”
“······보상? 내가?”
“네에. 그동안 잘 참고 기다렸으니 상을 줘야지 않겠어요?”
참아? 내가 뭘?
의문을 담고 멀뚱멀뚱하자 술사가 입매를 느슨히 누그러뜨렸다.
“저랑 만난 후로 아무도 안 죽였잖아요.”
간질간질. 훈풍이 불던 가슴에 시린 서리가 엉겨 붙었다.
읏차, 하고 몸을 일으킨 술사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알아요. 줄곧 살심을 참아 온 거. 모두들 당연시하지만, 당신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도.”
시대와 지역, 문화를 통틀어 보편타당한 정서가 있다. 살인은 나쁘다는 것.
하나 이는 인간의 기준이다. 흉신으로 태어나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아무개는, 생존 본능이나 다름없는 근원적 욕구를 강제로 억누르는 셈이다.
졸린데도 잠에 들지 않고, 굶주려도 음식을 거부하는 것과 매한가지. 스스로 목을 조르는, 실상 고문과 다를 바 없는 행위.
“아무개 님이 이리 기특한데. 알아보는 사람이 저뿐이잖아요. 그러니 저라도 상을 드려야지 않겠어요?”
맞아. 나는 정말, 열심히 인내하고 있어.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리라 여겨 온 속내를 간파당한 탓일까.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무개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술사님이··· 좋아.”
“하하, 고마워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어?
아무개는 당황했다. 충동에 휩쓸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덩어리째 뱉어 낸 자신을 탓할 겨를도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 이건, 이런 반응은 이상하잖아?
“왜 그러세요?”
얼어붙은 아무개와 달리 술사는 지극히 태연했다.
일생일대의 고백이 무위로 돌아간 아무개는 서러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되물었다.
“···아, 알고 있었, 어···?”
“···? 물론이죠?”
고개를 갸웃한 술사가 설마, 하고 한쪽 눈을 찌푸렸다.
“혹시 숨기는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