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떠날 겁니까?”
봇짐을 챙겨 든 율해서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막사 입구로 걸어갔다. 미련이라곤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명료한 걸음이었으나,
“북방 소국이 연합 전선을 펼치고 있습니다.”
태자의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북 땅에도 여러 나라와 일족을 거느린 대제국이 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공물을 대폭 늘렸고, 그 때문에 속국 및 주변국의 형편은 한층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가뭄 피해가 덜한 다환을 노리게 됐죠.”
착취와 수탈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다환과 가까운 변방의 나라들이 앞다퉈 바다보다 넓은 호수를 건너왔다.
아무개가 알기로 이 당시 다환인이 북방에 치를 떤 까닭은, 그들의 남하가 정복이 아닌 약탈을 목적한 탓도 있었다.
단지 정복이 목표라면 백성을 심히 괴롭힐 까닭이 없다. 마침 연나라는 민심을 잃은 상황. 하루가 멀다 하고 반란에 민란이 들끓으니 얼마나 회유하기 좋았겠는가.
하나 그들은 민가를 습격하고 가축과 식량을 노략질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소수의 일탈로 시작된 초창기는 그렇다 쳐도, 일족에서 국가 단위로 규모가 확장된 후에도 여전했다.
그들은 다환과 상부상조할 의사가 없었다. 물의 군주와 대가뭄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타 대륙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우리에겐 다 똑같은 북방인으로 보이나, 실상 그들 간에도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대비가 부족했던 초기에는 거듭 패퇴했으나, 적들이 알아서 사분오열해 준 덕에 착실히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죠.”
물론 그대의 공도 컸습니다. 태자는 짧게 치하했다.
“한데 위기감을 느낀 탓인지 근래 들어 저들의 양상이 다소 변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바다보다 넓은 호수 북면에 연합 진지를 구축했다는군요. 흩어진 적이 하나로 손잡은 겁니다. 우리로선 최악의 상황이죠.”
율해서가 아무리 공을 세우고 위명을 떨쳤다곤 하나 초면에 불과할진대. 태자는 군사기밀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심지어 바다보다 넓은 호수가 돌연 삼등분으로 갈라졌다 합니다. 가뭄으로 호수가 메말랐다 한들 놀라운 일임은 틀림없죠.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적 진영에 물을 가르고 지형을 바꾸는 대단한 술사가 있다고요.”
병사뿐만이 아니다. 바다보다 넓은 호수를 삼등분했다는 소식은 수호지신, 율해서마저 흔들리게 했다.
“그는 북방 제국의 막내 황자입니다. 이 지리멸렬한 소요에 참전조차 않은 먼 나라의 황자예요. 그가 호수를 가른 건, 황제와의 갈등 때문입니다. 전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태자가 피로에 전 한숨을 짧게 토해 냈다.
“무용한 공포가 우리 군의 사기를 해치고 있습니다. 북부 진영에선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어요.”
“······진실을 밝히면 되지 않습니까. 호수를 가른 자는 제국의 황자이며,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고요.”
“그럴 수 없으니 문제입니다.”
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구스럽게도 우리 황실은 전란을 대비한 적 없습니다. 관심조차 두지 않았죠. 한데 파천 길에 등 떠밀려 책봉된 후궁 소생 따위가 어찌 이리 이북 사정을 소상히 알겠습니까?”
율해서의 지척에 다다른 태자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망명하고자 했습니다. 저 이북 땅으로.”
천천히. 율해서가 뒤돌아섰다.
“설마 태자로 책봉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의 결심이었죠. 황궁은 내게 지옥이나 다름없었고, 썩어 문드러져 침몰하는 나라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은밀히 망명을 준비했기에 북방 정세에 해박하다.
그렇기에 밝힐 수 없다.
“진실을 밝히면, 필시 추궁을 받게 될 겁니다. 황실과 군 수뇌부에서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무슨 수로 아느냐고요.”
과정이 어떻든 일단은 태자 아닙니까.
“태자가 되어서는, 내심 망명할 작정이었다니. 하여 적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니··· 차라리 적군 술사를 두려워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구명줄로 알았던 태자가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실상보다는.”
황제가 파천하고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흩어진 민심은 태자를 중심으로 간신히 결집했다.
구심점인 태자가 무너지면, 모든 게 망가진다.
“······그토록 치명적인 약점을 제게 알려 주시는 연유가 무업니까.”
“나도 그대도 시한부나 마찬가집니다.”
걸어 다니는 시체 꼴인 율해서나, 국난 이후 쓸모를 다하고 폐기될 임시 태자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긴개긴이었다.
“한때 모국을 저버리려 했으나, 어찌 천운이 닿아 남은 생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치게 되었으니.”
율해서를 마주 보고선 태자가 돌연 쓴웃음을 흘렸다.
“이 고단한 저승길에 동행할 동무 한 명쯤 있어도 좋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동무라···
“전하처럼 고귀하신 분과 동무가 되기엔 제 태생이 미천합니다만.”
“하하, 고귀하다라! 내 그리 태생이 고귀하여 배다른 형님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고, 오물 묻은 신발을 핥아야 했군그래.”
황궁이 지옥이었다더니. 태자의 삶도 편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저승길 동무에 태생이 무슨 상관입니까. 살아생전 신분이 어떻든, 죽어서는 모다 공평히 다화련의 품에 안길 것을!”
파안대소한 태자가 눈꼬리에 맺힌 이슬을 소매로 훔쳐 냈다.
“곧 총력전이 있을 겁니다.”
간신히 웃음기를 거둔 태자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빙룡의 호수를 분할한 막내 황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주무른 지형은 적군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방어하는 우리 측에선 상당히 불리해졌어요.”
그대가 비술사를 상대하지 않음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잖습니까.
“저들도 우리도 더는 전쟁을 이어 갈 여력이 없습니다. 이번이 최후의 결전이 될 거예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율해서는 모르지만, 아무개는 분명히 이해했다. 태자는 무력시위를 은근히 종용하고 있었다.
이왕 죽을 거. 마지막 숨결까지 바쳐 장렬히 희생하자고.
저승길 동무인 그가 함께할 테니.
“알겠습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버석한 목소리로 율해서가 답했다. 막사 입구를 들추는 그의 뒤로 태자의 한탄 섞인 혼잣말이 언뜻 들렸다.
“내 벗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만남이 이리 짧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이번 생은 여의치 않으나, 혹 다음 생에라도 연이 닿는다면··· 그땐 좀 더 오래, 느긋하게 교분을 맺었으면 합니다.”
아무개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동무니 벗이니 같잖은 감투를 씌워 놓고는. 결국 죽으라 등 떠밀었을 뿐이잖은가. 태자의 얄팍한 감언이설에 율해서가 왜 이리 동요하는지 모르겠다. 친구 한 명도 없는 마냥.
······어라?
혹시··· 정말로, 첫 교우 관계가···?
율해서의 성장 과정과 성품을 보건대, 벗이 없다 해도 전연 놀랍지 않았다. 아무개는 새삼 충격받았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친우가, 세 치 혀로 꼬여 낼 심산만 그득한 위정자라니.
심지어 그냥 동무도 아니고 저승길 동무라잖은가. 거참 흉흉하다, 흉흉해.
홍의백면이 막사에서 나오자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보초병은 물론 급히 뛰어가던 파발꾼까지. 어수선한 병영에 얼음장 같은 정적이 내리고 모두가 수호지신을 주시했다.
율해서는 그들을 무시했다. 축지술로 이 불편한 공간을 즉시 벗어날 수도 있겠으나,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라 포기한 듯싶었다. 피부가 따끔하리만큼 찌를 듯한 눈길을 감내하며 소년은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진지를 벗어날 즈음. 뒤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 저기···! 외쳐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죄인처럼 묶인 병사가 힘겹게 쫓아왔다. 율해서의 등을 찌른 그놈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밖에 없는데 징집된 바람에, 가족이 걱정되어 그만···!”
변명을 일삼는 그를 헌병이 붙잡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파렴치한 때문에 속 터지는 아무개와 달리 율해서는 미동조차 않았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동무’ 운운에 속절없이 흔들리던 가벼운 심장이 맞나, 의심스러우리만치 견고했다.
율해서는 재차 앞을 보고 나아갔다. 그 걸음은 북으로 향했다. 빙룡이 거하는, 바다보다 넓은 호수로.
도착하고 보니 북방의 가뭄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었다. 한때 바다에 비견되며 대지 한복판에 수평선을 그리던 호수가 칙칙한 흑갈빛 맨살을 황량히 내놓았다. 말라붙은 물이끼 따위가 과거의 영광을 가늠케 했다.
호수와 맞닿은 대삼림도 가뭄의 여파에서 마냥 자유로울 순 없었다. 비쩍 마른 가지와 이파리가 처량했다. 스치기만 해도 파삭, 힘없이 바스러지는 나무 사이에 율해서가 머물렀다.
대삼림 곳곳을 직접 밟고 다니니 호수 너머 적군도 낌새를 알아차렸다. 도중에 연나라 정찰병도 몇 번 마주쳤다. 율해서는 숨길 생각일랑 전혀 없다는 듯 무심히 오고 갔다.
언뜻 무의미하게 돌아다니는 모양새였으나, 아무개는 감각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가 거쳐 간 땅 깊숙이 뿌리내린 생명과 교감했다. 그들과 접촉하고, 자신을 매개 삼아 연결했다. 스스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다른 가지를 접붙이듯이.
지난하고도 긴긴 작업이었다. 내부에서 지켜볼수록, 아무개는 소년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리란 걸 깨달았다. 바다보다 넓은 호수를 삼등분한 술사가 있다니, 그보다 더한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인가.
기어이 대삼림 전체가 한 소년과 연결될 즈음. 연나라군이 각지에서 집결했다. 북방의 호수와 다환의 삼림을 사이에 두고 짙은 전운이 감돌았다.
마침내 율해서가 움직였다.
홍의백면이 호수 앞, 대삼림 가장자리에 섰다. 건너편에서 북방 이민족이 소년을 주시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다 모일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준 율해서는 주머니 속 수호단을 모조리 꺼냈다. 손안에 가득 찬 환약을 주저 않고 입안에 털어 넣었다. 단 한 알도 남김없이.
텅 빈 주머니가 바람결에 힘없이 날렸다. 아무개는 직감했다.
너는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구나.
수호단을 죄 삼킨 율해서가 발끝으로 지면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 순간, 소년과 연결된 삼림이 응답했다.
숲이 몸을 일으켰다.
촤아아악⎯ 나무가 뿌리내린 지면이 솟구쳤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목 안에서 울컥, 피가 역류했다. 율해서는 태연한 낯을 가장하며 핏덩이를 삼켰다. 혀가 마비된 걸까, 혈액 특유의 비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밍밍한 맹물을 삼키는 듯했다.
호수 너머 동등한 눈높이서 마주 보던 적군이 차츰 아래로 아래로 꺼져 갔다. 그들을 발밑으로 내려 보게 되고도 지면은 한참을 더 치솟았다. 적군이 개미 떼처럼 여겨질 즈음, 삼림이 융기를 멈췄다.
북부 국경 지역에 긴긴 절벽이 생겼다. 수호지신의 전설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