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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00)화 (100/138)

100화

율해서는 한숨을 삼키며 무겁게 늘어지는 몸을 질질 끌고 비탈로 향했다.

“사람 살···!”

하필 그 순간. 병사가 붙잡은 나뭇가지가 뚝, 끊어졌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길게 생각하기도 전에 율해서는 반사적으로 축지했다. 비탈 중턱에서 사정없이 굴러가는 병사의 뒷덜미를 잡아챈 후 즉시 위쪽으로 축지. 죽다 살아난 병사가 엎드려 헉헉댔다.

“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은데 축지술을 더 써 버리다니. 그야말로 한계였다.

전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 속에서 율해서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만요. 어딜 가시는 겁니까?!”

율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묵묵히 이동하자니 바지를 축축이 적신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저희 막사로 가, 가시죠. 상처를 돌봐드릴···!”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에 힘없이 끌려간 율해서는 자꾸만 들러붙는 병사를 흐릿한 시야로 멍하니 봤다. 그가 뭐라는지, 왜 이러는지, 어느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관군과 엮일 생각 없습니다.”

다만 지금껏 수없이 말한 바를 거듭 반복할 뿐.

여느 때라면 이리 귀찮게 엮일 거 없이 축지로 회피했으려나. 하나 지금은 당장 어깨를 붙든 손을 뿌리칠 기운도 없었다. 율해서는 휘청이며 다시 걸어갔다.

“아, 안 되는데··· 안 돼요. 가면···.”

뒤에서 병사가 안절부절못했다.

“멈춰요, 제발··· 정말로 가면 안 된다고요.”

한 걸음 한 걸음이 추를 단 듯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데. 율해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정신은 나갔을지도. 몸만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악에 받친 괴성과 함께 푸욱, 무언가 등허리를 파고들었다.

소년이 살려 준 병사가, 소년의 등에 칼을 찔렀다.

서늘한 감각에 조금은 정신이 돌아온 율해서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아픔은 없었다. 이미 전신을 도려내던 고통이 너무도 큰 탓에 날붙이 특유의 차가움만 느껴질 따름이다.

다만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몸이 더는 버텨 내지 못했다.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까맣게 물들었다.

수호지신이 쓰러졌다.

다시 눈을 뜬 곳은 어느 막사 안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율해서의 안에서. 아무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기껏 살려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칼침이나 놓은 고 미친놈이 기어코 군영까지 끌고 온 걸까.

“깼습니까?”

어딘가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만, 일단 목부터 축이세요. 입술이 말랐습니다.”

입가에 물그릇이 대어졌다. 율해서는 머뭇했지만 시키는 대로 물을 마셨다. 직접 마시고 싶어도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무리였다.

“당신을 만나면 하고픈 말이 무척 많았습니다만, 우선 유감을 표해야겠군요.”

환자를 보살피듯 찬찬히 물을 먹여 준 상대가 빈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대가 전장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라 명하였으나, 설마 칼로 찌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체불명의 높으신 분이 수호지신을 만나고 싶어 명을 내렸고, 이에 충실히 따른 병사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단 건가.

과정이 어떻든 결국 상대는 목적한 바를 이룬 셈이다. 아무개는 어이가 탈탈 털렸지만.

“그대를 데려온 이에겐 전역과 더불어 후한 포상을 내리겠다 했습니다만, 전역 전에 형부터 받기로 했습니다. 부디 그대의 노여움이 조금이나마 줄길 바랍니다.”

율해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만류했으나 아랑곳 않았다. 후들거리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키자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원, 고집도.”

혀 차는 소리를 무시한 율해서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려 해도 그조차 버거웠다.

“······얼마나···.”

잔뜩 쉰 목소리에 놀란 율해서가 멈칫했다. 하지만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습니까?”

“사흘을 꼬박 앓았습니다. 의원이 침을 놓아 강제로 재웠죠. 가만히 뒀다간 고통 때문에 깰 것 같다더군요.”

너무 아파서 잠조차 들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대의 짐은 옆에 뒀으니 나중에 확인하세요. 근방을 수색하며 발견한 것도 모아 뒀습니다.”

그제야 봇짐 위에 가지런히 개어 둔 붉은 옷과 흰 가면이 보였다. 교전으로 걸레짝이 된 의복이 꼼꼼히 수선되어 있었다.

“참으로 놀랐습니다. 홍의백면, 수호지신이 이리 어린 소년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가면이 저기 있다. 즉, 율해서는 현재 맨얼굴이다.

“······어인 연유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호응해 주지 않고 본론부터 꺼내는 율해서의 태도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는 없었으나, 상대는 개의치 않았다.

“예상했겠지만,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우리 군에 직접 모시려 했죠.”

하나 의원의 진료를 들으니 힘들겠더군요.

“그대가 여지껏 살아 숨 쉬는 것이 기적이라 합니다.”

그는 의원의 전언을 줄줄 읊어 주었다. 겉은 멀쩡해 봬도 속은 진창이다, 이 몸으로 어찌 살아 있는지 신기하다 못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등등.

“먼 옛날에는 죽은 시신을 산 사람처럼 움직이는 술법이 있었다지요? 혹 그대가 그런 게 아닌가 의심하더군요.”

“강시 제조는 금지된 술법입니다.”

“하하하! 설마 진심으로 한 소리겠습니까. 그만큼이나 놀랍다는 게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지끈거리는 통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상대가 기민하게 살폈다.

“더 주무세요. 여긴 내 막사이니 원할 때까지 얼마든지 머물러도 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율해서가 가면을 집어 들어 얼굴에 덮어썼다.

“지금 잠들면··· 정말로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아서요.”

때때로 정신이 육체를 압도하는 순간이 있다. 율해서는 지금이 그러했다.

진작 쓰러졌어야 할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워 피 튀기는 전장으로 밀어 넣는다. 단 한 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풀고 느슨해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저보다 어린 소년이 백면을 쓰고 홍의를 걸치며,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수호지신으로 화하는 모습을 가만 보던 상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나라의 국본입니다.”

홍의에 팔을 꿰어 넣던 율해서가 멈칫했다. 지금이라도 엎드려 절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됐으니 가만있어요. 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일일이 예를 갖추라 할 만큼 채신없지는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율해서는 정말이지 강심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인데. 만류하자마자 예의상으로도 사양 한 번 하지 않고 넙죽 받는 걸 보니.

태자는 작은 낭을 툭 던졌다. 수호단을 담아 둔 주머니였다.

“의원이 그러더군요. 그 안에 있던 단약은 환초로 제조하여 일시적으로 통각을 마비시킬 뿐, 특별한 효능은 없다고요.”

“······.”

“산송장인 그대가 거동할 수 있던 까닭이 그 환약이겠죠. 이 나라의 국본보다도 그대가 더 열심히 국난을 극복하려는 것 같습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느슨하게 비껴 앉아 있던 태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유가 뭡니까?”

대관절 무엇이 너를 그리도 필사적으로 만들었나.

뱃가죽이 갈라지고 누더기가 된 몸을 기워 가며, 환초로 고통을 속인 채 적 앞에 서는 이유. 태자는 그것을 하문했다.

“······저는 태생이 비천하고 못 배워 먹은 상놈입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율해서가 이어 말했다.

“그리 어려운 건 묻지 마십시오. 모릅니다.”

태자는 당혹했다. 그는 약관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병권을 쥐고 난국을 돌파하는 과감함과 대범함을 갖추고 있었으나, 태생부터 존귀한 이였다. 이렇듯 날것 그대로의 언행을 면전에서 겪은 역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율해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달래듯 운을 뗐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냥입니다.”

“그냥? 그냥이라 했습니까?”

율해서는 피난길에 뒤처져 희생될 사람들을 구하고자 뛰어들었다. 존경받아 마땅한 행위였으나, 화양 율씨 종가에선 그를 멸시하고 처신을 꾸짖으며 가두기까지 했다.

그 과한 처벌이 되레 어린 소년의 반발심을 키우고, 도화선이 된 것도 같지만. 여하간 근본적인 이유는.

“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홍의와 백면을 모두 갖춘 율해서가 기어코 일어섰다. 눈앞이 핑 돌고 쓰러질 것 같았으나, 끝내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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