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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9)화 (99/138)

99화

그렇게 제 몸 혹사한 율해서가 다다른 곳은 대회전(大會戰)의 한복판이었다.

전장을 뒤덮은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붉은 옷의 소년이 나타났다. 등 뒤로 연나라군의 환호성이 쩌렁쩌렁 울리고 눈앞에선 비관적인 절망이 북방 진영을 관통했다.

소년을 중심으로 양측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검독수리의 눈으로 염탐한 진지를 직접 확인한 율해서가 축지로 침입했다.

교본으로 쓰일 만큼 정석적이고 완벽한 축지술이었다. 시야로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목적지까지 거리를 계산하고 안전 여부를 파악한 후 이동하는.

그러나 유랑술사의 축지에 익숙한 아무개로서는 다소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역시 술사님 축지술은 사기야. 아무개는 습관처럼 술사를 연상했다.

“···⎯!”

율해서가 적의 본거지에 침투한 순간, 북방의 술사들이 대거 덮쳐들었다.

일대다의 불리한 싸움. 간발의 차로 아찔한 상황을 회피하길 수차례. 언뜻 율해서는 궁지에 몰린 듯 보였다.

하나 그 손안에는 적진을 제 터전으로 만들 씨앗이 숨겨져 있었다. 좁쌀보다 작은 씨앗을 한 움큼 쥔 율해서는 교전 내내 은밀히 퍼트렸다.

영력을 머금은 씨앗이 지면을 파고들어 급속도로 뿌리내렸다. 율해서의 감각을 공유한 아무개는 제 피부인 양 느낄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자라난 씨앗이 길고 촘촘한 뿌리로 지하를 혈관처럼 얽어매는 것을.

적들은 맹공을 퍼부으며 율해서를 몰아갔다. 그들을 피해 물러나던 중, 발끝에서부터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다리를 타고 기어올라 왔다.

지면 위로 괴이한 형태의 진법이 떠올랐다.

적 진영 곳곳에 덫처럼 설치해 둔 진법 중 일부가 발동된 것이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부라진 모양새의 진법에서 반투명한 사슬이 솟구치며 율해서를 사로잡았다. 소년의 당혹감이 아무개에게도 전해졌다.

율해서가 속박당하자 적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개중 성급한 일부는 그간의 울분을 풀려는 듯 대뜸 율해서의 복부를 걷어차기도 했다.

무릎이 꺾이고 고꾸라진 율해서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면서도 날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승리를 확신한 적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떠들며 하얀 가면을 가리켰다. 그동안 지독히도 골머리 썩게 한 놈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것 같았다.

퍽이나 구미가 당기는지. 어지간해선 보기도 힘든 원거리형 술사까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율해서는 자신을 향한 관심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가까이···

크고 털이 무성한 손이 흰 가면을 붙잡은 순간. 최후의 적 하나까지 시야 안에 들어온 그때.

지표면이 파도처럼 솟구쳤다.

“······!”

율해서는 뿌리를 조종함으로써 그 뿌리에 얽힌 땅을 주물렀다.

가면에 손을 댄 적은 역으로 손목이 잡혔다. 율해서에게 붙잡힌 술사가 축지당했다.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중심을 잃은 술사들이 늦게나마 도망치려 했으나 무용했다. 스치듯 닿는 순간, 그들은 강제로 이동당했다. 시전자가 멀리 흩어지자 몸을 친친 감은 사슬의 속박도 무력해졌다. 적진의 모든 술사를 축지술로 날려 버린 후 율해서가 이동했다.

아무개는 이 미친 짓거리에 감탄을 넘어 경악했다. 축지술이란 게 이리 남발할 수 있는 술법은 아닐진대.

심지어 율해서는 직전까지 영력 고갈로 허덕이지 않았던가. 축지 한 번 실패한 후 그 반동으로 바닥을 기던 녀석이. 고작 수호단 한 알 먹고 이리 날뛴단 말인가.

이쯤 되면 섬뜩하기까지 했다. 약효가 떨어진 후 얼마나 고통스러울는지. 짐작조차 되질 않아서.

대회전에서 이탈한 율해서가 목적한 곳에 다다르자 앞서 축지시켜 둔 적이 공세를 퍼부었다. 온통 나무와 수풀로 뒤덮인 으슥한 산속. 십수 개의 단도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날아들었다.

쉐에에엑⎯! 섬뜩한 파공성을 마주한 율해서가 발끝으로 가볍게 지면을 두드렸다. 영력이 지하로 뻗어 나가고 수목이 응답했다.

울창한 숲의 나무뿌리가 솟구쳐올랐다. 적이 날린 단도가 뿌리 결에 파바박! 박혔다.

그물처럼 얼기설기 엉긴 뿌리 사이로 적이 열 손가락을 튕기듯 당기는 것이 보였다. 그 즉시 단도들이 회수됐다.

유랑술사였다면 여기서 재차 축지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율해서에게 무리인가 보다.

시간을 거스르듯 되돌아가는 단도와 상대의 손가락 사이로 실낱처럼 가늘고 은은한 선이 윤곽을 드러냈다. 적은 회수한 단도를 주위로 넓게 퍼트렸다. 굵직한 나무 기둥과 회백색 바위에 단도가 박혔다. 하나같이 반투명한 실로 연결된 그것은 마치 거미줄 같았다.

사뿐히 뛰어오른 적이 거미처럼 그 위에 올라섰다. 한 사람분의 무게를 받아 낸 거미줄이 탄력 있게 흔들렸다. 복잡하게 얽힌 실선 위로 떨어진 나뭇잎이 절단되어 두 조각으로 어긋났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선은 흉기나 다름없이 날카로웠다.

거미줄 형태의 올가미를 설치한 적은, 율해서를 두고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일대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걸까. 흩어진 동료들과 결집을 우선하는 듯했다.

수적 우위를 점하려는 건 좋다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율해서가 누군지 몰랐다. 화왕 모란에게 직접 사사받은 소년에겐 산천초목이 제 편이나 다름없는 것을.

대지 위로 양손을 가져다 댄 소년이 영력을 불어넣었다. 툭, 투두둑··· 지면이 뒤틀리며 어긋났다. 주위 나무가 뿌리를 들고 일어섰다. 단도를 박아넣은 나무 몸체가 움직이자 연결된 거미줄 또한 헐겁게 늘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계까지 뽑혀 나온 나무가 적을 향해 굽어졌다. 도주하던 적의 머리 위로 그 자신이 설치한 올가미가 쏟아졌다.

적은 혀를 차면서도 신속하게 거미줄을 끊어 냈다. 그 사이 율해서는 넝쿨을 빼 들고 채찍처럼 휘둘렀다. 끽해야 두 자도 안 될 넝쿨이 고무처럼 길게 늘어나 적의 발목에 감겨들었다.

상대는 즉시 단도를 휘둘러 넝쿨 채찍의 허리를 끊어 냈다. 하나 발목에 감긴 넝쿨은 떨어지지 않았다. 미끈한 표면에 가시가 돋아나더니 살갗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옷 위로 검붉은 피가 배어났다.

“···⎯, ···! ⎯⎯!”

적군 술사가 무어라 외쳤다. 하지만 다환에서 나고 자란 율해서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피를 머금은 가시넝쿨이 적의 다리를 뱀처럼 타고 올랐다. 상대는 넝쿨을 쥐어뜯으려 했으나 날카로운 가시가 손바닥을 관통했다. 비명을 지르며 단도를 역수로 쥐고 찔러 댔으나 살을 파먹고 가시를 키운 넝쿨은 멈추지 않았다.

가시넝쿨은 두 다리를 넘어 전신을 휘감았다. 죽어 가는 이의 단말마가 애처롭게 울렸다. 가시가 적의 얼굴을 뒤덮고 핏빛 꽃을 피웠다.

사람을 양분 삼아 자라는 식인 꽃에 잠식된 적의 눈빛이 형형했다. 심장을 저밀 듯 날카롭게 찔러 드는 시선을, 율해서는 피하지 않았다. 그 눈에서 생명의 빛이 꺼질 때까지.

만개한 혈화를 뒤로한 율해서가 다음 장소로 축지했다. 소년 의병은 적을 동시에 상대하지 않고 차례차례 각개 격파했다.

율해서는 기기묘묘한 종자(種子)를 무기처럼 사용했다. 덕분에 아무개는 이 세상에 생소하고 난해하며 위협적인 화초가 어찌나 많은지 깨닫게 됐다.

마침내 최후의 적군 술사를 처리하고 나니 율해서는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막판에 치달을수록 수호단의 효력이 떨어진 탓이다. 끔찍한 고통을 이 악물고 감내하느라 어찌 싸웠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나무 둥치에 기대앉은 율해서가 떨리는 손으로 웃옷을 풀어헤쳤다. 뱃가죽이 형편없이 찢어져 내장이 비어져 나오려 했다. 그 위로 노란 꽃을 뿌리자 새살이 차올랐다.

속은 만신창이인 주제에. 겉으로는 멀쩡한 체하던 녀석의 비밀이 탄로 났다. 노란 살살이꽃, 붉은 피살이꽃, 하얀 뼈살이꽃. 이 세 꽃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기워 왔던 것이다.

“······저, 저기···?”

그때. 누군가 율해서를 발견했다.

삐걱이는 몸이 가까스로 돌아보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수, 수호지신 맞으시죠?”

그는 연나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허름한 차림새와 어설픈 모양새가 갓 들어온 신병인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싸운 지점이 연나라 진영과 가까웠던 것도 같고.

율해서는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눈을 감았다. 약효로 미뤄 둔 고통이 슬금슬금 기어 나와 절로 앓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마,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저희 막사에 가서 치료받으세요!”

수호지신이 군과 엮이길 꺼려 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 텐데. 저놈은 무슨 생각으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 거지?

거절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율해서가 돌연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등이 젖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당장 혼절할 것만 같았다. 연나라 병사가 지껄이는 말이 웅웅 불명확하게 들렸다.

“사람을······ 조금, ···기다릴······ 가면 안 되는···.”

혼자 떠들어 대던 병사가 멀어졌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싶어 어깨에 힘을 빼던 찰나.

“으아아악!”

선명한 비명이 귓가에 꽂혔다. 율해서가 번쩍 눈을 떴다.

급히 고개를 들었으나 병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율해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끔찍한 둔통이 전신을 푹푹 찔러댔다.

“사, 살려 주세요!”

다급한 외침을 따라가니 아슬하게 도드라진 나뭇가지를 잡고 버티는 병사의 손이 보였다. 서두르다 비탈진 경사에 발을 헛디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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