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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8)화 (98/138)

98화

“근방에 규모 있는 도적단은 셋. 대일은 식솔을 볼모로 삼고 배신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니 이리 어설픈 도망은 엄두도 못 낼 테고. 남은 건 구성과 자한인데···.”

어깨를 들썩이는 전직 도적들. 그에 술사가 생긋 웃었다.

“자한이군요?”

몇 마디 말로 출신을 밝혀낸 술사가 바짓단을 털며 바로 섰다. 당황하여 어물거리는 전직 도적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아직 관아에서는 혼란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인력이 부족하니 도적이라 해도 우두머리급이 아니면, 대개 충군(充軍)하지요.”

하지만, 하고 운을 뗀 술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저는 여러분이 약탈한 마을로 지금 당장 축지시켜드릴 수 있어요.”

도적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노략질한 마을에 맨몸으로 던져진 도적이 어떤 꼴을 당할는지 뻔하잖은가. 차라리 관아로 가 곤장을 맞는 쪽이 목숨 보전에 백배 났다.

“수, 술사 나리···.”

“저희를 버리시렵니까?”

전직 도적들의 낯이 가관이었다. 동아줄로 알고 붙잡았건만 도중에 썩어 문드러진 걸 깨달은 얼굴이다.

“하하, 버리다니요. 여러분이 제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버리겠어요?”

술사가 한 걸음 물러섰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가 재차 물었다.

“역시 관청으로 가는 게 낫죠?”

웃는 낯으로 모골이 송연한 소릴 하니 그럴 의도가 아닌데도 스산한 위압감이 서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전직 도적들이 쏜살같이 내뺐다.

염치도 없이 매달리는 꼴을 마냥 받아 주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게끔 유도하고 적절한 선에서 끊어 낸다. 나무랄 데 없는 그의 처사가 아무개에게는 생경했다.

“아무개 님.”

그가 징징대는 도적놈들을 너그러이 감싸 주리라고. 어째서 당연하게 생각한 걸까.

“산책을 멀리 나오셨네요.”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히 거리를 좁혀 온 술사가 작은 약통을 꺼내었다.

“잠깐 눈 뗀 사이에 없어져서 놀랐어요.”

그는 제 것인 양 자연스레 아무개의 손을 잡아 올렸다. 약통에서 희멀건 연고를 덜어 낸 그가 밧줄에 쓸린 손목 위로 펴 발랐다.

진득한 연고가 술사의 체온에 녹아 미지근하게 들러붙었다. 살살 문지르는 감촉에 간질간질 소름이 돋았다.

“마윤 님께서 제조한 거예요. 다친 곳에 이리 발라 주시면 돼요.”

밧줄을 끊어 낸 후 곧장 이 약을 구하러 갔던 모양이다. 게으른 마윤을 꼭두새벽부터 깨웠으니 싫은 소리 잔뜩 들었을 테지. 한데 그는 전연 내색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죠.”

한 차례 시범을 보여 준 그가 약통을 아무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여즉 간질거리는 손목의 기이한 열감 탓일까. 멀어지는 옷소매를 아무개가 충동적으로 붙들었다.

“···술사님.”

우물쭈물하던 아무개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 바현이 한 말인데···.”

자꾸만 서두가 길어졌다. 아무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술사님이 나를··· 특별, 취급··· 한··· 다고···.”

어째서 그가 도적 나부랭이를 감싸 주리라 여겼나.

사특한 흉신조차 살갑게 받아 줬으니까. 제게 하듯, 다른 이에게도 그러리라 지레짐작했다. 실지로 그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잖은가.

한데 예상이 빗나갔다. 당혹스러운 가운데 불현듯 어떤 상념이 스치었다. 그는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지만,

자신을 향한 다정은 어딘가 특별한 것 같다고.

어쩌면··· 바현의 말대로, 그가 나를 편애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렇게 속내를 입 밖으로 낸 후. 무작정 앞선 마음보다 더딘 머리가 뒤늦게 논리적인 명분을 떠올렸다.

술사가 전직 도적들을 관청으로 인도한 까닭은, 상벌은 물론 호구지책까지 보다 체계적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들 홀로 온 땅의 도적 떼를 감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지사였다.

편애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리 분별할 줄 아는 멀쩡한 어른이라면, 누구든 그리할 일이렷다.

······이게 다 바현 때문이야.

또 한 번 시원하게 김칫국을 마신 아무개는 바현을 탓했다. 놈이 이상한 소릴 해서 그렇다. 괜한 말로 헛바람을 불어넣어서는 이 사달이 난 게다.

아무개는 입안의 살을 짓씹으며 고개를 떨궜다. 차마 낯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가요?”

딱히 의식한 적도 없는 듯, 외려 술사가 그 자신의 심리를 되물었다.

아무개는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술사의 소매를 붙잡은 손이 낙심한 듯 힘 빠져 스르륵 미끄러졌다.

기어이 손을 놓아 버리기 전,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아무개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어스름한 하늘. 술사의 어깨와 맞닿은 수평선으로 설익은 여명이 푸릇이 감돌았다. 느슨하게 묶어 가슴팍으로 흘러내린 그의 머리칼이 사락사락 흐트러졌다.

“그렇네요.”

강바람에 들썩이는 삿갓을 한 손으로 잡아 누른 그가 아무개를 눈에 담았다.

“저는 당신을 특별 취급하고 있어요.”

***

희뿌연 구름을 뚫고 나가자 파아란 하늘과 연녹빛 들판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공중을 선회하며 굽어본 지상으로 적진이 한눈에 보였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지면을 내려다보다니. 마치 새라도 된 듯했다.

감상에 젖어 들던 찰나. 돌연 시야가 암전되었다.

감긴 눈꺼풀로 불그스름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손으로 차양을 드리우고 눈 뜨자 손 틈새로 한낮의 태양이 넘쳐흘렀다. 다홍빛 윤곽의 손끝에 따끔한 감각이 일었다.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 살펴보니 검지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서 작은 벼루집을 열어 먹통에 붓을 담갔다.

그제야 아무개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어느 숲속의 깊은 골짜기. 바람에 날리지 않게끔 돌로 고정한 종이와 지도가 사방에 한가득이다. 개중 빈 종이를 가져와 바삐 붓을 놀린다.

무얼 하는 걸까. 시선을 공유한 덕에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적진. 율해서는 그 광경을 묘사했다.

멀리서 매가 울었다. 잠시 후 소년이 기대앉은 나무 가지로 푸드덕 날갯짓이 내려앉았다. 율해서가 손 내밀자 팔등으로 검독수리가 올라탔다. 한데 이 독수리, 얼굴에 무얼 붙이고 있다.

종이에 피로 그린 가짜 눈.

종잇조각을 떼어내고 고기 한 덩어릴 주자 녀석이 부리로 잽싸게 받아먹었다. 독수리에게 눈을 빌려주어 하늘의 시야를 공유한 것이다.

그나저나 얼굴이 왜 이리 답답하지.

몽중에서 아무개는 저가 깃든 육신의 감각을 함께했다. 이 갑갑함을 당연 느꼈을 율해서가 안면을 쓸어내렸다. 지문을 스치는 매끄럽고 단단한 감촉. 가면이다.

가면을 머리 위로 비스듬히 끌어올리자 시원한 바람이 콧잔등과 두 볼을 간지럽혔다. 때마침 독수리가 날갯짓하며 비상했다. 가면을 고정한 끈이 풀리며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붉은 옷자락 가운데 놓인 가면이 기이할 정도로 희다.

홍의(紅衣) 백면(白面).

설마.

불현듯 모종의 의혹이 떠올랐다. 설마, 율해서가 수호지신인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수호지신이 널리 위명을 떨친 후 따라서 홍의에 백면을 한 자들이 우후죽순 늘었으니. 율해서도 그중 하나일는지 모른다.

아무개가 판단을 보류할 무렵, 율해서도 작업을 마무리했다. 뒤편에 놓아둔 지도를 가져와 나란히 놓자 둘이 이어져 하나의 그림을 이루었다.

두 폭의 지도에 그려진 양측 군영. 서로 대치 중이다.

세필을 꺼내 든 율해서가 붉은 염료로 선을 그었다. 전술을 계획하는 것일 테지. 율해서가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주시할 때였다.

쿠구구궁⎯!

멀리서 땅이 울리고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고개를 쳐든 율해서가 흰 가면을 고쳐 쓰며 일어섰다. 이어 축지하려던 찰나, 몸이 고꾸라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처럼 관통한 충격에 아무개마저 정신이 혼미했다. 율해서가 거칠어진 숨을 힘겹게 토해 냈다. 고통을 견디며 희게 질리도록 움켜쥔 손아귀에 지도가 구겨졌다.

얼마나 바닥을 기었을까. 해일처럼 몰려든 고통이 물러났다. 그제야 아무개도 간신히 생각을 이을 수 있었다.

검지의 상처를 제하면 율해서는 흉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전장에서 유격하는 소년 의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하나 축지술을 실패한 순간,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뭉개지는 듯 끔찍한 격통이 일었다. 빈 잔을 뒤집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내듯 전신을 쥐어짜는 감각.

아무개는 깨달았다. 율해서는 언뜻 멀쩡해 보였으나 실상은 엉망진창이다. 바닥난 영력을 억지로 긁어모아 술법을 쓰려 하니 반동으로 타격 받은 것이다.

율해서가 형편없이 떨리는 손을 옷깃 안으로 밀어 넣었다. 힘겹게 호흡을 고르며 조그만 낭에서 환단을 꺼내 삼킨다. 약 기운에 고통이 가시자 어깨로 흙바닥을 짚고 섰다.

녀석이 복용한 것은 훗날 수호단(守護丹)이라 불리는 단약이었다. 술법의 바탕 되는 영력을 한계 이상까지 끌어올려 준다는 환단.

율해서가 축지술을 거듭 운용했다. 수호단의 효능으로 재도전은 성공했다만, 아무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호단은 몸을 망친다. 부작용도 상당한 데다 일단 섭취하면 며칠은 거동도 못 하고 자리보전해야 한다. 벼랑 끝에서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

한데 율해서는 식후 입가심인 양 대수롭지 않게 삼켰다. 단약을 보관하는 낭은 홀쭉하게 속이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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