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태자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홍의백면은 오대세가에서 합의한 주류 의사와는 상반된 행보를 보입니다만, 규율을 이행하려는 의지는 분명히 합니다. 그가 전쟁에 관여한 까닭은, 비술사로 이뤄진 우리 군의 역량으론 감당키 어려우리라는 공리적 판단에 의거한 결행입니다.”
비술사를 상대로 술법을 사용함은 반칙이다. 홍의백면은 반칙을 저지른 자들을 퇴장시키고 사라진다.
세가의 합의를 거슬렀으니 술사의 편이라 할 순 없다. 하나 관군 편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도 아니다.
홍의백면은 양측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암약(暗躍)했다. 이런 경우 쌍방으로 군소리 듣기 십상인데, 그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불만을 일축시켜 버렸다.
“소장은 그자의 심사를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선한 의도로 행한 일이옵니다.”
하오나, 저하.
“그 선함이 언제까지 유지되겠나이까.”
한 사람의 선의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습니까.
“소장은 주단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또래 동무부터 종친 어른까지 두루 뵙고, 큰 잔치가 열릴 적에는 다른 세가의 술사들도 종종 접했습니다. 제 평생을 걸고 확언드리온데.”
금씨의 두 눈이 태자를 직시했다.
“현존하는 술사 중. 단독으로 홍의백면을 당해 낼 자는 없습니다.”
“······.”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온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탄식하듯 외는 말에 태자가 상석에서 일어났다. 금씨에게 다가선 태자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경의 염려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리 편일 땐 든든하나, 적으로 돌아서면 두려운 존재로군요. 하나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지 않겠습니까.”
“···네, 저하.”
“참, 홍의백면에게 새로운 별호를 지어 줘야지요? 이왕이면 ‘수호신’을 뜻하는 게 좋겠습니다. 옛말에 생은 그 이름자를 따른다지 않습니까.”
혹시 아나. 온 세상이 그를 수호신이라 부르면, 진정한 수호신으로 거듭날는지⎯
***
“···⎯!”
별안간 몸이 휙 당겨졌다. 아무개는 진득한 악몽의 늪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다.
여긴 어디지? 나는 막사에서 회의를···
“아무개 님.”
낯선, 아니 익숙한 목소리.
목선에 두른 옷깃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손목을 붙들어 당기는 동시에 등허리를 받쳐 주는 팔에 안기다시피 한 아무개가 조금 늦게 옷깃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술사님?”
눈 뜨자마자 직면한 그가 몹시 반가웠으나, 티 낼 수는 없었다. 전에 없이 굳은 표정의 그가 해부할 듯한 시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온 탓이다.
“설명이 필요한데요.”
아무개의 손목을 움켜쥔 그가 맥박 치는 살갗을 엄지로 느른히 문질렀다. 간질하면서도 홧홧하고 오싹한 감각에 전신이 흠칫, 떨렸다.
아무개가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 맥을 못 추자 술사가 밧줄이요, 하고 넌지시 일깨워 주었다. 그제야 아무개도 깨달았다. 잠들기 전, 몸을 묶은 밧줄이 무참히 썰려 나가고 없다.
“······그···.”
아무개는 제 행동이 무척 합리적이라 자부했다. 한데 어쩐지 술사에게 털어놓기는 저어되었다.
“그게··· 혹시 또, 악몽 때문에··· 사고 칠까 봐.”
“악몽을 꾸지 않도록 베개를 마련했잖아요?”
그 베개가 보여 주는 꿈이. 악몽보다 무서워.
아무개는 악몽이 익숙했다. 지긋지긋한 원혼들이 끈질기게 들러붙는 것조차 자신을 구성한 일부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하지만 율해서는 아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꿈장수에게 또 사기당했다는 생각에 짜증스러웠다. 차츰 익숙해지고부터는 난생처음 맛본 평온한 잠자리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한데 언제부턴가 무시무시한 가정이 마음 한편에 맴돌았다. 어쩌면, 꿈장수가 사기 친 게 아닐는지 모른다는······.
“아무개 님.”
다정을 가장한 어조로 술사가 속살거렸다.
“베개가 맘에 들지 않아요? 차라리 악몽을 꾸고 싶을 만큼?”
“······그런 게 아니라···.”
때론 강압적인 행동보다 유한 언담이 더욱 무겁게 와닿을 때가 있다. 지금처럼.
아무개는 자다 깬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꿈, 꿈장수가··· 또 사기 쳤나 봐.”
“어떤 사기요?”
“베개를 베면··· 악몽은 안 꿔. 그런데··· 내가 원하던 꿈도 아니야.”
“무슨 꿈을 요구하셨기에···.”
은근한 어조로 아닌 척 캐내려던 술사가 도중에 멈췄다.
“비밀이라 했었죠? 꿈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효력이 사라진다고요.”
아무개는 그에게 잡힌 손목에 온 신경이 쏠렸다. 악몽의 늪에서 강제로 끌어내던 거친 기세와 달리 손목 안쪽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낯뜨거울 만치 보드라웠다.
“베개를 쓰고 말고는 아무개 님 마음이지만, 너무 괴롭히지는 말아요.”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데. 그는 짧은 당부를 남기고 손을 놓아주었다.
백지 부적이 팔랑팔랑 나르며 끊어진 밧줄을 옮겼다. 분합문 저편으로 술사가 건너갔다. 문이 닫히고 잠시 이어졌던 공간이 도로 나뉘었다.
술사는 그 길로 사당을 나섰다. 홀로 남은 아무개는 무심코 그가 어루만진 손목을 건드렸다. 따끔한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밧줄에 쓸려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손목 발목뿐 아니라 밧줄이 닿은 맨살은 모다 찰과상을 입었다. 엄청난 바보짓을 했구나. 뒤늦은 자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개는 괜스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달듯이 뜨겁고 쓰라렸다. 술사님이 어루만져 줄 땐 전혀 아프지 않았는데.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던 아무개의 눈에 돌연 이채가 서렸다.
낯선 기척이다. 총 세 명. 수는 많지 않으나,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에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기어 들어오는 꼴이 영 마뜩잖았다.
아무개는 대강 옷가지를 걸치고 나왔다. 현판에 쓰인 홍의당(紅衣堂)이라는 글귀가 오늘따라 유달리 눈에 밟혔다.
사원을 벗어나 나루터를 향하니 새벽녘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시선을 들자 멀찍이 좁쌀처럼 쬐끄만 점 세 개가 보였다.
“······! 네, 네놈은!”
거리를 좁히자 상대측에서 아무개를 발견하고 기함했다. 아무개의 눈썹 한쪽이 비딱하게 치솟았다. 저것들은 뭔데 아는 척이야.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벌써 발각된 건가!”
“어서 도망쳐!”
턱에 시퍼런 멍이 들고 전신에 붕대 감은 환자 셋이 영문 모를 소릴 하더니 냅다 꽁무니 뺀다. 어찌해야 하나.
일단은 잡아놔야겠지?
“···히이익?!”
가볍게 발돋움한 아무개가 공중 회전하며 그들 앞에 사뿐 착지했다. 퇴로가 막힌 세 사람이 다급히 멈춰 섰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아무개가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아무개가 별 뜻 없이 꺼낸 말 한마디에도 셋은 소스라치며 기겁했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호들갑 떠는 꼴에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아무개는 소지부터 엄지까지 차례로 손가락을 접으며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귀찮은데. 확 그냥 세 놈 다 강에 담가 버릴까 보다.
“서, 선생님! 저희는 유랑술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흉신의 불온한 낌새를 알아챈 걸까. 셋 중 한 놈이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나머지 두 놈도 덩달아 고개를 조아렸다.
“흑심을 품고 농간을 부리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만···.”
“시간이 이러한 탓에 선생께서 오해하실 수도 있지만, 이건 저기 강변 놈들 몰래 오려다 보니 그렇습니다요!”
상처투성이 몰골. 먹고살기 힘들어서. 강변 놈들 몰래.
불현듯 떠오르는 바가 있어 아무개가 확인차 물어보았다.
“너희··· 도적?”
엎드린 세 사람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도리질 쳤다.
“얼마 전까지는 도적이었지만, 지금은 관뒀습니다!”
“실은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저희를 혼쭐내실 때 우연히 들었습니다. 술사 나리께서 돌아오셨다고요.”
“혹 술사님이라면, 저희 같은 놈도 살길을 내어주지 않을까 해서 그만···.”
이것들은 대체 술사님을 뭘로 보는 거야?
아무개의 낯이 귀면마냥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흉악무도한 기세에 전직 도적 셋은 도로 머리를 박고 웅크렸다. 그 순간.
“제가요?”
아무개도, 전직 도적들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홀연히 나타났다. 납작 엎드린 세 사람이 저승사자라도 맞닥뜨린 양 혼비백산했다. 내색은 않았지만, 아무개도 약간 놀랐다.
소리소문없이 축지해 온 술사는 전직 도적들을 사이에 두고 아무개를 마주 보았다.
“길을 잘못 드셨어요, 여러분. 민생 구휼은 관청을 찾으셔야죠.”
“아이고, 술사 나리!”
무릎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선 세 사람이 이마를 바닥에 거듭 들이박았다.
“관청이라니, 어인 말씀이십니까?”
“배가 고파 도적질을 했습니다요.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만, 관에선 저희 사정 따위 알아주지 않을 게 뻔합니다. 구제는커녕 필시 형을 받을 겝니다!”
술사님만 없었어도 진작 강에 처박았을 텐데. 잠자코 헛소리를 들어줘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것들이 어디다 대고 징징거려?
아무개도 건실한 청년은 아닌 까닭에 도적질로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생계가 어려워 호구지책으로 삼게 되었다면 더욱이 참작할 여지가 있잖은가.
하나 옹호할 수 없는 행위임은 명백했다. 이해와 용납은 별개다. 녀석들 스스로도 떳떳지 못하니 관청은 안 된다 아우성이잖은가.
어려운 형편에 별수 없이 도적질을 감행했다손 치자. 한데 갈취당한 쪽도 마찬가지로 사정이 힘들었을 터다.
지난번 저한테 혼쭐났다더니. 그때 당시 행색을 보면 견적이 나온다. 번듯한 지휘 체계를 갖추지도 못했고 무장도 형편없었다. 그런 꼴로 털어 봤자 고만고만한 놈들 상대로 했겠지.
아무개는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언제든 타인이 자신을 해칠 수 있음을 염두에 뒀다. 남한테 칼질했으면 자기도 응당 칼 맞을 각오 해야지.
한데 이 자식들은 저지를 땐 실컷 저질러 놓고 막상 대가는 치르기 싫어 몸 사리잖는가.
“여러분.”
관대한 술사님은 이런 머저리들까지 포용하시려나.
여느 때처럼 나긋한 어조로 전직 도적들의 이목을 끈 그가. 세 쌍의 시선과 나란히 맞춰 한껏 무릎을 굽혔다.
“관청은 무섭고. 저는 안 무서워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