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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6)화 (96/138)

96화

같은 시각. 아무개는 눈을 떴다.

비현실적으로 매끄러운 질감의 베갯잇이 볼을 간지럽혔다. 아무개는 베개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비에게 받은 이 베개를 베고 자면, 율해서라는 소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아무개는 베개를 애용했다.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그래, 지금까지는 악몽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테지.

율해서가 태어난 시기는 연나라 말 무렵. 시대상으로도 암울하기 짝이 없건만, 녀석의 행보는 더했다.

아무개는 직전의 꿈을 떠올렸다. 해원의 도움으로 곳간에서 벗어난 율해서는 북방의 술사들과 맞선다. 가문을 등지고 홀로서기를 택한 것이다.

아무개는 서랍장에서 밧줄을 꺼냈다. 사현을 날려 버린 후 같은 실수를 방지하고자 챙겨 둔 것이다.

밧줄로 사지 전신을 묶어 스스로 구속한 아무개는 꼼지락꼼지락 이불을 파고들었다. 이리 결박해 두면 남을 해칠 수 없다. 고작 밧줄 따위로 흉신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어 줄 테지.

아무개는 베개를 멀찍이 밀어놓고 눈 감았다. 더는 율해서를 꿈꾸고 싶지 않았다. 혹여, 만에 하나 꿈장수가 사기를 친 게 아니라면.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게 나으니까.

***

제 발로 악몽에 걸어 들어오다니.

살아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악몽을 피해 물구나무서고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꼬집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 밤새우던 나날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개는 생의 무상함을 곱씹었다.

잠들기 전 율해서를 떠올린 탓일까. 새로운 악몽조차 연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했다. 심지어 군사회의 도중으로 갑옷 입은 무장 여럿이 막사에 모여 있었다.

아무개는 상석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악몽의 주인은 꽤나 직위가 높은 모양이다.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지경이외다.”

무거운 음성이 침묵을 깨트렸다.

“백성은 물론, 병사들마저 홍의백면을 기다린다지 않습니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홍의백면.

다환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알았다. 피처럼 붉은 홍의를 입고 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숨긴 무명의 술사. 연나라 멸망 후 종적을 감추었음에도 이백여 년이 지난 훗날에까지 사대귀인 중 제일로 거론되는, 전설적인 인물.

수호지신.

“자, 자. 고정하세요. 태자 저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소리를 낮추세요.”

곁에서 만류하던 이가 상석을 힐끗 곁눈질했다. 제 쪽의 심기를 살피는 눈치라 아무개도 자각했다.

이 악몽의 진정한 주인. 아무개가 깃든 육신의 정체는, 연나라 최후의 태자였다.

“크흠. 송구합니다, 저하. 흥분이 과했습니다.”

“괜찮습니다.”

태자의 검지가 팔걸이를 톡톡 반복해 두드렸다. 그 사소한 행동에도 모두가 주의를 기울였다.

황가에서 면피용으로 내세운 욕받이 겸 미끼. 적통 황자들은 죄 고사한 독주를 넘겨받은 후궁 소생. 허수아비 취급이라도 받으면 다행인 신세였으나, 태자는 실의에 잠겨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불안한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모집하여 후방 지원과 보급에 힘썼으며. 친히 전장에 나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풍전등화에 놓인 국면이 태자의 노력으로 기사회생했다. 감히 누가 허투루 대할 수 있으랴.

“홍의백면이 그리 대단합니까? 군사마저 동요할 만큼?”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태자가 편히 하라 권하자 슬슬 말문이 트였다.

“호명성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지난 보름, 청림 인근 주민들이 홍의백면을 목격하고 하룻밤 새 산성(山城)이 생겼다 합니다.”

“이건 남령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만, 이튿날 미시(未時) 초소병이 홍의백면을 목격했다 합니다. 호명성과 남령은 대략 이천 리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놀랍습니다. 고작 하루 만에 산성을 세우고 이천 리를 움직였군요?”

태자가 호응하자 여럿이 덩달아 말을 보탰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것이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겠습니다.”

“요물이외다, 요물.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소.”

그들의 웅성거림을 가만히 경청하던 태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술사든 요물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지 여부입니다. 경들 의견이 궁금하군요.”

“물론, 도움이 됩니다.”

이견은 없다.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그는 홀로 군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일인 군단이라 해야 할 겁니다.”

“하룻밤 새 산성을 지은 것도 놀라운데 기동력까지 출중합니다. 치고 빠지는 솜씨는 가히 입신의 경지에 다다랐지요.”

“일류 책사들이 침식을 잊고 머리를 맞대 작성한 전략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오로지 전술만으로 승리를 이끌어 내는··· 그야말로 규격 외의 병기입니다.”

“홍의백면이 나서기 전까지 우리 군세는 적 술사의 맹공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저하께 이런 말씀 올리기 참으로 면구합니다만··· 그자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겝니다.”

“그자가 협력했다면 전쟁은 진작 종결됐을는지 모릅니다. 아니, 협력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그가 일반 병사도 해치워줬더라면······.”

협력 운운하는 말꼬리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묵묵히 듣고 있던 태자가 한 인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대가 유명한 술사 가문 출신이라 하셨지요.”

태자의 하문에 막사 내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사방에서 찌를 듯한 눈빛을 받은 이가 한숨을 삼키며 아뢰었다.

“소장의 본관은 주단 금씨입니다. 부족하나마 오대세가의 말석을 얻은 곳이지요.”

“그대 생각은 어떻습니까. 홍의백면을 우리 측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습니까?”

“불가합니다.”

금씨는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즉각 고하였다.

“홍의백면이 북방의 병졸은 두고 술사만 대적하는 까닭은, 비술사를 술법으로 상해해선 안 된다는 규율을 지키려 함이라 사료됩니다. 술사로서 자질이 부족해 연을 끊고 출가한 저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속세에 관여치 않는 것 또한 술사의 규율일진대. 전장에 발을 들였으면 이미 어긴 게 아니오? 어떤 규율은 어겨 놓고 어떤 규율은 지키겠다니. 어찌 돼먹은 심보인지 모르겠소.”

맞은편의 장수가 투덜투덜 토를 달자 금씨가 짧게 덧붙였다.

“북부 놈들이 군영에서 술사를 제하면, 홍의백면 또한 전장에서 물러날 겁니다.”

사색에 잠긴 태자가 곧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를 포섭하는 건은 보류하겠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당장 동원 가능한 자원을 우선해야지요.”

이어서 태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이왕지사 이리된 바, 차라리 더욱 더 명성을 떨치게 합시다. 홍의백면은 심상하니 그럴싸한 별호를 붙여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어 보지요.”

“저하, 고작 일개 술사에 지나지 않는 자입니다!”

“일신의 무위가 아무리 대단한들 판세를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군사 전략에 제휴하지 않고 홀로 활동하는 한, 물 흐리는 미꾸라지 꼴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태자 저하께서 친정(親征)하시는데 어찌 출신도 불분명한 술사 나부랭이를······.”

거센 반발에 너른 탁상이 뒤흔들릴 지경이었다. 태자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팼다.

“좀 전에 경들이 직접 고하지 않았습니까. 백성은 물론, 병사마저 홍의백면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고요.”

“하오나, 저하···.”

“황궁이 습격받은 당시에도 남부 지방은 민란이 한창이었습니다. 급작스런 외침으로 잠시 수그러들었으나, 그뿐이지요. 이반되고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이 막중한 책무는 황실에서 수행함이 마땅하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요.”

적군이 쳐들어오자 시종으로 환복하여 꽁무니를 뺀 황제다. 뒤늦게 진상을 안 백성들이 분노하여 궐을 약탈했을 지경이니 오죽할까. 결국 약관도 채 지나지 않은 태자가 이렇듯 애쓰는 형국이다.

“난세는 영웅을 요합니다.”

태자가 탄식하듯 토해 냈다.

“가면을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홍의백면은 신원을 드러낼 의사가 없습니다. 국난이 수습되고 나면, 규율에 의거해 속세를 떠나겠지요. 논공행상 사후 처리로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룻밤 새 산성을 축조하고 반나절도 안 되어 이천 리를 오가는 그 가공할 만한 능력은 선전하기에도 좋지요. 적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겐 자부심을 이끌어 낼 겁니다.”

태자는 다음 명을 내렸다.

“다환 전역에 홍의백면을 모르는 이가 없도록 널리 알리세요. 그의 숭고한 정신에 감화되어 전란에 임하는 재야의 술사들이 더욱 늘어나야 합니다. 홍의백면의 행보를 낱낱이 밝히고, 두문불출하는 세가와 대조시켜 국난 극복에 비협조적인 행태를 비판하고 압박하세요.”

아무개는 내심 놀랐다. 구중궁궐에서 눈칫밥 먹고 자라서 그런가. 뜻하지 않게 주제 파악이 제법이다.

난세는 영웅이 필요하다. 하나 태자가 영웅을 자처한다면, 필시 황제의 눈 밖에 났을 터다.

황실의 위상이 추락하고 태자를 유일한 희망이라 일컫는 자들이 만연한 판국이나, 태자는 태자일 뿐 천자가 아니다. 적통 황자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가운데 후궁 소생으로 책봉되어 정통성도 약했다.

입지가 위태로워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데 전대미문의 외침까지 극복해야 한다니. 어지간한 역량이 아니고서는 진작 무너졌으리라. 이래서 후대 사학자들이 그를 두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태자’라 칭하는 모양이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을 물린 태자는 단 한 명, 금씨를 막사에 남겨 두었다. 홍의백면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듣고자 함이었다.

“저하. 홍의백면은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나고 자란 저로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신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금씨는 이내 힘겹게 실토했다.

“그가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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