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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5)화 (95/138)

95화

“연나라가 무너질까요?”

한술 뜨는 형님 앞에 쪼그려 앉은 해원이 무릎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상상이 잘 안 돼요. 연나라는 다환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대제국이잖아요.”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은 듯, 해원이 혼자서도 종알종알거렸다.

“정말 망해 버린대도 썩 와닿지 않아요. 위기감도 별로 안 들고요. 유사 이래 무수한 전란을 겪고 여러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어도 오대세가는 명맥을 이어 왔잖아요?”

“······이번에는 양상이 다릅니다.”

표주박을 입가에 대고 목을 축인 율해서가 조금 늦게 답했다.

“다환에선 술사가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간의 전란은 대개 다환에서 벌어졌고, 유사한 문화권에 공통된 인식을 지녔으니 암묵적인 불문율도 지킬 수 있었죠.”

하지만 북방 이민족은 달랐다.

“이북 사람들은 술사를 병력으로 투입하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시했습니다. 기저에 깔린 인식이 저희와 판이한 민족입니다.”

술사를 전력으로 인지하고 전장의 말로 사용하는 자들이다. 세가를 가만 놔둘 리 없지.

“그들 입장에서 오대세가는 조정의 통치권을 벗어나 무장한 사조직입니다. 권력자가 무척 싫어하는 부류지요. 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저희 차례입니다. 포섭 혹은 말살. 둘 중 하나겠죠.”

복속시켜 휘하에 거느리는 쪽이 최상. 회유가 불가하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예로부터 위정자란 족속은 저가 소유하지 못한 위협적인 힘을 두려워했으므로. 통제 불가한 변수는 도려내야 마땅했다.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한데 형님은 그리 복잡한 전후 사정이나 인과를 계산해서 움직인 게 아니잖아요? 피난길에 뒤처진 주민들이 휩쓸리자마자 대뜸 끼어드셨다면서요.”

꽃받침 하듯 두 손 모아 턱을 괸 해원이 형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심 없는 무구한 시선이 창칼보다 날카롭게 박힌 까닭은, 진실이 그 어떤 병기보다 강력한 무기여서일까.

“······황제 폐하께서 파천하게 된 경위를 아십니까?”

“그럼요.”

미처 대비할 겨를도 없이. 북방의 술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성도 상공에서 홀연히 나타난 일단의 무리는 지체 없이 궐로 진격했다. 금군이 결사 항전했으나, 초인에 비견되는 술사의 이능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맥없이 스러졌다. 금위가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몰아치니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치기 바빴다.

관군이 습격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시종으로 변복한 황제를 맞닥뜨린 후였다.

“듣자 하니 하늘을 이용했다지요? 무슨 수를 썼을는지 짐작도 안 가요. 북방의 술법이 생소할 줄은 알았지만, 가히 상식 밖이라 믿기지 않더라고요.”

“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겁니다.”

종친의 분노를 사고 이리 구금당하게 된 발단. 관군의 교전에 끼어든 바로 그날.

“하늘길을 타고 온 술사들이 지상으로 낙뢰와 우박을 쏟아 냈습니다. 만약 천벌이 있다면, 그와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환 북서부에는 바다보다 넓은 호수가 있다. 호수에는 포악한 빙룡이 거하고 있어 예로부터 이북과 교류가 드물었다. 근 몇 년간 연나라는 심심찮게 발발하는 민란과 모반으로 내우(內憂)를 수습하기 바빠 호수 너머의 사정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결국 외환(外患)이 벌어지고 말았다.

“솔직히 두렵습니다.”

율해서가 담담히 고백했다. 해원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다들 제가 교전 중에 끼어들었다고 질책하셨지만, 아닙니다. 그건 교전이 아니었습니다. ······학살이었어요. 일방적인.”

그의 뒷말은 혀끝에 맺혀 스러질 듯 가냘팠다. 율해서의 몸에 깃든 아무개조차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세가에선 외침에 관여치 않기로 했다지요. 술사의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입니다만, 진정 그 이유로 찬동한 자가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개가 보기에도 그랬다. 낮에 대전에서 맞닥뜨린 면면은 신념과 원칙을 철저히 하는 이라기엔 다소 께름한 구석이 있었다.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무익한 항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나와 관계없는 일이니까.

“제 짧은 소견으로는··· 오늘 뵌 종친 가운데 진정으로 원칙을 지키고자 한 분은, 본부인 마님뿐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면이 있죠.”

어릴 적엔 응석 한 번 받아 주질 않아 서러웠노라고, 불만을 토로한 해원이 밭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역시 잘 모르겠어요. 형님이 어째서 속세의 사정에 그리 마음을 주시는지.”

긴긴 대화가 무색하게도. 해원은 변함없이 무구한 시선으로 조잘거렸다.

“하지만 이건 알지요. 우리 화양 율씨는 물론 오대세가까지. 아무도 형님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거요.”

“······.”

“저는 형님 편이에요.”

율해서가 고개 들었다. 해원이 말간 눈으로 웃음 지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문중에선 형님을 감금해서라도 잡아 두려 하겠지요. 형님은 화양 율씨 역사상 최고의 전력이잖아요.”

읏차, 하고 일어선 해원이 문가로 다가갔다.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저는 형님 편이에요. 그러니 형님께서 뜻한 바를 이루시길 바라요. 설령 두려움을 무릅쓰고 천벌에 맞서는 일이 될지라도.”

곳간을 벗어난 해원이 나직이 덧붙였다.

“문은 이대로 두고 갈게요.”

인기척이 사라지고. 율해서에게 남은 것은 자물쇠가 열린 문이었다. 좁다랗게 벌어진 문 틈새로 희푸른 달빛이 어두운 곳간에 비쳐 들었다.

율해서는 한 줄기 빛을 응시했다. 달빛은 썩 밝지 않았다. 하나 어둠 속 갇힌 이에겐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빛이 눈부시게 선명했다.

어느 순간, 율해서가 일어났다. 그는 어둠을 등지고 빛을 향해 걸어갔다.

***

허수아비가 미로의 문을 열었다. 아가리를 벌린 어둠 속 주홍빛 등잔불이 짐승의 이빨처럼 번뜩였다.

부인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바짝 따라붙은 재효와 소영, 비설도 함께 문지방을 넘었다. 도깨비 감투를 쓰니 잠입이 한결 수월했다. 세 사람은 기척을 죽이고 부인을 뒤쫓았다.

재효는 금비설을 흘깃했다. 열 받을 정도로 재수 없고 뻔뻔한 녀석이었으나, 모친의 뒤를 밟을 땐 긴장되는지 굳은 낯이었다.

미로는 복잡했다. 우측으로 꺾는가 하면 좌측으로 꺾고, 오르내리는 계단까지 있어 방향 감각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사방의 벽과 바닥이 동일한 형태에 재질이라 이정표 삼을 만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부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미로를 수백 수천 번 오가다 끝내 외워 버린 양. 그렇게 네 사람은 차츰 미로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부인이 돌연 멈춰 섰다. 세 사람도 자연히 걸음을 세웠다.

“게 있느냐.”

반듯한 벽면을 향해 부르는 행태에 재효는 찔끔 식은땀을 흘렸다. 뭐지. 설마 들켰나?

놀라서 간이 다 쪼그라들 것 같을 즈음, 좌우로 벽이 스르륵 밀려났다. 벽 뒤쪽 새로이 열린 공간에서 허수아비가 콩콩 뛰어나왔다.

“가군을 뵈러 왔다.”

재효와 소영은 무심결에 금비설을 돌아보았다.

어릴 적. 금비설과 어울렸던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비설의 부친이신 현 주단 금씨 종주께선 날 때부터 병약한 몸으로, 비설이 옹알이하기도 전에 한적한 시골로 요양 가셨다. 하여 비설은 아버지를 뵌 기억이 없다시피 했다.

한데 그 아버지가, 미로에 계시다고?

허수아비가 길을 비켜 주었다. 부인이 들어가고 세 사람은 서둘러 따라붙었다.

벽 너머는 기존 미로와 판이한 분위기였다. 음지 식물로 작지만 공들여 가꾼 정원을 중심으로 마루와 섬세하게 짜인 문살이 둘러쌌다. 내실 어디서든 정원 풍광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마루를 쓸고 닦는 허수아비, 정원을 돌보는 허수아비, 빨랫감을 옮기는 허수아비··· 미로에선 코빼기도 안 보이던 것들이 죄다 예서 모인 양하여 세 사람은 한껏 몸을 사렸다.

부인이 허수아비들을 지나 장지문 앞에 섰다.

“들어가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부인이 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아한 병풍 아래 놓인 침구가 불룩이 솟아 있었다.

비설이 홀린 듯 걸음을 내디뎠다.

십수 년 만에 온 가족의 만나는 자리. 불청객이 끼어들 때가 아니다. 재효는 가시방석에 앉은 양 좌불안석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도깨비 감투는 하나뿐. 셋이 함께 움직여야 하니.

“제가 왔습니다.”

불룩 솟은 침상 앞에 앉은 부인이 이불자락을 살포시 걷어 냈다.

“제가 보인다면, 제 목소리가 들린다면··· 뭐든 좋으니 신호를 주세요.”

“······.”

“아직 눈동자는 움직일 수 있군요. 좋습니다.”

눈을 굴리기조차 버거워하다니.

요양하러 떠났다는 얘긴 거짓일지언정, 몸이 성치 않은 건 참말인가 보다.

“이로써 우리 아이는 조금 더 유예된 자유를 누리겠네요.”

비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재효와 소영도 혼란 가득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어미 된 몸으로 이리 말하면 아니 될 테지만··· 지금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힘들면 언제든 쉬어도 괜찮아요. 당신은 충분히 오래 버티셨어요.”

조금 더 가까이. 부인의 등에 가려진 종주가 언뜻 보이도록.

그들 부부의 지척에 다다른 순간, 재효는 비설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영은 온몸으로 비설을 끌어안았다.

부릅뜬 눈 사이의 미간. 굳게 닫힌 입술과 두 뺨은 물론, 콧잔등과 목까지. 거미줄처럼 빼곡히 금이 가 있었다.

비설의 부친. 주단 금씨 종주는, 도자역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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