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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4)화 (94/138)

94화

***

“대체 어쩌자고 그리한 게냐!”

다짜고짜 벼락같은 호통이 내리꽂혔다. 저를 향한 위협이 아니건만, 아무개는 본능적으로 꿈속의 상황부터 파악하려 했다.

요즈음 아무개는 도피하듯 잠에 들곤 했다.

이런 걸 두고 방어 기제라 하는 걸까? 지긋지긋한 악몽 탓에 밤을 지새우던 나날이 엊그제 같건만. 세상에 미련 한 점 남기지 않으려는 듯 무욕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잠에라도 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덧없는 꿈이라 한들 적어도 악몽은 아니었으니.

한데 어째 초장부터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화왕의 정원에서 한가로이 시작하던 지난 꿈과는 판이했다.

너른 대전 상석에 앉은 종주. 그 곁에 본부인 마님과 좌우 양쪽으로 마주 서 도열한 종친회. 그들 모두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남은 소년.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직은 율해서라는 이름 석 자보다 절뚝이라 불리는 게 익숙하던 시절. 대뜸 화분을 들이밀어 놓고 능력을 증명하라 요구받던 때와 흡사했다.

“관군이 이민족과 교전하는 중에 끼어들다니!”

종주가 팔걸이를 내리치며 분개했다.

관군과 이민족의 교전이라. 그 노호성 덕에 아무개는 몽중의 세월이 제법 흐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북방을 휩쓴 가뭄의 여파로 오랜 기근을 견디다 못한 이민족이 바다보다 넓은 호수를 건너 남하하던 시절. 연나라 말 무렵의 혼란기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주민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대로 개전했다면 인명 피해가···.”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율해서가 대답했으나, 종주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도중에 끊어 냈다.

“술사는 관의 일에 개입해선 아니 된다. 네 나이가 몇인데 이리 기본적인 소양조차 지키지 않는 게냐! 이민족이 무얼 하든 황실에서 해결하게 놔두거라!”

“······난리통에 누구보다 앞서 파천한 황제가 어찌 해결한다는 겁니까.”

“태자가 남았잖느냐!”

“피란길 노상에서 책봉한 태자를 거론하십니까. 황실에서 면피용으로 내놓은 욕받이 겸 미끼 신세임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적통 황자들은 죄 고사하고 후궁 소생이 무리해 떠맡은 독주를 나눠 마시자는 뜻이온지.”

“황실의 내밀한 사정은 네까짓 게 상관할 바 아니다!”

듣자 하니 율해서는 ‘정사(政事)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술사의 불문율을 어겨 소환당한 모양이다.

정쟁에 뛰어들어 권력을 추구한 것도 아니고.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교전에 참여한 것이 이리도 질타받을 잘못인가. 아무개로서는 다소 의아했지만.

“우리는 속세를 떠난 몸이다. 홍진에 섞이려 들지 말거라!”

“······속세를 떠난 몸이라.”

고개를 깊이 숙인 율해서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뒤틀렸다.

“속세를 떠나면 사람이 아니게 된답니까? 사람으로 나고 자랐사온데 어찌 현세에서 한량없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예가 어느 안전이라고 버릇없이 사사건건 말대꾸하는 게냐!”

“북방의 이민족은 술사를 정규군으로 배속시킨다지요. 일반 백성뿐인 다환의 군영에서 그들을 당해 낼 리 없습니다.”

“······이놈이 그래도···!”

“스승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 곧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연나라가 짓밟히면, 뒷짐 지고 있던 술사들은 마냥 무사할 성싶습니까?”

“가, 감히 모란 님을 팔아 어른을 가르치려 들어?! 이런 배은망덕한···!”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되리 만치 시뻘겋게 물든 종주가 격분했다. 분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 듯했다.

냉담한 낯으로 묵묵히 주시하던 본부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건방 떨지 마라.”

펄펄 뛰는 종주와 달리 부인은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러나 대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준엄하고 엄숙하게, 율해서를 문책했다.

“너 홀로 옳고, 너 홀로 의로우며, 너만이 남다른 선견지명을 품은 듯 오만방자하구나. 네 짧은 식견으로도 궁리한 바를 누군들 사려치 못하겠느냐? 이미 타 가문과 협력하여 첩보를 수집하고, 며칠 밤낮을 지새워 다방면으로 논의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다.”

줄곧 엄중히 질책하고 역설하던 부인이 돌연 한숨처럼, 나직이 일렀다.

“오대세가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랬듯 중립을 고수하겠다는 표명이다.

“······북방 이민족은 술사를 정규군으로 파병합니다만, 알면서도 그리 결정하셨군요. 주축인 오대세가에서 공론하면, 다른 중소 문파들도 따라서 자중할 겁니다. 술사는 같은 술사만 상대할 수 있으니 연나라 측은 승산 없습니다.”

“저들이 도리를 어기고 신령의 힘을 빌려 혹세한들, 저속한 수작에 어울려 동조해서야 되겠느냐. 원칙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하기에 원칙인 것이다.”

“반칙을 자행하는 적에게도 원칙을 고수하시겠다니 심히 존경스럽습니다만. 그 숭고한 신념, 누가 알아줍니까? 벌써부터 다환의 술사들은 겁먹고 꽁무니나 뺐다며 원성이 자자하던걸요.”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저들의 무도함을, 우리의 용단을.”

하- 기가 찬다는 듯, 율해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딴 게 무슨 상관입니까.”

위험한데.

아무개가 아는 율해서는 이러지 않았다. 기껏해야 꿈에서 몇 번 접했을 뿐이니 아주 잘 안다고는 못 하지만··· 매양 무미건조하던 녀석이 웬일로 이리 감정적인 걸까.

“수백 년 후 역사가가 써 내린 글줄 따위 알 바입니까? 당장 오늘 죽게 생겼는데요.”

역사의 심판은 목전에 드리운 고통에 비해 형체 없고 무가치했다. 먼 미래를 그리기엔 당면한 현재를 버티는 것부터 힘겨웠으니.

누군가에겐 사료로 남을 흔적이. 누군가에겐 지독한 현실이다.

“오호통재라, 장래 촉망받던 인재가 불온한 사상에 물들었구나!”

도열한 종친회 일원들 사이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율해서의 눈동자가 그 소리를 좇았다.

“제 사상의 불온함보다는, 여러분의 부족한 현실감을 걱정해야지 않겠습니까.”

“저, 저런 무엄한···!”

“네 이놈! 보자 하니 건방이 도를 넘는구나!”

방자한 직언에 사방팔방 노성이 터져 나왔다. 율해서는 그들의 노기등등한 면면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부럽네요. 그 태평함이.”

마르다 못해 버석한 어조로 율해서가 평했다.

“현 시국이 본인과 무관하다 여기니 이렇듯 태연자약하시겠죠.”

듣고 보니 아무개도 새삼 신기했다. 전란이 발발하고 황제가 파천했는데도 다들 어찌나 이성적이신지.

오랜 수양 끝에 명경지수와 같은 심의를 깨우쳐 그런 게 아니다. 자신과 관계없는 먼 얘기를 들을 때 나오는 냉철한 판단이다.

“됐다! 더 떠들어 봐야 입만 아프지. 말로 타일러선 안 되겠다. 저놈을 당장 가둬라!”

종주가 명하자 하인들이 움직였다. 율해서는 굳은 낯을 하고서도 반항 않고 묵묵히 하인을 따라나섰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 마냥 사리 분별 못 하고 날뛰기는··· 한 며칠 조용한 데서 머리나 식히고 와라.”

종주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동조의 소리가 더해졌다.

“세속의 난에 저리 동요해서야, 원. 이러니 밖에서 들인 것들은 못 쓴다 했던 겝니다. 검은 머리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닙지요.”

“우리 가문에 들인 게 아홉 살 무렵이던가? 어려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그때 벌써 머리가 굳은 모양이외다.”

“일찍이 술사로서 처신과 태도를 엄격히 가르쳐야 했소이다. 학당에 보내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방치하다시피 하다 모란 님께 간택 받았잖소. 세속의 물이 덜 빠진 채로 유학을 간 게요.”

“글러 먹은 정신 머릴 뜯어고치려거든 힘깨나 들겠습니다. 저희 가문에 입적하고 술사로 지낸 세월보다, 이름 없는 천민 나부랭이로 살아온 시절이 더 길잖습니까.”

쿵-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멀쩡한 사람을 불량품 취급하던 말소리도 덩달아 끊겼다.

율해서는 곳간에 갇혔다. 감옥보다는 형편이 낫다 위안 삼을까. 율해서는 층층이 쌓인 볏섬에 기대어 앉았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가져다주는 이 없이 죽치고 있자니 어느덧 사위가 컴컴해졌다. 깍지 낀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부엉이 울음소릴 자장가 삼던 찰나.

철컥, 자물쇠가 열렸다.

“형님?”

해원이 찾아온 것이다.

율해서를 발견한 해원은 냉큼 곳간에 들어와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었다. 먹거리가 한가득이었다.

“종일 굶으셨다면서요? 어여 드세요. 물은 여기 있어요.”

해원이 조롱박을 내밀었으나, 율해서는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이리 누추한 곳에 오시면 안 됩니다.”

바싹 마른 입술이 처음 꺼낸 말은 훈계조에 가까웠다. 해원이 시무룩해졌다.

“그치만, 형님이 굶으셨다고···.”

“종주님께서 내린 벌입니다. 혹 들키기라도 하면 도련님께 누가 될 겁니다.”

“안 들키면 되죠! 형님이 빨리 드실수록 저도 일찍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럼 들킬 위험도 줄겠죠?”

아우를 위해 어서 드시라고 재촉하는 언동에 율해서가 피식 웃었다. 아침나절 대전에서 드러낸 날 선 미소와 확연히 달랐다.

해원에게는 이따금 내비친 듯 자연스러웠으나, 아무개로서는 처음 겪는 미소였다. 얼굴에 석고라도 발랐나, 의심스러울 만치 굳은 낯을 예사로 하더니. 언제 이리 웃을 수 있게 된 걸까.

매 꿈마다 수년씩 널뛰듯 뭉텅 넘어가 버려도, 정황을 통해 어렵잖게 따라갈 수 있었는데.

미소하는 율해서의 얼굴이, 누그러진 입매가 지극히 평연해서. 아무개는 문득, 건너뛴 꿈 사이의 간극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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