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술사님···.”
한껏 언성을 낮춘 아무개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속닥였다.
“술사님은··· 중매 안 들어와···?”
중차대한 첩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낮게 깐 아무개가 진지하게 물었다. 혹여나 독순(讀脣)에 당할까 손으로 입 모양도 가렸다.
“아무래도 그렇죠? 저랑 살면 고생길이 훤하잖아요.”
소중한 자식을 방랑벽이 도진 사내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으냐고. 그의 부연에 아무개는 재차 물었다.
“혼인해도··· 계속 떠돌 거야?”
“설마요. 책임질 식구가 생기면 가정에 충실해야죠.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은 혼례를 올리면 안 돼요.”
아무개는 그가 세상을 두루 표류하는 까닭을 상기했다. 민중의 구제든 십억만의 후계자든. 불가해하고 번잡한 사족을 소거하고 남은, 명확한 목적.
사멸(讀脣).
여기에 혼인이라는 변수를 추가해 보자. 그 스스로 말하길, 가정에 충실해야 하므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한다 하였다. 이를 역으로 적용하면, 혼인할 시 그는 부랑자 노릇을 끝내고 죽을 수 없게 된다.
즉, 혼인하면 죽지 않는다.
아무개의 심중에 기적의 논리가 전개됐다. 한데 막상 그가 현숙하고 미려한 여인과 혼례를 올린다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속이 안 좋아요?”
뻐근한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자 술사가 다가왔다. 아무개는 별일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눈매를 설핏 찌푸렸다.
술사님이 혼인하는 게 싫다. 푸른 단령을 입은 그를 상상만 해도 심장이 저릿하다.
불현듯 활옷을 입은 술사가 떠올랐다. 꿈속에서 신부로 가장한 그를 열여덟 번이나 본 탓일까.
어라. 그러고 보니··· 우리, 혼례를 올렸잖아?
“혹시 체한 건···.”
“술사님.”
“네?”
“우리도 혼인했지?”
아무개가 말을 더듬거나 질질 끌지 않고 똑바로 발음했다. 극히 드문 모습인지라 술사도 내심 놀란 기색이었다.
“음, 그렇죠? 꿈속에서지만요.”
“어쨌든 했잖아. 그치?”
그가 농담조로 서방님이라 부를 적엔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막상 제게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들자 아무개는 무서우리만치 진지해졌다.
돌이켜 보니 그렇다. 비록 꿈에서나마 열여덟 번이나 혼례를 올렸고, 실제로도 종종 서방님이라 불렀잖은가. 심지어 칠교 남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밝혔거늘!
“생각해 봤는데, 꿈속의 경험을 마냥 헛되이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느낀··· 모든 걸 기억하는 한.”
꿈은 단지 꿈으로 끝이다.
하나 꿈에서 실지로 영향을 받았다면, 그저 무의미한 몽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잖은가. 변화한 스스로가 이리 버젓이 남아 있거늘.
“궤변이네요.”
아무개가 힘겹게 주장을 내보였으나, 술사는 단답으로 종결했다. 아무개는 의기소침해졌다.
저 혼자 술사와 혼인하는 꿈을 꿨다면, 망측함에 몸서리치며 이불 좀 걷어차고 잊어버렸을 터다. 하나 그때 당시 둘은 말짱한 정신으로 몽중 세계에 임했잖은가. 비록 행동에 제약은 있었지만.
이쯤 되면 과장 좀 보태서, 반절은 실제로 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개 님께서 어떤 심정으로 말씀하셨을는지 짐작이 가서······.”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 술사가 쓰게 웃었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속에서 울컥 치받는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내게, 염원을 들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지 마!
“저는⎯”
“여기 계셨군요, 술사님!”
그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하필이면 이때.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린 아무개가 방해꾼을 돌아보았다. 한데 놈이 아니었다. 놈들이다.
심지어 묘하게 낯이 익다. 사람 얼굴 따위에 하등 관심 없는 아무개는 고민 끝에 깨달았다. 최근 도적 떼가 쳐들어왔을 때 앞장서서 막던 청년들이다. 애써 키운 작물을 넘겨주지 않겠다며 울분을 토하던.
“저를 찾으셨나요?”
술사가 국수 그릇을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우르르 몰려든 청년들은 아무개를 발견하고 주춤했으나, 곧 술사에게 초점을 맞췄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아무개는 일전에 저들이 지껄이던 불평불만을 떠올렸다. 술사에게 도적 떼를 토벌해 달라 하자던 개소리도.
설마 그때 그 헛소리를 마저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무개는 손에 쥔 빈 그릇을 힐끔 곁눈질했다. 이걸로도 두개골은 충분히 쪼갤 수 있으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라, 일단 들어 볼까요.”
“······앞으로 마을 농사에서 손을 떼셨으면 합니다.”
“무어어어어?!”
막판의 짐승 같은 괴성은, 평상에 앉아 약주를 걸치던 중장년에게서 터져 나왔다.
“아니, 이놈들이 뜬금없이 뭔 미친 소리여!”
“멍청한 소리 하덜들 말고,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부모뻘 되는 웃어른들이 험악하게 으름장을 놓자 청년들이 주춤했다. 그러나 할 말은 하겠다는 듯 눈을 치뜬 몇몇이 기어코 반발했다.
“술사님께서 일손을 거들어 주신다는 명목으로 총 수확량의 일부를 바치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성의 표시라지만, 실상 세금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기껏해야 년에 두어 번 들르는 술사 나리보다, 매일같이 논밭에 나가는 우리가 훨씬 고생하는데 말이죠. 저희가 나리 소작농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된답니까?”
사설이 제법 일리 있는 듯도 했다. 하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술사를 걸고넘어지면 용서치 않는 아무개가 빈 그릇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한데 이번에도 중장년 측에서 먼저 나섰다.
“이노무 자식들이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를···!”
“그러죠.”
버럭 하고 삿대질하는 어른들과 달리. 술사는 평연히 받아들였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밭일에는 일절 손대지 않을게요.”
“아니. 잠시, 술사님!”
술사가 선언하자 평상의 어른들이 소스라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취기마저 달아난 얼굴로 술잔을 팽개치듯 던지고서 간곡히 청했다.
“아이고, 술사 나리. 저놈들이 뭘 몰라서 그럽디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단단히 혼쭐을 낼 터이니···.”
“하하. 그러지 마세요.”
술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라, 아무개도 그릇을 놓고 따라 섰다. 국수를 준 새댁에게 목례한 술사가 청년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없어도 소출 일부를 공용으로 저장하는 관습은 유지되길 바라요. 재해를 대비하기도 좋고 경사나 흉사에도 요긴하게 쓰이거든요.”
마지막 당부를 남긴 술사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를 뒤따르던 아무개의 시야에 가짜신령이 언뜻 비쳤다. 작심하고 들이닥쳤건만, 냉큼 승낙해 버린 술사의 결단에 얼떨떨한 이들 틈에서 나란히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저건 또 왜 저런 데 섞여 있담. 남몰래 한숨 쉰 아무개는 제 팔자려니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 망할 놈들아, 아주 거하게 사고 쳤구나!”
멀어지는 등 뒤로 흥분 섞인 책망이 쩌렁쩌렁 울렸다.
“술사님이 밭일에서 손 떼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소출이 뚝 떨어진다, 뚝!”
“도적놈들이 괜히 우리 고을에 얼씬거리는 줄 알어? 다른 데보다 형편이 나아서 그런 게지!”
“마을을 벗어난 적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같으니! 저기 산 너머 옆 마을은 논 한 결에 쌀 서른 석밖에 못 얻는다. 고작 서른 석이라고!”
이제는 희미하게 들리는 아우성에 아무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 결당 쌀 서른 석이면 무난하잖아. 이 동네 수확량이 얼마나 좋기에 서른 석을 ‘고작’이라는 거야?
“···술사님··· 지주였어?”
“아니에요.”
“······? 그런데 왜···.”
어찌 소작농을 운운하며 소출 일부를 바쳐 온 건가. 아무개가 의문을 표하자 술사가 난색을 보였다.
“재미없는 얘기예요. 너무 옛일이고 쓸데없이 길어서.”
“아니야··· 재미있어.”
은근히 보채자 술사는 곤란해하면서도 서두를 뗐다.
과거 연나라가 몰락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난세에 접어들었다. 저자도 인근 주민들은 생계를 찾아 피난길에 올랐고 머지않아 마을이 텅 비어 버렸다.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술사는 가진 재주를 살려 공방을 차리고 논밭을 일구었다. 먹고살 길이 보이자 새 사람이 유입되었다. 마을은 차츰 옛 모습을 되찾아 갔다.
“살 만해지니 외지인이 식량을 노리고 침입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초기에는 민병대를 차출할 여력도 없고 해서 제가 나섰죠.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길 거듭하니 매번 도움만 받기 미안하다며 이것저것 챙겨 주시더라고요.”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하나둘 쥐여 주던 것이 어느덧 관례로 자리 잡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옛일을 기억하는 이가 없어 와전된 모양이지만.
“그래도··· 받아 두는 게 좋지 않아?”
무보수 노동 봉사도 정도껏이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인간이란 족속이다. 설혹 대가를 받지 않더라도 수고에 상응하는 값을 명시해야 염치라도 생길 텐데.
“나쁘지 않죠. 홍수나 태풍 피해가 생길 때 꺼내 쓰면 되니까요.”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닌데.”
일부 주민들은 술사의 몫이 과하다 여기고 불만을 표했다. 상부상조의 관례도 오늘로 끝. 그까짓 도움 안 받고 말지, 소작료 내듯 하는 꼴에 부아가 치밀어 더는 못 참겠다는 뜻이렷다.
정작 술사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긴커녕 고이 모셔 두다가 마을이 위급할 때 돌려주었는데 말이다.
아무개가 떨떠름한 낯을 하자 술사가 작게 웃었다.
“사소한 푼돈이니 마음 쓸 필요 없어요. 본래 어린 여자아이도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한 곳을 물색하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이럴 바엔 직접 만드는 게 빠르겠다 싶어 시작했거든요. 그밖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아무개는 지난날의 악몽을 떠올렸다. 미로에 갇혀 도자역 실험에 이용된 남장 거지 꼬마. 지금은 대협곡 깊이 술사가 만든 묘지 어딘가에 묻혀 있을.
녀석의 원혼도 들었을까. 부디 그러길 바랐다. 그가 보잘것없는 거지 꼬마와의 약속을 지키려 분투한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술사님은··· 아무것도 가지질 않네.”
별개로 신경이 쓰였다. 그는 물욕이 전혀 없는 걸까? 유랑술사가 작정하고 나서면, 오대세가 뿐 아니라 영화단 못지않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을진대. 옥선방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물론 대단하나, 여행자금으로만 쓰는 듯하니 말이다.
“손에 쥔 게 많을수록 몸이 무거워지니까요. 욕심은 미련을 낳고, 미련은 발목을 붙잡죠.”
그것은 떠돌이의 생존법이었다. 부평초마냥 발길 닿는 데로 오가는 삶.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아무개는 고개를 떨구었다.